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5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오늘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임의의 순간에 인류의 머리우에 핵참화를 들씌울수 있는 위험한 핵광신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알려진바와 같이 일본반동들은 미국을 등에 업고 지난 수십년동안 재침야망실현을 위한 야심적인 핵무장화책동을 다그쳐왔다.
이것은 아시아와 세계평화에 대한 엄중한 위협이며 핵무기없는 세계를 바라는 인류의 념원에 대한 로골적인 도전이다.
지금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은 반제자주적경향이 강한 나라들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핵문제》를 억지로 만들어내여 모략과 압력소동에 열을 올리고있다.
그러나 실지로 무시할수 없는 핵문제를 안고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남의 《핵문제》를 악용하여 세계적인 핵문제밖에 있으면서 핵무장화의 길을 걸어온 일본에 오늘날 엄중한 핵문제가 있다.
조선중앙통신사는 일본군국주의세력의 위험천만한 핵무장화책동에 경종을 울리고 그것을 단호히 분쇄하기 위해 일본핵문제의 진상을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극도의 위험계선에 이른 일본의 핵무장화
오늘 일본은 일약 핵대국으로 도약할수 있는 위험계선에 도달하였다.
핵무장화가 순수 론의단계가 아니라 실천단계에서 강행되여왔으며 그 결과 재침열에 들뜬 사무라이후예들의 손에 당장이라도 핵무기가 쥐여질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였다는데 바로 일본핵문제의 엄중성이 있고 위험성이 있다.
1990년대 전반기 일본정부는 이전 쏘련의 핵미싸일해체에 대한 그 무슨 《공헌》을 검토하는 과정에 《안전한 해체를 위해 제조법을 알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내걸고 핵무기제조법을 해명하는데 달라붙었다. 그리하여 완성품으로부터 거꾸로 제조과정을 밝혀내는 《리버즈엔지니어링》(분해모방)의 방식으로 핵무기제조의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완성하였다. 그후 제조에 관한 보고서를 핵보유국의 전문가에게 넘겨주고 《틀린데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고 한다.(일본 《마이니찌신붕》 2003년 3월 5일)
이러한 핵무기제조법완성은 곧 고도의 핵기술에 토대하고 핵무기생산을 위한 완전한 물질적준비를 갖출것을 전제로 한것으로서 일본이 더는 핵무기와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것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사실상 일본은 임의의 순간에 핵무기를 만들수 있는 모든 물질기술적토대를 마련해놓았다.
무엇보다 일본은 《핵에네르기에 의한 동력문제해결》의 간판밑에 핵무장화에 필요한 핵시설과 기술을 충분히 갖추어놓았다.
1956년 과학기술청에 원자력부문을 통일적으로 장악지휘하는 부서를 내오고 그 산하에 해당한 상설기구들을 창설하는것으로 원자력개발의 첫 발을 뗀 일본은 그때로부터 야심적인 핵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시켜왔다.
그리하여 1966년 7월 일본에서 첫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여 가동을 시작하였다.
1976년에 일본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을 비준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민수용핵개발을 승인받고 다른 동맹국들에 비해 퍽 완화된 검열제도하에서 고농축우라니움을 계속 공급받을수 있는 특혜를 얻어냈다.이렇게 되여 일본은 재무장을 위한 첨단핵기술을 개발할수 있게 되였다.(프랑스라지오문화방송 1993년 11월 5일)
처음에 미국은 일본의 핵개발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산농축우라니움만 쓸수 있게 된 경수로를 판매하였으며 다른 원자로들은 일체 개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거액의 자금을 탕진하여 카나다산 천연우라니움을 기본연료로 하는 신형전환로를 개발하여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일본도서 《이미다스》 1992년판)
이로써 일본은 핵개발분야에서 미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상대적독자성을 가지게 되였다.
1980년대초 이후 일본은 원자로들을 100% 국산화하였고 핵분렬,핵융합기술을 획득하여 비핵국의 문턱을 넘어섰다. 또한 1986년 6월 30여년동안 사용할 플루토니움확보를 위한 재처리작업을 미국으로부터 허락받아 사실상 준핵국의 지위에 도달하였다.(남조선 《KBS》방송 1992년 7월 22일)
일본정부가 발표한 1993년도 《원자력백서》에 의하면 그때 벌써 일본에는 16개의 원자력발전소가 있었으며 46개의 반응로가 가동하고있었다. 이것은 핵설비의 총 설계능력에 있어서 미국과 프랑스 다음 가는것이였다.
