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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항일혁명투사 김일의 서거 20돐에 즈음한 글
(평양 3월 9일발 조선중앙통신)9일부 《로동신문》은 항일혁명투사 김일의 서거 20돐에 즈음하여 《투철한 신념과 순결한 량심으로 수령을 옹위한 충신원로》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추켜드신 선군의 기치따라 시련의 폭풍우를 헤치며 과감히 전진하는 조선혁명은 당과 수령,조국과 인민에게 끝없이 충실한 수많은 열혈혁명가들을 배출하였다.

그 전렬에 혁명의 총을 잡고 사령부를 옹위하던 백두산시절부터 생애의 전 기간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한 조선혁명의 충신원로 김일동지가 서있다.

민족해방,계급해방,인간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투쟁에 한생을 바쳐 싸운 견결한 혁명투사였으며 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과 당과 국가건설,새 사회건설에서 불멸의 공적을 쌓은 우리 당과 국가의 저명한 활동가였던 항일혁명투사 김일동지의 한생은 그야말로 충신의 생애이다.

오늘 우리 군대와 인민은 시련의 날에나 행복한 날에나 변함없이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온넋을 바쳐 따른 김일동지의 충성의 한생을 뜨겁게 추억하며 선군시대 혁명전사들의 심장이 어떻게 높뛰여야 하는가를 다시금 깊이 새기게 된다.

어버이수령님의 《오른팔》

어느 해 봄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투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병으로 고생하는 김일동지를 옆에 앉히시고 김일동무가 없으면 내 오른팔이 없는거나 같습니다라고 하시며 앓지 말고 건강해야 한다고,김책동무가 곁을 떠난 다음에 내가 울었는데 김일동무가 죽으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라는가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의 《오른팔》!

혁명의 수령에게 충성다한 전사의 삶이 얼마나 높은 영광의 절정에 이를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이 뜻깊은 칭호에 김일동지의 한생이 그대로 비껴있다.

위대한 수령님을 가까이 모시고 조선혁명의 험준한 산악들을 무수히 넘고 헤치던 나날에 수령님의 안녕을 위하여,그이의 절대적권위를 옹호보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친 불굴의 혁명투사 김일동지, 그는 태양의 품속에서 자라난 조선의 참된 혁명가들의 수령결사옹위정신이 얼마나 투철하고 진실하며 열렬한것인가를 실천적모범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우리 혁명의 제1세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항일혁명투사들의 의리를 두고 론할 때면 김일의 얼굴을 먼저 돌이켜보게 된다. 김일은 50년 가까운 세월을 폭풍우속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는 나와 함께 항일전쟁도 하였고 새 조국건설도 하였으며 반미전쟁도 하였고 사회주의건설도 하였다.》

수령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매혹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여 수령을 따르는 길이라면 그 어떤 사지판도 웃으며 헤쳐가는것이 바로 혁명가의 인생행로이다.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태여나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아오다가 홍안의 시절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항일혁명의 불길속에 뛰여든 김일동지가 1936년 가을 처음으로 수령님을 만나뵈옵게 된것은 그의 일생에서 잊을수 없는 뜻깊은 사변이였다.

당시 반일부대에 들어가 정치공작을 하고있던 김일동지를 부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고 백두산밀영의 주변지역인민들을 조직화,혁명화할데 대한 중대한 임무까지 맡겨주시였다.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순간 진정 이분이시야말로 민족의 태양이시며 그이따라 나갈 때 조국광복의 미래를 앞당길수 있다는 신념을 더욱 굳게 간직하게 되였다.

사생결단의 의지로 반《민생단》투쟁의 좌경적오유를 극복하고 수천수만의 조선혁명가들의 운명을 구원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대용단으로 새 생명을 받아안던 잊을수 없는 나날들이 되새겨져 눈물을 금치 못하던 영광의 시각을 김일동지는 한생토록 잊지 못해하였다.

조선혁명의 심장이시고 운명의 전부이신 위대한 김일성동지를 위하여 내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충성다하리라!

