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조국의 미래를 키우는 교원혁명가의 숭고한 인생관
벽동군 송련중학교 창주분교 교원 김경수동무
(평양 10월 11일발 조선중앙통신)《로동신문》은 《선군시대 숨은 영웅, 숨은 공로자 전형들의 모범을 따라배우자》라는 고정표제밑에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내세워주신 선군시대 4명의 숨은 영웅, 숨은 공로자들을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11일에 실린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아래 첫 동네로 불리우는 벽동땅에서도 송련리 창주마을은 제일 궁벽한 산골에 있다. 읍의 나루에서 배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수풍쪽으로 1시간나마 가느라면 규모있게 돌제방을 두른 언덕우에 과일나무들과 수림에 둘러싸인 아담한 건물이 한폭의 그림처럼 안겨오는데 그 단층건물이 바로 송련중학교 창주분교이다.
창주마을의 21명의 소학교학생들의 배움터인 분교에는 교편물들과 실험실습기재,교육용 록화설비가 그쯔히 갖추어져있고 학교뒤에는 각종 체육기재가 주런이 세워진 넓은 운동장이 펼쳐져있으며 운동장과 잇닿은 강변쪽에는 눈길닿는곳마다 수학공식과 상식자료들을 패쪽에 써붙인 소나무 우거진 야외학습터가 꾸려져있다. 그런가 하면 학교주변과 운동장둘레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우거져 수림과 공원을 이루고 산기슭의 과수원과 도처에 심어진 수백그루의 과일나무들에서는 철따라 과일들이 주렁져 익고있다.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놀라움과 경탄을 금치 못하는 이 모든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진것이 아니다.
분교가 오늘처럼 손색없이 꾸려지고 교육조건과 환경이 훌륭히 마련되기까지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령도업적이 깃들어있는 창주땅의 아이들모두를 나라의 역군으로 훌륭히 키워낼 한마음안고 27살의 청춘시절에 갓 결혼한 안해와 함께 이곳에 자진하여 와 20년간 순결한 량심과 헌신의 땀을 바쳐온 한 교원의 성실한 노력이 깃들어있다.
그 교원이 바로 김경수동무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 이름없는 교원이 가슴속에 안고사는 티없이 깨끗한 충성의 마음과 선군조국의 미래를 키우기 위하여 소문없이 바치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노력을 깊이 헤아리시여 김경수동무를 선군시대 숨은 영웅,숨은 공로자의 전형의 한사람으로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숨은 혁명가》,이 부름앞에 자신을 떳떳이 세우자
선천교원대학을 졸업한 김경수동무가 벽동군 마전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던 주체71(1982)년 어느날 저녁이였다. 여느때없이 얼굴색이 어두워 집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고 묻는 경수동무에게 《오늘 군당책임일군이 학교에 들렸댔는데 분교들사업이 잘 안된다고 무척 속을 썩이더구나.》하고 말하는것이였다.
경수동무의 아버지는 환갑이 지난 나이였지만 그때까지 송련중학교에서 교편을 놓지 않고있었다. 수십년을 중학교의 평범한 교원으로 일하면서 일군들 못지 않게 교육사업을 두고 마음을 쓰는 성실하고 책임성이 높은 아버지였다.
군당책임일군이 걱정하여 말한 분교들의 실태에 대하여 경수동무도 어느정도 알고있었다. 군안의 분교들이 읍에서 수십리 떨어진 궁벽한 산골들에 있다나니 누구도 선뜻 그곳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들에서는 처녀교원들로 조를 무어 보름에 한번씩 교대제로 분교에 내보내군 하는 형편이였다.
아버지의 걱정하는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았던 경수동무는 어느날 시간을 내여 송련리 창주땅을 찾았다.