2003년말현재 일본의 원자력발전소수는 47개로 대폭 늘어났다.(중국 《해방군보》 2004년 1월 15일)
특히 일본반동들은 1994년 4월 5일에 핵무기용플루토니움을 대대적으로 생산할수 있는 첫 고속증식원자로인 《몬쥬》의 정상가동을 개시함으로써 대내외의 한결같은 항의와 규탄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잡지 《세까이슈호》(2001년 11월 20일)는 일본은 제1세대(초기의 원형로와 같은 로),제2세대(현존 경수로 등),제3세대(개량형경수로 등)에 이어 현재 제4세대(고속증식로,고온가스로 등)의 새로운 원자로개발을 일관하게 다그치고있는 유일한 나라이라고 밝혔다.
그뿐아니라 일본은 농축,재처리,저축의 핵처리체계를 완전히 갖추기 위해 1992년 5월에 아오모리현의 록가쇼무라에 새로운 우라니움농축공장을 건설하여 가동시켜오고있으며 지금은 또 그곳에서 전국의 핵페설물총량의 60%를 재처리할 능력을 가진 대규모적인 핵페연료재처리공장건설을 다그치고있다. 2001년 12월 19일에 이 공장에로의 핵페연료의 본격적인 반입이 시작되였는데 공장조업개시예정시기인 2005년 7월까지 가동에 필요한 총 1,600t의 핵페연료를 마련할 계획이라 한다.(일본 《마이니찌신붕》 2001년 12월 19일)
한편 일본은 핵무기생산에 필요한 핵물질을 보다 더 많이 확보하는데 발광적으로 달라붙고있다.
일본정부는 원자력개발에 착수한 1950년대부터 플루토니움을 연료로 하는 고속증식로에 의존하는것을 장기목표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기초를 축성하여왔다.
이에 대해 세계여론들과 핵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핵기술이 발전하였다고 하는 미국과 유럽나라들에서도 플루토니움에 의거한 원자력개발이 비용과 안전측면 등에서 문제가 있고 또 지난 시기에 비해 우라니움을 쉽게 얻을수 있는 조건으로 하여 모두 위험한 플루토니움에서 손을 떼고있는데 무엇때문에 일본만이 유독 플루토니움에 그처럼 집요하게 매여달리는가고 의문을 표시하였다.
미국핵통제연구소는 보고서에서 일본의 플루토니움리용계획과 관련하여 《고속증식로와 그에 기초한 플루토니움연료재처리는 경제,안전,환경 등의 측면에서 또 핵무기전파위험 등의 견지에서 당초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있다.》고 하면서 일본의 그 계획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였다.(일본 《산께이신붕》 1993년 4월 13일)
또한 미국에네르기,환경문제연구소 소장은 플루토니움이 전력생산에도 핵무기생산에도 리용될수 있기때문에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할 생각이 없다면 핵무기에 관한 모든 기록을 공개해야 할것이라고 경고하였다.(일본 교도통신 1994년 8월 3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1994년에 1961년이래 6번째로 개정한 새 《원자력개발리용장기계획》을 발표하여 플루토니움의 생산과 리용을 계속할것이라는것을 다시금 공공연히 선포하고 현재 그것을 적극 실행하고있다.
이미 고속증식원자로 《몬쥬》의 정상가동을 개시하기 전에 일본정부는 《몬쥬》의 전면적인 운영을 통해 2010년까지 약 100t의 플루토니움을 확보할 목표를 내세웠다.(로씨야신문 《꼼쏘몰스까야 쁘라우다》 1992년 2월 13일)
동시에 일본은 프랑스,영국 등 유럽나라들에 핵페설물을 맡겨 재처리하여 나온 플루토니움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여 저축해오고있다.