김일동지는 그날의 맹세를 언제나 가슴에 안고 고난의 행군을 비롯하여 혁명앞에 어려운 시련이 닥쳐올 때마다 유능한 군사정치일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수많은 격전장들에서 혁혁한 위훈을 쌓아올렸다.

위대한 수령님 가까이 있을 때나 멀리 떨어져있을 때나 김일동지의 뇌리에는 항상 사령부보위와 사령관동지의 명령관철이 첫째가는 중대사로 간직되여있었다.

1941년 초가을 김일동지가 소부대활동을 하고있던 곳으로 사령부의 련락임무를 가지고 전령병이 찾아온적이 있었다.

그때 김일동지는 사령관동지의 곁을 순간도 떠나지 말아야 할 전령병이 소부대가 있는 곳까지 온것이 너무도 놀라와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는 장군님의 호위를 잘해야 하오. 전령병은 절대로 사령관동지의 곁을 떠나서는 안되오. 앞으로 나라가 독립되면 우리는 장군님의 령도밑에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서야 하오.》

항일무장투쟁시기 김일동지는 중대정치지도원,련대정치위원의 중임을 맡아 수행하였지만 언제 한번 수령님의 전사라는 자각을 잊은적이 없었다.

하기에 준엄한 전화의 나날 전선사령부 군사위원으로 사업할 때에도 김일동지는 수안보를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안녕을 지켜 스스로 보초병이 되여 김책동지와 함께 새날이 밝을 때까지 수령님의 숙소주변을 순찰하였다.

그때 호위군관이 호위사업은 자기들이 맡겠으니 들어가라고 권하자 김일동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들이 알아둘것은 지금 우리는 전선사령관이나 군사위원이 아니라 장군님의 보초병이요. 우리는 백두산에서부터 장군님을 지켜온 보초병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장군님의 보초병이란 말이요. 그러니 동무들은 우리를 생각할것이 아니라 오직 장군님만을 생각해야 하오. 빨리 자기 초소로 돌아가시오. 우리 걱정은 말고!》

위대한 수령님을 보위하여 스스로 교대없는 호위병이 되여 밤을 지새우는 김책동지와 김일동지의 그날의 모습은 항일혈전의 나날 《우리 모두 굶어죽어도 사령관동지께만은 절대로 강낭밥과 같은 험한 식사를 대접해드려서는 안되오. 우리가 다 이 만리타향에 묻히여 무주고혼이 된다 해도 사령관동지께서만 건강하시면 조선혁명은 반드시 살아서 승리를 보게 되오.》라고 하면서 적구에 가서 지하공작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자루에 쌀을 넣어가지고 오군한 백두산전우들만이 남길수 있는 눈물겨운 화폭이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일은 내가 사랑하여준것에 못지 않게 나를 사랑하였다,그가 항일무장투쟁의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나에게 강낭밥을 먹이지 않기 위하여 어디에 갔다올 때마다 흰쌀을 구하지 못하면 좁쌀이라도 구해오군하던 일이 눈에 선하다,나는 산에서 오래동안 싸웠지만 혁명동지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투쟁하였기때문에 위만은 좋았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지시에 대한 집행을 상급앞에 지닌 하급의 의무로가 아니라 령도자에 대한 전사의 의리로 여긴 진짜배기 혁명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과업을 주실 때면 무거운 일이건,가벼운 일이건 김일동지는 언제나 《알았습니다!》로 대답하였다.

마당거우밀영에서 련대정치위원의 임무까지 겸해야 하는 1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받을 때에도 김일동지는 《알았습니다!》라고 하고는 다른 구구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즉시 하루낮하루밤사이에 왕복 200리길을 강행군하여 무송소대의 소식을 알아가지고 돌아와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리였다.