그곳의 분교에서 경수동무가 받은 충격은 컸다. 단층인 분교건물이 세워진지 오래된데다가 주변이 강물에 패워 들쑹날쑹하고 사방 허리굽은 소나무 몇대밖에 없어서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 절반이 빈 교실에 들려 왜 출석률이 이렇게 낮은가고 물으니 교대해온지 며칠 안된다는 처녀교원은 우리인들 어떻게 하겠는가고 하였고 마을을 돌며 학부형들을 만나 왜 아이들을 분교에 잘 보내지 않는가고 묻자 그들은 애들이 분교에 재미를 못붙여 그런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경수동무와 동행한 부락당비서는 사실이 그렇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분교에 주인이 없수다. 분교일이 제대로 되자면 누구든지 이곳에 와서 뿌리를 내려야 할텐데 그런 사람이 없으니…》
분교로 돌아온 김경수동무는 강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교원인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후대교육사업을 얼마나 중히 여기시며 이 땅에 가장 우월한 교육제도를 마련해주시기 위하여 얼마나 큰 로고를 바쳐오셨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외진 산골의 몇명 안되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창주분교도 그 은정속에 세워진 학교였다. 그런데 군에 수많은 교원들이 있으면서 분교를 이런 형편에 이르게 했으니 어버이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가슴아파하실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과연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자신도 당에서 품들여 키워 교단에 세워준 교원의 한사람이 아닌가.
자책감에 휩싸인 그는 방금전에 《누구든지 이곳에 와서 뿌리를 내려야 할텐데 그런 사람이 없으니…》라고 하던 부락당비서의 말이 아프게 귀전에 되살아 울리는것이였다.
그해 가을 경수동무는 교원인 김정옥동무와 가정을 이루었다. 부부교원으로 창주분교에 진출할 생각에서였다. 그의 이 생각이 결심으로 확고히 굳어지게 된것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전국교육일군열성자회의 참가자들에게 보내주신 서한을 받아안고서였다.
서한의 자자구구를 새길수록 교원들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믿음과 기대가 심장에 뜨겁게 파고들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교원들은 조국의 미래인 후대들을 키워내기 위하여 남모르는 노력을 기울이고있는 숨은 노력가,숨은 혁명가들입니다.》
숨은 혁명가,그 부름을 외워보는 경수동무는 숭고한 격정으로 눈굽이 젖어들었다.
혁명가란 혁명을 위하여,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희생도 각오하고 나서서 한몸 바쳐 투쟁하는 그런 사람들만이 지니게 되는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이름이였다.
하다면 어찌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우리 교원들을 그처럼 고귀한 이름으로 불러주시였겠는가. 그것은 바로 교육사업을 나라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혁명사업으로 여기시는 숭고한 믿음이고 교육자들이 당의 교육정책을 결사관철하는 투사가 되기를 바라시는 크나큰 기대가 아니겠는가. 당의 참된 교육일군이라면 마땅히 경애하는 장군님의 하늘같은 믿음과 기대대로 자신을 숨은 혁명가라는 성스러운 이름앞에 언제나 떳떳이 세울수 있게 일해야 한다.
경수동무는 그날 저녁 집에 들어오자 안해와 마주앉았다.
《우리 창주땅으로 갑시다. 그래서 그곳의 아이들을 나라의 역군으로 훌륭하게 키웁시다.》
그의 말에 정옥동무는 선뜻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부부교원으로 분교에 나간다는것은 그곳에 영원히 뿌리를 내리고 한생을 산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 한생이란 또 얼마나 많은 노력과 땀을 바쳐야 하는 한생이 되여야 할것인가. 그런데 그들의 나이는 애젊은 20대였던것이다.
안해의 주저하는 심정을 헤아린 경수동무는 절절한 어조로 말하였다.
《창주땅이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업적이 깃든 영광의 고장이라는것을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우리가 그곳에 가서 분교를 잘 꾸리고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면 그것이 교육사업을 령도하시면서 이룩하신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의 업적을 빛내이는것으로 되지 않겠소. 나는 그렇게 하는것이 교원으로서 우리의 본분이고 또 장군님께서 혁명가라고 불러주신 크나큰 믿음과 기대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오.》
경수동무의 절절한 말은 정옥동무의 심금을 뜨겁게 울려주었다.
이렇게 되여 그들은 결혼한지 두해만인 주체73(1984)년 8월에 송련중학교 창주분교로 자진하여 나갔다. 분교에 부부교원이 왔다고 온 마을이 떠들썩하며 떨쳐나 맞아주던 그날로부터 이들부부는 분교학생들을 위하여 참으로 모든것을 바쳐왔다.