벌써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으로부터 10여차례에 걸쳐 재처리하여 나온 1t이상의 플루토니움을 운반해왔다.(영국신문 《옵써버》 1993년 5월 9일)
일본은 1992년 11월부터 1993년 1월초까지 있은 수송선 《아까쯔끼마루》를 통한 프랑스로부터의 플루토니움수송을 계기로 대규모적이고 련속적인 플루토니움수송깜빠니야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2010년까지 약 30t의 플루토니움을 해외로부터 끌어들일것을 계획하고있다 한다.(미국 AP통신 1993년 1월 5일)
이러한 계획을 두고 도꾜에 있는 민간핵정보쎈터 책임자 다까기 진자부로는 국제반핵회의에서 일본이 현세기초에는 미국과 로씨야보다 더 많은 플루토니움을 가지게 된다고 밝혔다.(일본 교도통신 1994년 8월 3일)
중국 《해방군보》(2004년 1월 15일)는 2010년에 가서 일본에는 원자로들에서의 정상적인 소모를 제외하고도 62t의 플루토니움이 남아있게 될것이라고 지적하였다.
1t의 플루토니움으로 나가사끼형원자폭탄 120여개를 만들수 있다고 볼 때 그리고 전력생산에 필요한 량을 훨씬 초과하여 저축된 플루토니움이 기필코 핵무기생산에 돌려질것이라고 볼 때 일본이 저축하고있는 방대한 량의 플루토니움은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를 《핵시한탄》,《핵화약고》인것이다.
2002년 4월 6일 보수우익정객인 일본자유당 당수 오자와가 후꾸오까현에서 있은 한 강연에서 《우리가 핵탄두를 생산하는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 일본의 원자력발전소들에는 수천개의 핵탄두를 제조할수 있는 충분한 량의 플루토니움이 있다.》고 스스로 털어놓은것은 결코 우연하다고 볼수 없다.
일본은 현대적인 핵운반수단들도 끊임없이 개발,완성하여왔다.
1969년에 일본방위청이 작성한 《자주방위계획》은 일본이 독자적인 핵무기와 그것을 운반하는 탄도미싸일을 개발,소유할데 대하여 공식 밝혔다.(일본신문 《아사히이브닝뉴스》 1969년 6월 27일)
이미 1950년대부터 미싸일을 개발하기 시작한 일본은 1972년에 첫 공중대함선 미싸일인 《ASM-1》 개발에 착수하여 1981년에 완성하였고 이어 1987년에 발사시험을 한 지상대함선미싸일인 《SSM-1》을 발전시켜 1990년에 《자위대》에 배비하였다.(중국 《로동자일보》 1999년 8월 26일,27일)
이밖에도 일본은 핵탄두를 발사할수 있는 155㎜곡사포와 203.2㎜곡사포, 핵탄두를 적재할수 있는 《F-15》전투기와 《FSX》폭격기 등 각종 핵탄두운반무장장비들을 갖추어놓았다.
1975년 9월에 자체로 만든 첫 로케트인 《N-1》을 발사한 일본은 1976년에 《N-1》을 《N-2》로, 1981년에 《N-2》를 《H-1》로 바꾸면서 운반로케트의 성능을 련속 갱신하였다.
이에 토대하여 1994년 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의 기간에 종래의 로케트보다 운반능력이 2배나 되며 쉽게 군사용으로 전환될수 있는 국산주력로케트인 《H-2》를 8호기까지 발사한 일본은 계속하여 《H-2》를 개량한 《H-2A》로케트개발에 달라붙었다.
그리하여 2001년 8월 29일부터 2002년 12월 14일까지 《H-2A》는 4호기까지 발사되였다. 국제환경보호단체인 《그린피스》의 반플루토니움깜빠니야 연구책임자는 2002년 6월 25일 일본 도꾜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H-2A》개발기술을 활용하면 다탄두발사장비를 확보하는것이 어렵지 않을것이며 따라서 일본이 언젠가는 군사용으로 전환된 발사체를 분명히 가지게 될것이라고 평하였다.
