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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지난 조선침략전쟁준비를 발광적으로 다그쳐온 미제의 정체》
(평양 6월 24일발 조선중앙통신)24일부 《로동신문》은 《지난 조선침략전쟁준비를 발광적으로 다그쳐온 미제의 정체》라는 제목으로 된 개인필명의 글을 실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오래동안 세밀히 작성한 계획에 따라 리승만매국역도를 사촉하여 동족상쟁의 내란을 도발하고 우리 조국과 우리 인민을 반대하여 직접 무력간섭을 개시한 그 침략행동을 무엇으로써도 변명하지 못할것입니다.》

미제는 제2차세계대전후 세계제패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책동을 적극 다그쳤다. 그 중요고리로 조선전쟁도발준비에 달라붙었다.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1946년 12월 16일 맥아더를 미극동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전 미태평양군무력의 대부분으로 극동군을 편성한후 조선전쟁을 포함한 극동침략계획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완성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맥아더사령부에는 《G-3》,《G-2》라고 하는 조선전쟁도발을 위한 작전계획과 첩보공작을 연구하는 집단이 무어졌으며 맥아더에 의하여 이전 일본군장성들과 고급장교들로 조직된 《력사반》과 《KATO》기관이 그에 인입리용되였다.

미제는 이 집단을 통하여 극동침략계획(A,B,C계획)을 연구완성하였다. 이 계획은 1950년 1월에 미합동참모본부에서 최종적으로 토의비준되여 맥아더사령부와 남조선군부에 하달되였다.

미제는 극동침략계획 《A》에 준하여 1949년초에 구체적인 《북벌》군사전략계획을 작성하였다.

이 계획은 미합동참모본부에서 여러차례 검토되였다.

미제의 《북벌》군사전략계획은 인민군대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서울을 해방하였을 때 륙군본부에서 압수한 작전계획도에 명백히 반영되여있었다. 이 계획도에는 적들이 38°선에서의 정면돌파와 배합하여 조선서해안의 한천(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과 조선동해안의 하남리(함경남도 정평군)의 동서량해안으로 상륙하여 공화국북반부의 허리를 자르고 일거에 평양과 원산을 점령한 다음 압록강,두만강계선으로 공격성과를 확대할 기도가 반영되여있었다. 이 계획도에서 미제는 《북벌》을 위한 모든 지상작전과 해상작전을 미해공군의 지원밑에 수행할것을 예견하였었다.

적들은 1949년 7∼8월에 《북벌》군사전략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38°선에서 무장도발을 부단히 일으켰다. 그것은 38°선에서의 무장도발이 성공하는 경우 그것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북침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적들의 무장도발은 공화국경비대의 강력한 자위적반격에 의하여 실패를 면치 못하였다.

남조선군의 실력으로는 《북벌》을 실현할수 없다는 남조선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의 보고를 받은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맥아더에게 조선전쟁도발계획을 검토하고 대책을 세울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로버트,남조선군부우두머리들,전 일본군참모성원들을 망라하여 1949년말부터 1950년초에 걸쳐 조선전쟁도발계획을 수정하였다.

미제는 이 계획에서 초기《북벌》군사전략계획에 예견되여있던 동서량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을 그만두고 38°선돌파작전으로 침략전쟁을 개시하기로 확정하였다.

미제는 이 계획에 군사작전을 정치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한 미국무성의 외교적모략과 첩보공작계획에 대한 내용도 반영하였다. 그것은 저들의 북침을 우리의 《남침》으로 거꾸로 외곡선전하는 동시에 유엔의 간판밑에 미군과 추종국가무력을 조선전선에 합법적으로 투입하여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정탐,파괴암해작전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는것이였다. 이러한 내용을 담아 작성된 조선전쟁도발계획이 1950년 1월 미합동참모본부를 거쳐 미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토의비준되였다.

한편 미제는 조선전쟁도발을 앞두고 세계제패전략을 반영한 극비문건인 《NSC-68》계획을 작성하였다. 1950년 4월 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이 문건에는 조선전쟁을 도발한후 미군과 추종국가군대를 투입할데 대한 문제가 제기되여있었다.