김일동지가 중대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던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송에 나가있는 1소대의 소식이 없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던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명령에는 오직 수행이라는 보고만이 따라야 한다는 절대적신조를 간직하였기에 김일동지는 소부대활동을 벌리던 어느 날에는 한 소부대가 국내정찰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오자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관철하기전에는 죽을 권리도 없다.》는 엄한 추궁을 하고 그들을 인솔하여 적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다시 들어가 중대한 정찰임무를 기어이 수행함으로써 조국광복을 위한 최후공격작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수령의 명령지시에 대한 절대적이고도 무조건적인 결사관철의 정신을 떠나 우리 당과 국가의 저명한 활동가로서의 김일동지의 한생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다.

김일동지는 당사업이면 당사업,군건설이면 군건설,경제지도이면 경제지도 등 초소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성실히 일하였다.

국가적투자와 이목이 집중되던 청천강화력발전소건설때였다.

그때 있은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김일동지는 자기를 청천강화력발전소 건설장에 전권대표로 파견해줄것을 제기하고 현지로 달려나갔다. 그는 공사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설건물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7~8층짜리의 아빠트높이만한 계단을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오르내리며 건설을 불이 번쩍 나게 추진시키였다.

지팽이에 의지하여 물이 걸리면 물문제를 해결하러 떠났고 탄문제가 제기되면 주저없이 막장길을 헤친 김일동지의 그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얼마나 감동되였는지 모른다.

김일동지는 섣달그믐날까지 공사장에 있으면서 불철주야로 일하다가 1호보이라에 불을 지피는것까지 보고서야 평양으로 돌아와 위대한 수령님께 충성의 보고를 올리였다.

절대성,무조건성으로 일관된 김일동지의 투철한 수령결사옹위정신은 우리 혁명이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을 때마다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주체45(1956)년 4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몇몇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들이 중요한 정책문제를 토의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당과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한 반당반혁명종파분자가 일어나더니 그 엄숙한 좌석에서 인민생활문제를 거들며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을 헐뜯었다.

그자의 구변이 좋았고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때여서 누구도 면박을 줄념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김일동지가 벼락치는듯한 노성으로 《당신이 무슨 나발을 부오. 왜 당신이 요즘 출출해하는놈처럼 잡소리질이요?》라고 하며 그자를 다불러댔다. 김일동지의 서슬푸른 기상앞에 그자의 기가 꺾여있을 때 다른 한 종파분자가 방금 그 소리가 헛소리가 아니라 군중의 의견이라고 두둔하는것이였다.

김일동지는 그자에게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였다.

《당신도 똑똑히 놀란 말이요. 군중은 인민인데 인민은 우리 수령님을 절대지지하고있소.》

김일동지의 호된 반격에 그자들은 얼굴이 벌개가지고 쥐구멍을 찾았다.

늘 과묵하고 진중하던 김일동지가 범같이 무서운 기상으로 당의 로선을 사수하던 때를 자주 돌이켜보시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일동무가 그날 날카로운 안목으로 종파놈들의 책동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조겨댔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수령의 두리에는 동지들이 있다. 그 동지들이 수령을 보위하고 수령의 혁명사상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김일동지는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위인의 풍모를 닮으라!

김일동지는 어떤 경우에나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한것이 아니라 동지들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당과 혁명의 리익을 먼저 생각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당과 국가의 높은 직급에서 활동하였지만 자기에게 특전,특혜,특대가 차례지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래사람들이 자기를 특대하려고 하면 그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은것이 김일동지의 인간적면모였다.

김일동지의 집을 꾸리는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였다. 당시 김일동지의 집은 전후에 지은것이여서 해당 부문 일군들이 여러차례 보수하려고 하였다. 그때마다 김일동지는 자기 집은 아직도 그만하면 괜찮으니 집을 보수할 자재가 있으면 수령님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로동자들의 주택을 한세대라도 더 짓도록 하라고 돌려보내였고 응접실에 주단을 깔거나 안락의자를 들여놓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일동지는 한생토록 세도와 관료주의를 몰랐으며 남다른 혜택,색다른 물건을 받는것을 질색하였고 생활을 검박하게 하였다. 공장이나 농촌지도사업을 나갈 때에도 점심밥을 싸가지고 다니였다.