이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금 일본은 보다 더 야심적인 로케트개발계획을 추진시키고있다. 일본정부와 우주개발사업단의 결정에 따라 현재 신형 《H-2A》로케트개발이 추진중에 있는데 이 로케트는 《H-2A》의 1계단부분을 대형화하고 밑부분에 2개의 기본엔진을 설치하여 최고 4t의 짐을 운반할수 있도록 설계되여있다. 이 로케트의 첫 발사는 2007년에 진행될것으로 예정되여있다 한다.(일본 《니홍게이자이신붕》 2003년 8월 14일)
이처럼 일본은 언제든지 핵무기생산과 사용에 들어갈수 있는 모든 물질기술적준비를 완성하였다.
더우기 문제는 일본이 이러한 《핵검》뿐아니라 《핵방패》까지 보유하려고 책동하고있는 사실이다.
1990년대 중엽부터 《핵방패》로 되는 미싸일방위체계개발에 나설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려오던 일본정부는 1999년에 그 누구의 《미싸일위협》을 코에 걸고 미국과 미싸일방위체계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에 나섰다. 그러면서 그것이 《순수 방위적이며 평화국가로서의 리념에도 맞는것》이라고 미화분식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아사히신붕》(1999년 5월 21일)은 미싸일방위체계가 《방위적인것》이라는것을 강조하면 할수록 반발이 강해지는것이 《핵세계의 현실》이라고 지적하였다.
《핵방패》를 틀어쥐기 위한 일본반동들의 위험한 시도는 현 집권계층하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지난해 12월 19일 일본당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내각회의에서 미싸일방위체계와 관련하여 기만적인 《공동연구》의 간판을 내던지고 본격적인 개발,배비단계에로 넘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현 회계년도 예산에서 미싸일방위체계도입에 1,000억¥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지출되며 2007년부터는 배비가 시작되게 된다 한다.
보는바와 같이 《핵검》과 《핵방패》로 완전무장한 새로운 위험한 핵전쟁세력의 출현은 결코 가상이 아니며 먼 장래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시간문제이다.
일본이 과거 핵재난의 섬으로부터 오늘 핵침략의 섬으로 솟아나는것을 세계는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다.
온갖 비화들로 얼룩진 일본핵문제
비렬한 모략과 음모는 일본반동들의 기질이며 본성이다.
하기에 일본군국주의세력은 핵무장화의 범죄적인 행적마다에 경악과 조소를 자아내는 수많은 비화들을 남겨놓았다.
일본정계와 군부당국이 비밀리에 핵무장과 핵전쟁을 위한 사전연구와 론의를 거듭 벌리고 그 결과를 문서화,정책화해온 사실은 지금에 와서 더는 비밀이 아니다.
일본정부는 1967년부터 1970년에 걸쳐 핵무장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극비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것은 내각정보조사실이 국내의 주요국제정치학자들에게 위탁하여 벌린 《일본의 핵정책에 관한 기초연구》였다. 이와 같은 연구는 1995년에도 벌어졌다. 당시 정부는 방위청의 전문가들에게 랭전종식의 새로운 환경에 대비하여 일본의 핵무장문제를 연구하도록 지시하였다.(일본 《아사히신붕》 2002년 6월 17일)
1969년에 일본외무성은 내부정책론의과정에 《핵무기제조능력을 보유하며 주위의 구속을 받지 않도록 한다》는 기본자세를 정한 비밀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그때로부터 25년만인 1994년 7월 31일에 밝혀져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물의가 일어났으며 당시 외상 고노는 마지못해 그러한 비밀문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일본 《마이니찌신붕》 1994년 8월 1일)
일본군부당국의 핵무장화시도는 더욱 야심적이다.
이미 1955년부터 10여년동안 륙상《자위대》간부학교에서는 구체적인 핵공격을 가상한 도상연습을 중심으로 한 핵전쟁교육이 벌어졌다 한다.(일본 《도꾜신붕》 1993년 3월 21일)
1959년 일본《자위대》의 통합막료회의 사무국이 작성한 《제2차 방위력정비계획에 대한 군사적요청》이라는 문건에는 《…군사적으로 본다면 핵전쟁에 대처할 능력은 물론 방어용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핵무기정도의 사용능력은 보유하여야 한다.》고 서술되여있다.(일본도서 《여기까지 이른 일본의 핵무장》 1975년판)
일본《자위대》가 1963년에 우리 나라를 가상적인 《적》으로 설정하고 미국과 협동작전을 진행할것을 예견한 이른바 《세개화살작전》계획은 《기초연구 제4》라는 조항에서 일본의 핵무기보유를 전제로 하여 핵무기를 어떻게 사용할것인가를 취급하였다.(우와 같은 책)
일본 《마이니찌신붕》(1994년 8월 2일)은 1969년부터 2년반동안 해상막료장으로 있은 우찌다가 막료장시절에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검토하였던 사실을 전하면서 이로써 핵무기에 대해 《제복조가 검토를 추진하고있은 실태가 밝혀졌다.》고 폭로하였다.