미제는 《북벌》군사전략계획을 원만히 수행할 타산밑에 남조선군을 조직확대하기 위한 책동을 본격적으로 벌렸다.

그리하여 전쟁도발직전까지 남조선군현역은 륙군 9만 3,000명, 공군 3,000명, 해군 1만 5,000명으로 확보되게 되였다.

리승만역도는 방대한 예비병력을 확보할데 대한 미제의 지시에 따라 20만명의 청년들을 긁어모아 국방장관이 직접 거느리는 반군사조직인 《청년방위대》를 편성하였고 중학교이상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주어 전쟁에 동원리용할 목적으로 《학도호국단》까지 조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한 서방출판물은 미제의 전쟁도발계획에 따라 우익청년단으로서 군사훈련을 받은 남조선청년들의 수는 125만명에 달하였으며 그 목적은 북조선의 인민군무력에 대한 《10 대 1의 우위》를 보장하는데 있다고 폭로하였다.

이밖에도 전시에 전투인원으로 리용하기 위하여 1949년말까지 확보한 경찰 5만여명가운데서 20여개의 전투경찰대대들은 중무장까지 장비시켰으며 전쟁도발이전에 38°선경비대에 대한 공격과 유격대《토벌》에 참가한 경찰 2만명도 임의의 시각에 군사작전에 동원할수 있게 준비시켜놓았다.

남조선군에 대한 통수권을 장악하는것을 전쟁준비의 중요한 고리로 내세운 미제는 남조선군초창기에 부대장직에 미군장교들을 임명하고 군대의 모집과 편성,교육,훈련을 직접 틀어쥐고 하였으며 교육과 훈련도 미국식으로 주었다.

미제는 1948년 8월 25일 리승만매국역도와 공모하여 《과도기간 잠정적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였고 군대에 대한 지휘권과 남조선군사기지 및 군사시설관할권을 장악하였다.

미제는 조선전쟁에서 주력으로 될 미군무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1948년 6월에 미국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평화시기 징병법을 조작하고 군사예산을 대폭 늘이였다.

미제는 방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여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였다.

미제는 조선전쟁에 일본의 군사력을 동원리용하기 위한 준비도 적극 다그쳤다. 미제는 이전 일본군대의 잠재력량을 《어민협회》,《토지개발대》,《합작농장》 등의 간판밑에 비밀리에 보존하였으며 1948년 3월 《신경찰기구에 관한 법령》을 조작하고 12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를 편성하였으며 그해 5월에 이르러서는 해상보안대,철도경비대,항공보안대를 조직편성하고 미국식으로 무장,훈련시켰다.

조선전쟁에 이전 일본군을 참가시키려는 미제의 계획에 따라 전쟁도발이전부터 일본주둔 미8군관하부대들에 10여만명의 일본인들이 고용되였다.

미제는 《북벌》군사전략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남조선군의 배비변경을 실시하였으며 기본주력을 38°선연선에 집중배치하였다.

미제의 직접적인 지휘밑에 남조선군부는 《수도》,1,7,6,8보병사단무력을 서부의 옹진으로부터 동부의 강릉에 이르는 38°선에 전개하였으며 이미부터 작전예비대로 장악하고있던 2,3,5보병사단들을 대전,대구,광주지역으로부터 서울지역으로 진출시켜 개성,의정부방향으로 기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미국도서 《조선전쟁의 력사》는 1950년 6월 18일 덜레스가 38°선을 시찰했을 때 《리승만군의 거의 대부분은 벌써 실제적으로 38°선을 따라 배치되여있었다》고 폭로하였었다.

미제는 남조선군의 공격출발진지와 미해공군의 전투전개를 보장하기 위한 군사기지들을 준비하였다.

미제는 남조선을 강점하기 바쁘게 38°선에 진지들을 구축하고 군용도로,비행장,군항건설을 다그쳤다.

미제는 남조선군을 미국제무장으로 장비시키기 위하여 리승만역도에게 거액의 《군사원조》를 제공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전투기술기재,함선,비행기들을 대대적으로 공급하였다.

