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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생존자 박영심의 피해실태 보고서 발표
   -피해당사자,조사단 파견 현지공동조사 진행
(평양 1월 16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16일 이전 일본군 《위안부》생존자 박영심의 피해실태와 관련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조사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이전 일본군 《위안부》생존자 박영심의 피해실태와 관련한 조사보고서

우리 강토와 민족을 피바다에 잠그고 온갖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던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때로부터 60년이 되여온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군성노예범죄와 강제련행범죄를 비롯하여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상처에서는 여전히 진한 피가 흐르고있다.

아래에 일제의 가장 악랄하고 추악한 일본군성노예범죄희생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는 한장의 사진이 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9월 일제에 의해 총폭탄이 우박치듯 쏟아지는 중국-먄마국경일대 최전선에까지 끌려가 일본군《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하다가 련합군에 포로된 조선녀성들이다.

사진에서 오른쪽 끝에 고통스러운 얼굴로 힘겹게 서있는 임신한 녀성이 바로 현재 강서군에 살고있는 박영심이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와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수많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이 생존해있지만 박영심은 《위안부》시기의 생동한 사진자료가 남아있고 그가 《위안부》였다는것을 립증하는 당시의 문서들과 목격자들이 현존해있는것으로하여 일본의 과거청산운동을 벌리고있는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의 커다란 관심속에 있다.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최근에 박영심이 일본군에 끌려다니며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한 중국의 남경과 운남 등지에 피해당사자를 포함한 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에서 중국과 일본의 전후보상문제연구자,활동가들과 함께 그의 피해상황에 대한 공동조사를 진행하였다.

아래에 그와 관련한 조사보고서를 발표한다.

1.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게된 경위

박영심은 1921년 12월 15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가난한 탄부가정의 맏딸로 태여났다.

당시 일제의 학정아래 신음하던 조선의 로동자,농민의 가정이 다 그러하였듯이 그의 가정도 그날그날을 풀죽으로 연명해가는 매우 빈곤한 살림을 하였다.

철도 들기전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어려운 집살림을 돕기 위해 14살 어린 나이에 양복점 심부름군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온갖 천대와 구박속에서 3년이 지난 1939년 8월 어느날 양복점에 한 일본인순사가 찾아왔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박영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하루는 어깨에 별 2개를 달고 옆구리에 긴 칼을 찬 왜놈순사가 찾아와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면서 무작정 나를 끌고갔다.그때 옥경이라는 22살난 처녀도 함께 끌려갔다.순사에게 끌려 평양역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이미 20살안팎의 조선처녀들이 15명정도 모여있었다.그들도 모두 나처럼 아무 내막도 모르고 속히워 끌려온 녀성들이였다.》

그들은 거기서 유개화차에 실려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중국으로 끌려갔다.

일본군은 녀성들을 끌어가는동안 서로 말도 못하게하고 변소에도 보내지않으면서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엄하게 통제감시하였다.

박영심은 이렇게 죄인취급을 받으며 기차와 배,자동차를 갈아타면서 중국 남경에 설치된 일본군《위안소》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그의 치욕스러운 일본군성노예생활이 시작되였다.

2.남경에서의 일본군《위안부》생활

1937년 7월 《로구교사건》을 조작하고 중국을 침략한 일제는 그해 11월 상해를 점령한후 《상해파견군》과 제10군으로 《중지나방면군》을 편성하고 남경으로 진격하였다.

12월 13일 남경을 포위점령한 일본군은 이때부터 2개월간에 걸쳐 무자비한 소탕전을 벌리면서 중국군포로들은 물론 일반주민들을 대량적으로 학살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등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이 시기 남경과 그 주변에서만도 수십만의 무고한 중국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는데 일제가 남경을 점령한 첫 한달동안에만도 부녀자들에 대한 강간사건이 2만여건이나 일어났다고 한다.

특히 녀성들에 대한 대량적이고 비인간적인 강간행위로하여 병사들속에서 군기가 문란해지고 성병이 만연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바빠맞은 일본군부당국은 군《위안소》라는 《합법》적인 강간장소를 설치하여 병사들의 성욕을 만족시켜주는 방법으로 일본군의 전투력과 치안을 유지하려고 꾀하였다.