사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일본반동들은 이미 50여년전부터 핵무장을 미리 기정사실화해놓고 비밀리에 핵전쟁을 준비하여왔다.
지난 시기 일본에서 거듭 나타난 핵물질은닉사건은 《핵도적》으로서의 일본반동들의 더러운 정체를 폭로하는 또 하나의 핵비화이다.
1993년 1월에 이바라기현의 도까이무라에 있는 플루토니움연료제조공장에서 원자폭탄 1개분의 플루토니움이 장부에서 사라진 사실이 드러나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일본 《마이니찌신붕》 1993년 1월 23일)
그 여파가 가라앉기도 전인 다음해 5월 9일 역시 이 공장에서 원자폭탄 9개분에 해당하는 약 70㎏의 플루토니움을 감추어두고있은 사실이 발각되여 여론의 초점을 모았다. 알려진데 의하면 이 플루토니움은 공장생산선의 굴뚝과 설비들에 부착되여있는 상태로 교묘하게 감추어져있었는데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원들도 매달 사찰을 진행하였다고 하지만 그와 같은 《비밀장소》들에 플루토니움이 숨겨져있은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다.(로씨야 이따르-따쓰통신 1994년 5월 10일)
이와 관련하여 당시 일본신문 《재팬 타임스》는 미국의 민간단체인 핵통제연구소의 비밀보고서에 의해 일본의 플루토니움은닉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국제원자력기구는 핵폭탄에 장약할 비밀핵물질이 일본에 준비되여있었다는것을 끝내 몰랐을것이라고 지적하였으며 일본 《니홍게이자이신붕》은 이미 축적된 플루토니움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빼돌리지 않았는가를 조사할것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글을 실었다.
일본반동들이 이처럼 《핵도적질》도 서슴지 않게 된것은 시급히 핵무기를 손에 걷어쥐려는 욕망이 더는 걷잡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때문이며 그 욕망이 도수를 넘고 분별을 잃었기때문이다.
일본의 핵비화는 일본밖을 벗어나 국제무대들에까지 어지러운 행적을 남겨놓았다.
일본정부는 1960년대 전반기까지는 유엔총회들에서 핵무기사용금지,핵무기철페에 관한 결의안들에 마지못해 찬성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기부터는 반대 또는 기권하는 립장에 섰다.