미제는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고 여기에 미군과 추종국가무력을 투입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미리 만들어놓는것을 전쟁준비의 주요고리의 하나로 내세웠다.

그것은 남조선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가 1950년 1월에 남조선당국자들에게 훈시하면서 《북벌계획은 결정된 문제이다. 이것을 실현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침공을 개시한다 할지라도 <정당한 리유>를 가지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뇌까린데서 명백히 드러났다.

1950년 1월 26일 남조선과 《호상방위원조협정》과 남조선주둔 《미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미제는 추종국가들과의 쌍무적군사협정체결도 다그쳤다.

미제는 조선전쟁시 유엔의 간판밑에 미군과 추종국가군대들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시켰다. 유엔담당 미국무차관보 죤 디.히카슨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무성에서는 《북조선의 침략》을 날조하기 위한 유엔결의초안을 전쟁전에 작성해놓았으며 《북조선의 침략》에 대한 보고를 제출할 제3자로서 《유엔조선위원단》을 지목해놓고 그들이 미제가 꾸며낸 모략의 요구대로 동작할수 있도록 필요한 조건도 마련해주었다.

미제의 조선전쟁도발준비에서 특징적인것은 38°선분계선에서 《작은 전쟁》이라고 볼수 있는 38°선무장도발을 끊임없이 벌리는 속에서 전쟁준비를 전면적으로 진행한것이다.

적들은 38°선무장도발을 《내전을 위한 좋은 시험대》로, 《적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실전능력을 높이는 연습》으로 삼았으며 《북벌》군사전략계획을 실현하는데 유리한 공격출발위치를 마련하는 계기로 리용하였다. 적들의 38°선무장도발의 주요목적은 북침전쟁을 도발한 다음에 그 책임을 우리 공화국에 넘겨씌울수 있는 구실을 미리 만들어놓자는데 있었다.

이로부터 미제와 남조선군부는 1947년부터 전쟁도발직전까지 연 8만 3,800여명의 무장인원을 동원하여 5,150여차에 걸치는 무장도발행위를 감행하였던것이다.

미제와 리승만역도는 전쟁도발날자가 다가옴에 따라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정탐,파괴암해작전을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적들은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정탐,파괴암해작전을 위하여 38°선과 동서량해안뿐아니라 중국동북지역에 둥지를 틀고있던 미중앙정보국의 지부를 통하여 수많은 간첩,파괴암해분자들을 공화국북반부에 침투시켜 북침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보려고 책동하였다. 특히 적들은 군사비밀을 탐지하는데 주력하였는데 38°선 이북지역의 경비 및 방어상태와 북침공격때 주타격방향으로 정해놓은 금천,사리원,평양,안주일대와 원산항을 비롯한 동서해안의 중요항구들에 대한 정탐행위를 발광적으로 감행하였다.

우리 공화국에 대한 정탐자료들은 서울에 있던 《조선련락사무소》에 집결되고 그를 통해 맥아더사령부 정보국을 거쳐 워싱톤에 보고되였다. 그 건수는 매달 100통에 달하였다.

미제는 1950년초에 조선전쟁도발계획이 완성되자 곧 일본군국주의자들과 리승만매국일당을 결탁시키기 위한 범죄적책동을 벌리였다. 맥아더는 1950년 2월중순에 리승만역도를 도꾜에 불러들여 조선전쟁도발과 관련한 11개 조항의 특별지시를 주었다. 맥아더의 지시에는 남조선군의 모든 무력은 그의 지휘밑에 둔다는것, 리승만은 전쟁방화자의 역을 담당해야 한다는것, 남조선군과 일본군이 협동하여 《북벌》을 진행해야 한다는것, 남조선군은 이전 일본군대에서 채용된 장교들한테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것 등이 지적되여있었다.

이렇듯 미제와 리승만도배들은 침략전쟁준비를 빈틈없이 갖춘데 토대하여 1950년 6월 25일 불의의 북침공격으로 조선침략전쟁을 도발하였던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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