한번은 김일동지가 지도사업을 하러 내려갈 때 오전중으로 끝내고 돌아올것을 예견하고 점심준비를 안하고 떠난적이 있었다. 그런데 일이 늦어지는바람에 그만 끼니를 건넸다. 집에 돌아와 밥을 찾는 김일동지에게 집식구들이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가지고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한마디씩 하였다. 그때 김일동지는 어줍은 미소를 지으며 차마 밥달라는 소리를 할수 있어야지라고 말하고는 저도 소리내여 웃었다.

이런 일은 그의 생애에서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때마다 주변의 일군이 보기 딱하여 현지에 련락하여 점심준비를 시키려고 하면 김일동지는 《내가 무슨 대감이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도 현지지도하실 때 줴기밥으로 끼니를 에우시는데 항차 내가 무엇이라고 사람들에게 페를 끼친단 말이요.》라고 말하군하였다.

한평생 인민들과 꼭같이 잡수시고 인민들과 한치의 간격도 없이 생활하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평민적풍모에 매혹되고 그분들처럼 살며 일해나가려는 열망이 김일동지의 인생을 한없는 소박성과 겸손성으로 일관되게 하였다.

김일동지가 한생 아첨과 사리사욕을 모르고 고지식하고 청렴결백하게 살아올수 있은 또 다른 하나의 비결이 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건국의 초행길에서 사업상 필요로 새 조선건설의 중임을 맡아나선 항일혁명투사들의 이름을 새로 지어주실 때 김일동지에게는 자신의 존함에서 두 글자를 내여 지어주시였다.

김일동지의 본명은 박덕산이였다.

자신의 이름에 깃든 어버이수령님의 산악같은 믿음을 새기며 김일동지는 늘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어주신 김일이라는 이름을 내가 수령님으로부터 새로 받아안은 생명으로 여기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수령님께서 나에게 준 그 생명을 일생동안 간직하리라고 마음다지고 오늘까지도 김일이라고 내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나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어주신 <김일>이라는 이름에 있는 김자는 우리 수령님을 언제나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뜻이고 일자는 한일자인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김일이라는 이름을 한평생 오직 위대한 수령님 한분밖에 모르는 혁명전사의 신념의 표시로 간직하고있다.》

이렇듯 김일동지는 자신의 이름에 깃든 어버이수령님의 웅심깊은 뜻을 깊이 새기며 언제 한번 자신을 수령의 전사,인민의 심부름군이라는 립장에서 떼여놓고 생각한적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속이 얕고 겉치레를 좋아하는 사람,사리와 공명에 물젖은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면 쉽게 변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진실하고 대바르고 고지식하며 뜨거운 사람들은 딴길을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다는것을 준엄한 현실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다.

김일동지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받드는데서 자그마한 가식도 없었다. 당과 국가의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한 그는 아래에서 제기되는 문제나 우에 보고하는 문제에서도 언제나 진심을 가지고 심사숙고하였다. 일군들자신이 결심하고 집행할수 있는 문제를 요란하게 제의서를 만들어 우와 아래에 밀려하거나 무슨 일을 쥐꼬리만큼 해놓고서도 산이라도 떠옮긴것처럼 우에 보고하려는 현상을 보면 아주 옳지 않은 책임회피로,낯내기로 호되게 꾸짖었다.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오수정화장처리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에도 무슨 제의서를 내자고 하는 사람들에게 김일동지는 엄하게 말하였다.

《오수처리문제까지 우에 결론을 받아야 하고 손을 내밀어야 하겠는가. 그런것을 해결하라고 총리가 있고 부주석도 있고 시인민위원장도 있는것이요.》

김일동지는 산하의 일군들이 우로,아래로 문건이나 전달하는 련락병이 아니라 자기 부문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책임지는 진짜배기일군이 되도록 늘 관심해왔다.