일본정부는 1967년 유엔총회 제22차회의, 1972년 유엔총회 제27차회의, 1976년 유엔총회 제31차회의, 1977년 유엔총회 제32차회의, 1978년 유엔총회 제33차회의, 1979년 유엔총회 제34차회의, 1980년 유엔총회 제35차회의에서 핵무기금지조약의 검토에 관한 결의안, 핵무기의 영원한 금지에 관한 결의안, 비핵국가들의 안전보장에 관한 결의안, 모든 핵무기의 시험폭발금지에 관한 결의안표결에서 기권하고 핵무기의 배비금지에 관한 결의안과 핵무기사용금지에 관한 결의안표결시에 반대하였다.(일본잡지 《쯔꾸루》 1982년 3월호)
련이어 일본정부는 1982년 유엔총회 제37차회의와 1985년 유엔총회 제40차회의, 1986년 유엔총회 제41차회의, 1987년 유엔총회 제42차회의, 1988년 유엔총회 제43차회의, 1989년 유엔총회 제44차회의, 1990년 유엔총회 제45차회의, 1992년 유엔총회 제47차회의에서 모든 핵무기의 사용금지에 관한 결의안, 핵무기불사용 및 핵전쟁방지에 관한 결의안, 핵무기가 없는 나라들의 령토에 핵무기를 배비하는것을 금지할데 대한 결의안, 핵무기사용 및 사용위협에 대처한 비핵국가들의 안전강화에 관한 결의안, 핵무기동결에 관한 결의안, 핵전쟁방지에 관한 결의안, 남아프리카의 핵능력에 관한 결의안, 이스라엘의 핵무장화에 관한 결의안 등의 표결시에 반대 또는 기권하였다.(《유엔총회 결의집》 1993년판)
일본정부는 반대 또는 기권한 리유로서 《핵무기사용을 일체 금지하는것은 핵억제력과 량립되지 않는다.》, 《핵의 균형을 파괴할수 있다.》는 등의 모호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을 내걸었지만 실지 그 리면에는 앞으로 핵무기를 보유할뿐아니라 사용도 하려는 흉심이 깔려있었다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본의 이와 같은 비렬한 행위는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1994년에 국제사법재판소가 핵전쟁이 국제법위반으로 되는가에 대한 의견을 제출할것을 세계 각국에 요청하였는데 일본정부는 《핵무기사용이 국제법상 반드시 위법이라고 말할수 없다.》는 내용의 의견진술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즉시 국내외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되자 일본정부는 하는수없이 해당한 부분을 삭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일본 《아사히신붕》 1994년 6월 7일)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에 대해 응당 반성할 대신 《핵무기사용은 국제법위반이라고 말할수 없다.》는 립장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으며 결과 그 다음해인 1995년 11월 7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있은 한 회의에서 그전과 꼭같은 비화를 남겨놓았다.
회의에서 한 발언에서 일본외무성 군비관리과학심의관 가와무라 다께가즈는 핵무기사용이 국제법에 위반된다는 견해를 명백히 밝히는것을 피하고 《인간의 정신에 배치된다》는 애매한 표현을 썼다. 더우기 그 회의에서 원자폭탄피해를 입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시장들이 핵전쟁은 국제법에 위반된다고 강력히 단죄한데 대해 일본외무성 대변인은 국제사법재판소가 이 시장들의 견해를 일본정부의 견해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추악한 청탁까지 하였다 한다.(일본 교도통신 1995년 11월 7일)
실로 일본반동들은 핵무장화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렬한 행위와 모략도 가리지 않아왔기에 일본핵문제는 온갖 더러운 비화들로 얼룩질수밖에 없다.
일본의 핵야망은 뿌리채 들어내야 할 악성종양
위험계선에 이른 일본핵문제의 엄중성을 더욱 똑똑히 알려면 그 밑뿌리부터 파헤쳐보아야 할것이다.
핵무기를 휘둘러 《대동아공영권》의 옛 꿈을 기어이 실현해보려는 일본군국주의세력의 무분별한 야망은 결코 어제오늘에 뿌리내린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과거 일제의 모험적인 핵무기보유시도에 뿌리를 두고 년대와 세기를 이어왔다.
지금으로부터 61년전인 1943년 봄 당시 일제의 침략전쟁의 최고집행자였던 도죠는 비밀리에 원자탄을 만들데 대한 명령을 군부에 떨구었다. 그는 공군본부 총무과장 가와시마 도라노스께를 호출하여 자기는 이미 핵폭탄의 위력을 잘 알고있다고 하면서 핵폭탄개발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것이라고 력설하였다.(일본 지지통신 1995년 7월 20일)
이에 따라 구일본륙군 항공본부에서는 니시나박사가 주도하는 그루빠가, 해군에서는 아라가쯔교수를 책임자로 한 그루빠가 핵폭탄개발을 위한 연구를 필사적으로 추진하였으며 1944년말부터 1945년초에 걸쳐 중국 상해의 암시장에서 130㎏의 우라니움을 구입하여 핵무기생산에 필요한 물질적준비를 갖추는데까지 이르렀다.(일본 《도꾜신붕》 1996년 12월 2일)
그러나 일제의 핵무기보유야심은 연구에서의 거듭되는 실패와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패망으로 하여 물거품으로 되고말았으며 대신 일본은 원자탄피해를 입은 첫 나라로 되였다.