일제는 1938년 2월 《중지나방면군》을 《중지나파견군》으로 개편하고 그 사령부를 남경시에 배치하였으며 상해와 남경전역에 20만의 대병력을 주둔시키는 한편 《위안소》들을 대대적으로 설치하도록 하였다.

현재까지 남경에서 발견된 《위안소》는 40여개에 달한다.

박영심이 끌려간곳은 《중지나파견군》 사령부로부터 불과 500메터정도 떨어진곳에 설치된 순수 조선녀성들만 끌려와있는 《위안소》였는데 당시 자료에는 《리제항위안소》로 기입되여있다.

현재 시민들의 주택으로 리용되고있는 이 건물은 원래 양보경이라는 중국인이 경영하던 려관이였는데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그것을 강제로 몰수하여 저들의 《위안소》로 만들었던것이다.

《리제항위안소》는 여러동의 2층짜리 벽돌집들로 이루어졌으며 박영심이 끌려간곳은 2호동건물이였다.

조사한데 의하면 2호동은 건평이 2,200여평방메터로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건물이였으며 여기에는 30여개의 방들이 있었다.

조사단은 당시 박영심이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한 2층 19호실에 들어가보았다.

박영심은 60여년전 바로 이 방에서 자신이 당하던 치욕에 대하여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위안소>에 도착하자 놈들은 우리에게 일본<기모노>를 입히고 머리도 일본식으로 잘라버리고는 나에게 <우따마루>라는 일본이름을 달아주었다.그리고는 우리들을 한사람씩 따로따로 방에 밀어넣었는데 얼마 지나서 왜놈군대가 방에 들어오더니 미친듯이 달려드는것이였다.내가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그자는 짐승같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때리고 치다가 나중에는 군도를 목에 대고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였다.그 바람에 군도에 베여 목에서 선지피가 흘러 온몸을 적시였다.

우리는 이런 짐승같은 놈들을 하루에도 20-30명이나 치르어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공손하지않게 대하면 놈들은 마구 폭행을 가하였으며 나중에는 머리끄뎅이를 잡고 질질 끌어다가 <처벌방>에 처넣군하였다.》

박영심도 이 《처벌방》에 몇번이나 갇히웠는데 그가 있던 19호실의 맞은켠 옆방 웃층에 다락식으로 만든 《처벌방》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여기에 끌어다가는 천정기둥에 매달아놓고 때리거나 밥도 주지않고 며칠동안 캄캄한 방에 가두어 두었다고 한다.

당시 《위안소》의 바로 뒤집에서 살면서 《위안부》들의 생활을 직접 보아온 목격자 침령(76살,중국 강소성 남경시 리제항거주)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자주 우리집 2층 베란다에서 창문을 통해 <위안부>들의 방을 건너다 보군하였다.일본군인들은 녀성들의 방에 들어오면 군도와 옷을 벗고는 녀성들에게 달려들군하였다.한번은 일본군인이 <위안부>를 마구 때리는것을 보았는데 그 녀성은 신음소리조차 내지못하였다.<위안소>에는 낮에는 대체로 병사들이 오고 밤에는 장교들이 왔는데 병사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위안부>들은 밖에 나오거나 창밖을 내다보지 못하였으며 일반 사민들은 절대로 <위안소>안에 들여보내지않았다.일본<헌병>들이 때때로 <위안소>에 나타나 그 운영정형을 알아보고 사민들을 단속하군 하였다.》

당시 《위안소》앞에서 잡화점을 경영하고있던 목격자 양수영(96살,중국 강소성 남경시 리제항거주)은 《<위안소>안에는 많은 조선녀성들이 끌려와있었다.군인들은 낮에 이 주변에서 술을 마시며 돌아치다가는 <위안소>로 들어가군하였다.거기서 녀성들의 비명소리가 자주 들리군하였는데 <위안소>에는 녀자들에게 벌을 주는 방이 있어 말을 듣지않거나 새로 온 녀자들은 반드시 이 방에 가두어넣고 질을 들인다고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영심은 남경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일본군의 성노리개생활을 3년동안이나 강요당하였다.