김일동지는 가정혁명화에서도 모범이였다. 피는 유전되여도 사상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관점을 가지고 로투사는 가족들을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충성다하도록 이끌어주었다. 김일동지는 집안식구들이 모일 때면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이 되는것은 아니다. 수령을 알고 수령의 참된 전사가 되였을 때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다.》라는 훈계를 하면서 자식들은 부모들이 혁명에 충실한 덕을 보자고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였다. 맏손자가 3대혁명소조생활을 한기 더하며 단련하도록 떠밀어보낸것은 김일동지의 인간됨됨을 말해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한생 혁명에 충실해온 김일동지를 널리 소개하도록 촬영가,기자,작가들을 보내실 때마다 로투사는 그들에게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성을 선전해야 할 임무의 중요성을 깨우쳐 돌려보내군하였다. 함께 싸우던 동지들이 병문안을 올 때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찾으실수 있겠는데 왜 자리를 떴는가고 하면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도록 당부하던 이야기는 김일동지의 혁명가적풍모를 뜨겁게 말해주고있다.

김일동지의 당조직관념은 당원이라면 누구나 따라배워야 할 모범이다. 김일동지는 운명하기 3일전에도 당생활총화에 참가하여 자신의 당생활을 총화하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의 전사로서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와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관철에 모범이 될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생애의 말년까지 무한한 혁명열로 가슴불태우고 자그마한 사리와 공명,아첨도 배격하고 소박하게,진실하게 살아온 김일동지의 한생은 오늘 위대한 장군님 받드는 선군시대 우리 일군들이 고지식하고 대바르고 겸손하게 살며 일해나가도록 고무해주고있다.

혁명위업계승에 바친 진정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그 후계자에 대한 충실성으로 이어질 때 진실하고 공고한것으로 될수 있다.

주체혁명의 만년미래를 담보하는 위업계승에 특출한 공적을 쌓은 우리 혁명의 제1세들인 항일혁명투사들의 충실성이야말로 조선혁명이 백년천년 전진해도 길이 빛내여야 할 고귀한 전통이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싸운 백두산전우들이 당의 기초축성위업의 주추돌이 되던 력사의 나날에도 김일동지는 언제나 그 성스러운 위업실현의 맨 앞장에 서있었다.

김일동지는 《백두광명성》탄생을 천고밀림의 구호나무에 쓰던 그때부터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장래 민족의 령도자로,심장으로 높이 모시고 따른 우리 혁명의 충신원로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하신 때부터 그는 혁명과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눈부신 변혁들을 체험하며 특히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는 거창한 위업을 줄기차게 밀고나가시는 비범한 령도를 목격하며 사상과 령도의 천재이시며 문무충효를 겸비하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이시야말로 위대한 수령님의 유일한 후계자이시라는것을 더욱 심장으로 절감하게 되였다.

그이께서 집필하신 로작 하나를 보아도,그이께서 이끄시는 경제건설전투 하나를 보아도,그이의 손길아래 태여난 명작,명곡들을 보아도 조선혁명앞에 펼쳐진 크나큰 행운을 가슴 부풀게 느끼게 되는 김일동지였다.

하기에 그는 육신을 괴롭히는 병마와 싸우며 항일의 전우들인 오진우,림춘추동지들과 함께 고심참담한 노력을 기울여 《주체위업의 위대한 계승자 영명한 김정일동지》,《주체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영명한 김정일동지께 충성다하자》라는 부피두터운 책자를 두권이나 저술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장군님께서 력사적인 중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시였을 때에도 장군님을 어찌 침상에서 맞이할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지팽이를 짚고 역에까지 나갔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을 혁명의 진두에 높이 모실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조선혁명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안고 김일동지는 장군님을 수령님의 유일한 후계자로 높이 모시는 사업에서 선봉이 되여 그 위업실현의 새벽길을 쉬임없이 걸었다.

주체71(1982)년 2월 15일부 《로동신문》에는 우리 나라 보도사상 처음으로 시대와 력사앞에 쌓아올리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불멸의 업적을 격조높이 칭송한 력사적인 정령이 발표되였다. 이 정령의 발표는 김일동지가 우리 혁명앞에 마지막으로 쌓은 제일 큰 공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는 우리 인민들이 추대한 인민의 령도자이십니다. 그이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민들과 일군들에게 해주실수 있는것은 다 해주시면서 자신께 차례지는 영광은 거절해오시였습니다. 이제는 김정일동지께서 우리 인민들의 성의를 받아주실 때가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때가 이미 지났다고 봅니다. 이것은 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의사입니다. 인민의 의사를 어떻게 거역할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당시 부주석으로서 중앙인민위원회사업을 맡아보던 김일동지가 이른 새벽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가 경애하는 장군님께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한 정령을 꼭 발표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한 말이다.