만약 그 위험천만한 야심이 실현되였더라면 기필코 일본은 세계최악의 핵범죄국으로 되였을것이다.
패망세대의 핵야심은 전후 복수주의에 들뜬 군국주의세력에 의해 되살아났다.
패망이후 일본의 력대 집권계층은 어느 한시도 핵야망을 버린적이 없었으며 이로부터 그들의 입에서는 핵무기보유를 합법화,정책화하기 위한 망발들이 끊임없이 튀여나왔다.
1957년 5월 7일 일본총리 기시는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핵무기라는 이름만 붙으면 모두가 헌법위반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헌법해석은 옳지 않다.…금후의 발전을 보지 않고 핵무기라는 이름만 붙으면 어떤것도 안된다고 일률적으로 말할수 없다.》고 하였다.(일본도서 《여기까지 이른 일본의 핵무장》 1975년판)
총리자리에서 밀려난 이후인 1968년 3월 14일에도 그는 중부경제단체련합회에서 《현실적으로 가까운 장래에 핵무기가 없어질 가능성이 없고 앞으로 지금의 상용무기가 지난 날의 대나무창과 같은 존재》로 될것이 예견되는 실정에서 《우리 나라가 핵무장을 하는것은 당연하다.》고 제창하였다.(우와 같은 도서)
1967년 12월 국회에서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않으며 끌어들이지도 않는다는 《비핵3원칙》을 내놓아 후에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일본총리 사또는 사실상 《비핵평화》의 가면을 쓴 핵광신자였다.
《비핵3원칙》을 내놓기전인 1964년에 그는 주일미국대사 라이샤워를 만나 일본의 핵무장가능성에 언급하면서 《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있는것보다 값이 눅으며 일본의 과학,산업기술로 충분히 생산할수 있다는것을 알았다.》고 하였으며 1965년 1월 미국대통령 죤슨과의 회담에서는《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일본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고집해나섰다.
그는 《비핵3원칙》을 내놓은 후인 1969년 6월 2일 국회 중의원 본회의에서 《<비핵3원칙>이라는것은 정책이 변하거나 내각이 바뀌거나 하면 언제나 변경될수 있다.》고 거리낌없이 말하였다.(일본도서 《여기까지 이른 일본의 핵무장》 1975년판)
결국 사또의 《비핵3원칙》이란 뒤집어놓은 핵무장화구호였고 핵야망을 가리우기 위한 허울이였다.
지어 일본총리 후꾸다는 1978년 3월 8일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라의 무장력을 핵무기로 장비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할수 있다.》고 로골적으로 떠들어댔다.
1980년대에 총리를 하면서 나라에 군국주의부활바람을 일구는데 앞장서온 나까소네는 총리로 있을 때인 1984년 3월 15일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공명당소속 국회의원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방위를 위해서라면 원자력도 가질수 있다.》(일본 《아사히신붕》 1984년 3월 16일)고 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1971년에 방위청 장관으로 있을 당시에는 제4차 《방위력정비계획》을 발표하면서 《일본헌법은 방어용핵무기를 금지하고있지 않다.》고 력설하였다.(일본 지지통신 1971년 7월 8일)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올해 1월 7일에 그는 일본주재 외국특파기자들앞에서 한 강연에서 《<전수방위>의 핵무기보유는 헌법에 부합된다.》(일본 《니홍게이자이신붕》 2004년 1월 8일)는 망발을 또다시 늘어놓음으로써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일본군국주의세력의 핵광증을 여지없이 드러내놓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집권계층은 핵보유야망을 더욱 로골화하였다.
일본총리 미야자와는 총리취임전에 평론가 다와라 쇼이찌로와의 회견에서 《…일본에 있어서 핵무장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며 재정적으로도 그리 힘든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일본잡지 《쥬오고롱》 1991년 9월호)
1994년 6월 17일 일본총리 하따는 기자회견에서 《확실히 일본은 핵무기를 보유할 능력이 있다.》고 명백히 밝혔다.(일본 《니홍게이자이신붕》 1994년 6월 18일)
이와 같이 일본집권계층의 핵망발력사는 기괴한 련속성과 주기성으로 특징지어지고있으며 이것을 통해서도 일본의 핵야망은 실로 집요하며 일본핵문제는 그야말로 뿌리깊은것이라는것을 다시금 똑똑히 알수 있다.