3.폭격속에서도 강요된 성노예생활

박영심이 《위안부》로 끌려다닌 로정은 그대로 일제의 침략전쟁확대과정이라고 말할수있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침략군은 침략열에 들떠 동남아시아로 계속 전선을 확대해나가면서 1942년 2월에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그해 3월에는 먄마의 양곤에 상륙하였다.

일제는 전선이 확대되자 《위안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남방이송을 조직하였는데 박영심도 바로 이 시기에 먄마로 끌려 가게된것이다.

이 시기 상해와 싱가포르를 거쳐 먄마의 양곤에 도착한 《위안부》들은 1,000여명에 달하였는데 일본군은 거기서 《위안부》들을 20-30명씩 조로 나누어 먄마 각지의 일본군부대들에 배속시키였다.

박영심은 남경에서 함께 끌려간 조선녀성들과 함께 중국국경에서 얼마 멀지않은 먄마의 라시오로 끌려갔다.

이곳에는 일제의 《먄마방면군》 제15군산하 제56사단의 경비본부가 있었다.

박영심은 여기서 《잇가꾸로》라는 《위안소》에 들어가 《와까하루》라는 일본이름으로 불리우면서 또다시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라시오에서는 주로 보병과 땅크병들을 상대해야했다.싸움마당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놈들이 술까지 처먹고 달려들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수 없었다.남방의 넓은 나무잎 우에 모포 한장을 깐 자그마한 방에서 하루종일 왜놈군대에 시달리다나면 저녁에는 일어나 앉을 기운도 없었다.그러나 저녁에는 저녁대로 또 장교놈들을 치르어야 하였는데 놈들은 조금만 제 비위에 맞지 않아도 머리끄뎅이를 잡아 흔들고 발로 걷어차군하였다.그때 나는 짐승보다 못한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고 고향생각,부모생각이 간절하여 눈물만 흘리였다.그렇다고 우리는 거기서 도망칠수도 마음대로 죽을수도없는 신세였다.》

라시오에서 1년남짓 지나자 일본군은 다시 박영심을 비롯한 10여명의 《위안부》들을 먄마와 국경을 접하고있는 송산으로 끌어갔다.

송산에는 일제 《먄마방면군》 제15군산하 제56사단의 보병제113련대와 야포병제56련대 3대대가 중경에로의 물자수송을 차단하기 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해있었다.

그러나 1944년 6월부터 《운남원정군》(중미련합군)이 송산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일본군은 100여일동안의 격전끝에 전멸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여기 송산의 깊은 산골짜기에까지 《위안부》들을 끌어다놓고 성《봉사》를 강요하였을뿐아니라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군복 세탁과 취사 등 온갖 잡다한 일까지 다 시켰다.

박영심은 그때 이미 임신된 상태에 있었다.

《위안소》를 리용하는 일본군인들은 피임기구를 사용하는것이 의무화되여 있었지만 녀성들의 건강이나 위생문제같은것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수욕을 채우는데만 급급한 일본군인들에 의해 《위안부》들이 임신되는 일이 드문히 나타나군하였던것이다.

박영심은 여기서 임신된 몸으로 병사들의 시중에 내몰리고 폭격에 쫓기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우의 사진이 바로 1944년 9월 송산을 점령한 련합군에 포로되여 찍히운 사진이다.

당시 먄마주둔 미군병사들을 대상으로하여 발행되던 신문 《라운드앞》(1944년 11월 30일부)은 이 사진에 대해 소개하면서 《4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함께 포로된 일본인녀성(35살)의 관할밑에 있었다.그들은 일본군병사들을 <위안>하는 일외에도 병사들의 옷을 빨고 밥을 지으며 방공호안을 청소해야했다.그 녀성들은 돈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고향에서 편지도 받지 못하였다.》고 썼다.

또한 련합군에 포로되여 송산전선에서 살아 남은 이전 일본군병사 하야미는 당시 송산에 있던 조선인《위안부》들에 대하여 회상하면서 《와까하루》로 불리우던 22살난 녀성의 본명이 박영심이였으며 련합군이 촬영한 사진에 찍힌 조선인 《위안부》들중에서 임신한 녀성이 바로 《와까하루》라는데 대해서와 곤명포로수용소에서도 그를 여러번 보았다는데 대해 확인하였다.