김일동지는 그때 자신을 뼈저리게 질책하였다.

(김책동지같은 사람이 살아있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리고도 내가 무슨 부주석이란 말인가.)

하지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로간부들이 자신을 내세우려고 할 때마다 송구스럽다고,자기와 같은 젊은 사람을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말아달라고 오히려 사정하시면서 그 제의를 굳이 반대하시였다. 그러나 김일동지는 이번만은 절대로 양보할수 없다고 하면서 어버이수령님께 이렇게 아뢰였다.

《수령님,수령님을 모시고 산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지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인생유한이라고 저희들이 이제 살면 얼마를 더 살겠습니까. 저희들이 살아있을 때 경애하는 장군님을 조금이라도 더 잘 모시다가 가야 먼저 간 동지들을 볼 면목도 있고 또 후대들앞에도 떳떳하다고 봅니다. 제 깊이 생각하고 온 걸음이니 빈손으로는 절대로 안돌아가겠습니다.》

수령의 령이라면 단 한번도 거역을 모른 혁명의 원로가 어찌하여 그때만은 강경하게 제기하였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군님께 거듭 전화를 거시였고 장군님께서는 부주석이 그렇게 완강하게 나오고 거기다가 수령님께서까지 합세하니 어쩔수 없다고 하시며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시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그 력사적인 정령이 세상에 발표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김정일동지를 내세워주려고 뛰여다니는 김일동무의 마음이 고마와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김일동무는 산에서 싸울 때 나한테 통강냉이밥을 먹이지 않자고 새벽걸음을 많이도 하더니 오늘은 또 김정일동지를 위해서 새벽길을 걷고있구만. 불편한 몸을 가지고 말이요. 이제는 모든 일이 다 잘되고있으니 다시는 이런 수고를 하지 마시오.

수령결사옹위의 원로로서 김일동지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은 곧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고 경애하는 장군님은 곧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 충성다했던 백두산시절의 변함없는 자세로 림종의 시각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을 찾아 김정일동지를 잘 모셔달라는 부탁을 남기던 김일동지의 모습은 오늘도 만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살아서도 빛나고 죽어서도 영생하는것이 충신의 삶이다.

탄우속에서도 수령결사옹위를 위해 박동치고 동지들과 인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적복무정신으로 식을줄 모르던 김일동지의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을 때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참으로 비통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김일동지와 영결하는 추도곡을 들으시며 우리 수령님께서는 《저 추도곡은 우리가 산에서 지은 노래였지.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김일이는 죽지 않았소. 그는 우리곁에 살아있소.》라고 웨치듯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눈물을 쏟으시며 김일동지의 서거에 대한 부고초안을 보아주시고나서 부고초안이 미흡하다고,김일동지에게 미일 두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과 당과 국가건설,새 사회건설에서 큰 공로를 세운 우리 당과 국가의 저명한 활동가라는 높은 평가를 안겨주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김일동지와 영별하게 되는 바람세찬 언덕우에서 홀로 오래도록 서계시며 뜨거운 눈물을 쏟고쏟으시던 우리 장군님의 그 모습을 력사는 영원히 기억하고있다.

한생토록 우리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충성다한 혁명의 원로 김일동지의 생애는 백두산장군가문의 총대혈통을 이어 선군의 새 시대를 창조해가는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영원한 충성의 좌표를 가리켜주고있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주체의 태양으로 높이 받들어모신 김일동지와 같은 굳센 오른팔,혁명의 1번수들처럼 백두산장군이신 김정일동지를 총대로 결사옹위해가는 선군의 아들들이 있는 한 조선혁명은 영원히 백전백승만을 떨칠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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