력사적으로 내려온 뿌리깊은 일본의 핵야망은 현 집권계층하에서 극도로 엄중해져 기만적인 《비핵타령》이 공공연히 《핵무기타령》으로 바뀌여지고 핵무장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운운하는 반동적인 《핵무장론》이 사회여론을 지배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지난 2002년 5월에 현 일본정부의 고위당국자들이 핵무장화를 극구 제창하는 여론깜빠니야를 벌린것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5월 31일 내각관방장관 후꾸다는 기자회견에서 핵무기보유에 언급하여 《<전수방위>라면 가질수 있다. 가져서는 안된다는 리유는 없다.》고 뻐젓이 주장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5월 13일 현재 자민당 간사장이며 당시 내각관방부장관이였던 아베는 비공개강연에서 《소형이라면 원자탄의 보유도 문제가 없다.》고 력설하였다.
이처럼 핵무기보유를 문제로 삼지 않는다는것자체에 오늘날 일본핵문제의 위험성이 있다.
더우기 문제는 극우익보수집단인 현 집권계층이 일으키는 군국주의부활바람을 타고 각계의 우익보수세력이 핵대국화야망실현을 위한 분위기조성에 총 집중하고있는것이다.
지난해 8월에 국회의원 니시무라는 한 텔레비죤방송과의 회견에서 《이제는 국민이 각성되여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있는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일본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있다.》고 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오도해나섰으며 일본 교린대학 교수 다꾸보는 《지금부터 일본은 핵무기보유에로 나갈수도 있다는 주장을 해야 한다. 한 나라가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한다는것은 권투경기에 참가하여 옆으로 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것과 같다.》는 망발을 늘어놓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 극우익잡지 《쇼꿍》은 핵무장문제를 거론한 40여명의 작가들의 론평들을 실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 잡지 주필 호소이는 《만일 사람들이 몇년전에 그러한 견해를 표명하였더라면 이상한 사람들로 락인되였을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핵문제를 리성적으로 론의할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있다.》고 내놓고 말하였다.(미국 AP통신 2003년 8월)
이보다 앞서 지난해 5월 극우익보수파인 게이오대학교수 후꾸다는 한 시사월간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동안 일본에 족쇄를 채웠던 <핵무장불가능론>은 이제는 상당히 낡아졌다.》고 하면서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핵무장을 고려할 때》이라고 떠들어댔다. 이에 대해 전하면서 남조선 《경향신문》(2003년 5월 31일)은 《실제로 총보수화바람에 휩싸여있는 일본국내에서 <핵무장불가능론>은 많이 후퇴하였다. 원자폭탄피해국으로서의 일본의 핵알레르기아는 두번 다시 비참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론리로 둔갑하고있다.》고 평하였다.
보는바와 같이 과거 일제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오랜 세월 핵무기를 틀어쥐고 침략과 전쟁의 길로 내달리려는 일본사무라이후예들의 흉악한 속심은 순간도 변함이 없었다.
실로 일본의 핵야망은 지체하지 말고 그 뿌리까지 송두리채 들어내야 할 악성종양이다.
그것을 남겨놓고서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이 있을수 없고 핵위협이 없는 21세기가 있을수 없다.
※ ※ ※
세계적으로 심각하고 엄중한 핵문제를 가지고있는 일본이 우리의 《핵문제》를 계속 입에 올리는것은 언어도단이며 가소롭기 그지없는 망동이다.
일본은 남의 《핵문제》를 과장하여 떠드는것으로 자기 핵문제의 진상을 가리우고 그 막뒤에서 핵무장화야망을 이루어보려고 생각하고있지만 그것은 오산이며 망상이다.
남잡이가 제잡이라고 일본이 《핵문제》를 걸고 우리에 대한 압력소동에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력사의 심판대우에 오른 일본의 핵죄과는 더욱더 커질것이다.
일본은 핵무장화의 길이 자멸의 길이라는것을 똑똑히 알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주체93(2004)년 5월 8일
평양(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