4.구원되게 된 경위

조사단은 이번에 격전의 흔적이 력력히 남아있는 송산에서도 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전투가 있은때로부터 60년이 되여오지만 아직도 일본군의 진지와 폭탄구뎅이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1944년 6월 송산을 완전포위한 《운남원정군》은 일본군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진지는 식량도 떨어지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포격과 폭격으로 시체들과 부상자들만 늘어나는데다가 장마철에 접어들면서 병사들속에서 전염병까지 만연하여 그야말로 지옥을 련상케하였다.

원정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차지하고있던 진지는 하나둘 함락되고 《마쯔야마진지》,《니시야마진지》,《요꼬마따진지》 등 몇개의 진지밖에 남지않았는데 일본군은 여기까지도 《위안부》들을 끌고다니였다.

1944년 9월 7일 마지막으로 견지하고있던 《요꼬마따진지》에 몰켜든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집단적으로 학살하였다.

송산격전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전 일본군인 요시다께가 전후에 확인한데 의하면 상관의 명령에 따라 《위안부》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그속에 수류탄을 던져 죽였다는것이였다.

이것은 박영심이 방공호를 뛰쳐나온지 얼마 지나지않아 벌어진 만행이였다.

박영심은 자기가 살아남게된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그때 방공호에서 일본군이 군기를 태웠다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를 듣고 일본군이 졌다는것을 알았다.그래서 나는 몇명의 동무들과 함께 방공호를 뛰쳐나왔다.일본군은 항상 우리에게 련합군에 붙잡히면 죽인다고 말해왔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피해 산속에 숨어있었다.그러다가 며칠만에 강가로 나왔는데 바로 거기서 중국군병사들에게 포로되게되였다.》

조사단은 그때 박영심을 비롯한 4명의 조선인《위안부》들을 찾아낸 중국인 리정조(76살 중국 운남성 보산시 룡릉현거주)를 만나 그의 증언을 청취하였다.

《그때 17살이던 나는 중국군대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일손을 도와주고있었는데 그날은 2명의 중국군인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수무천가로 나왔었다.이때 강가에서 몇명의 녀성들과 1명의 일본군인을 발견하였다.우리가 소리를 치며 총을 쏘자 일본군인과 녀자 1명은 강에 뛰여들었다.그러나 장마철에 물이 몹시 불어나있었고 물살이 세서 물에 뛰여든 녀성은 강을 건느지못하고 떠내려가다가 나무가지에 걸리였다.달려가보니 이미 죽어있었다.남은 녀자들을 데리고 올라오던 우리는 강냉이밭에 누워있는 또 1명의 녀성을 발견하였다.그는 임신된 상태였는데 배가 몹시 고팠는지 강냉이를 뜯어먹고있었다.나는 그에게 중국군은 녀자들을 죽이지않고 집에 돌려보내준다고 안심시킨 다음 강냉이밭에서 그를 데려내왔다.그가 몹시 힘들어하기때문에 내가 옆에서 부축해주었다.그때 녀성들이 배고파하기에 우리 집에 데려다가 밥을 먹인 다음 그들을 중국군대가 주둔해있는곳까지 데리고 갔다.데려가는 동안 임신된 그 녀성은 출혈을 하여 다리로 피가 흘러내렸으며 얼마 걷지못하고 자주 쉬군하였다.》

이번 조사길에서 박영심은 자기를 구원해준 리정조로인과 60여년만에 상봉하였으며 《위안소》자리와 심문받던 장소 등을 확인하였다.

포로된 박영심을 비롯한 4명의 녀성들은 련합군의 심문을 받은후 보산에 있는 포로수용소를 거쳐 인차 곤명포로수용소로 이송되였다.

당시 련합군에 의해 작성된 일본군《위안부》들에 대한 심문자료에는 박영심의 이름과 나이,조선에서 끌려온 날자 등이 정확히 기록되여있었다.

박영심은 포로수용소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태아는 배속에서 이미 죽어있었다고한다.

곤명포로수용소에서 1년반가량 있으면서 조국광복을 맞이한 그는 인천까지 배를 타고 나와 서울과 청단을 거쳐 1946년 봄에야 고향으로 돌아오게되였다.

치욕스러운 과거생활을 생각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것이 부끄러웠지만 죽어서도 가고싶었던곳이기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그는 말하였다.

* *

일제에 의해 조국으로부터 수만키로메터 떨어진 중국과 먄마의 산속을 끌려다니며 5년동안이나 강요당한 비인간적인 성노예생활은 그를 영원히 아이를 낳을수 없을뿐아니라 심장판막과 방광염같은 고치기 어려운 질병에 시달리는 페인으로 만들었으며 일제침략자들의 더러운 성노리개생활을 강요당하였다는 수치감과 울분으로하여 한생을 정신적고통속에 살게 하였다.

더우기 일본군성노예피해자들을 모독하면서 사죄와 보상을 회피하고있는 일본당국과 우익반동들의 처사는 박영심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입히고있다.

조사단은 이번에 중국 남경과 운남성의 등충현,룡릉현 등 지난날 일제가 강점했던 지역들에서 일본군부가 직접 설치하고 조선녀성들을 끌어왔던 수많은 《위안소》들을 확인하였으며 그곳에서 우리 녀성들이 당한 처참한 피해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할수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한결같이 수많은 조선녀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와 갖은 모욕과 학대를 다 받으며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한데 대하여 증언하였다.

조선녀성들이 끌려간곳은 중국뿐이 아니다.

일본과 대만,싱가포르,인도네시아,먄마,괌도 등 일제침략군의 발길이 가닿는곳마다에는 그 어디나 《위안소》가 설치되였고 거기로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이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끌려갔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이러한 엄청난 인권유린범죄에 대하여 전후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록 사죄와 보상은 커녕 그 진상조차 똑똑히 밝히지않고 있으며 우익정객들을 내세워 《민간업자들의 행위》이라느니,《녀성들이 돈을 바라고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느니 하면서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온갖 비렬한 언동을 서슴지않고 있다.

박영심의 피해실태가 보여주는바와같이 일본군성노예범죄는 철저히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녀성들의 모집과 이송 등 모든것을 구일본정부와 군부가 직접 책임지고 제도화하여 조직적으로 실시한 20세기 최대최악의 반인륜적인 국가범죄이다.

국제법적으로 《인도에 대한 죄》 등 기본인권과 관련한 범죄에는 시효가 적용되지않는다.

일본은 전쟁법규와 국제인도법원칙에 따라 구일본국의 과거죄행에 대해 법적,도덕적책임을 인정하고 철저히 사죄보상하여야할 국제법적 의무를 지니고있다.

세계적으로 볼때에도 이미 수십년전부터 도이췰란드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들이 과거에 자국이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력사적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하고있으며 이것은 하나의 시대적추세로,국제적흐름으로 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의 면전에서 저들의 범행을 뻔뻔스럽게 외곡은페하고 침략과 범죄로 가득찬 과거를 공공연히 미화분식하는 일본의 처사는 초보적인 량심도 체면도 없는 비도덕적인 행위가 아닐수없다.

아시아의 이르는곳마다에는 아직도 일제의 피비린 만행을 폭로하는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증거물들이 그대로 남아 일본의 과거범죄를 낱낱이 고발하고있다.

이 력사의 증견자들이 있는한 일본당국은 과거청산의 책임에서 절대로 빠질수없다.

만일 일본당국이 앞으로도 계속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와 국제적도의를 무시하고 끝끝내 과거청산을 회피하는 길로 나간다면 조선인민은 물론 세계인민들의 규탄과 배격을 면치못할것이며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결과만을 초래하게될것이다.

일본당국은 이제라도 과거청산에 대한 그릇된 자세와 립장을 버리고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모든 반인륜범죄행위에 대하여 성근하게 반성하고 그 진상을 깨끗이 밝히며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충분한 사죄와 보상을 하여야한다.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주체93(2004)년 1월 16일
평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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