강기슭을 규모있게 정리하고 운동장을 넓히는 아름찬 일을 이들은 학생들의 수업을 보장하면서 하였다. 그러자니 늘 모자라는것이 시간이였다. 그래서 경수동무는 아침에 신발끈을 조이고 나서면 저녁늦게까지 풀지 못하였다. 밤이면 이들은 달빛을 등불삼아 일하였다.
정옥동무가 하루가 멀다하게 판이 나는 남편의 장갑을 눈물을 삼키며 덧기운적이 얼마인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일이 있어 분교에 들렸던 작업반의 한 농장원이 온통 터갈라지고 상처투성이인 경수동무의 손을 어루만지며 선생의 손이 땅을 다루는 우리 손보다 더 험하다고 목메여 하였겠는가.
언제인가 한 사람이 밤늦게까지 강바닥의 흙을 파서 져나르는 경수동무를 보고 누가 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까지 밤새워가며 일하는가고 말을 건늰적이 있었다. 그때 경수동무는 흔연히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곳이 외진 산골이지만 다 내 조국땅이 아닙니까. 조국땅을 가꾸는 일을 누가 본다고 하고 안본다고 안하겠습니까?》
그렇다. 창주땅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혈전만리,눈보라 수십만리길을 헤치시며 찾아주시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정력적인 령도로 빛내여가시는 귀중한 조국의 한부분이였다. 조국과 인민을 더없이 사랑하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외진 이곳까지 찾아주시였으며 또 래일이라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현지지도의 길에 소문없이 들리실수도 있는것이였다. 그런데 그때에 미처 꾸리지 못한 분교를 보여드리게 된다면…
경수동무에게는 순간도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마음이 조급했고 아무리 일해도 성차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그는 인민군군인들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군대를 온 사회가 따라배워야 할 모범으로 내세워주시였는데 비록 외진 산골의 교단에 선 교원이지만 그 모범을 본받아 살며 투쟁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불같은 마음을 안고 남모르게 헌신의 땀을 바쳐오는 나날에 눈물겨운 사연인들 또 얼마나 많았으랴.
어느 해 가을에 정옥동무는 남편과 같이 시간을 아껴가며 돌제방을 쌓느라 소금에 절구어둔 김장배추를 한주일이 넘도록 씻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한입두입 옮겨져 읍에 사는 정옥동무 어머니의 귀에 《딸이 좀 모자라지 않는가.》하는 말로 전해지게 되였다. 분을 참지 못하여 그날로 창주땅으로 달려간 정옥동무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포단채로 철봉대옆에 놓고 땀투성이가 되여 일하는 사위와 딸을 보고 《이 사람들아,그렇게 일하는걸 누가 알아나 준다구 이 고생인가.》하고는 억이 막혀 더 말을 못하였다.
이렇게 경수동무는 안해와 함께 20년간 소문없이 성실한 땀을 바쳐 분교를 꾸리였다. 그 나날에 그는 돌을 날라다 수백m의 제방을 쌓고 운동장을 시원하게 넓히였으며 야외학습터를 특색있게 꾸리였다. 뿐만아니라 자체로 목재와 세멘트를 얻어다 분교건물도 새롭게 건설하고 수종이 좋은 수백그루의 나무들로 그 주변을 수림화,공원화하였으며 과수원을 내놓고도 수백그루의 과일나무들을 심어 가꾸었다.
그들이 해놓은 일을 두고 오늘 사람들은 생각한다.
숨은 혁명가라는 고귀한 이름앞에 언제나 자신을 떳떳이 세울 숭고한 자각을 안고 혁명적군인정신을 높이 발휘하여나갈 때 우리 교원들이 교단을 얼마나 책임적으로 지켜갈수 있으며 인생을 보람있게 빛내일수 있는가를.
억센 싹을 키우는 밑거름
경수동무와 정옥동무에게 있어서 한해중 제일 마음쓰게 되는 날은 개학날이다.
분교의 신입생이라야 보통 대여섯명정도였다. 어떤 때에는 두 교원이 신입생 한명의 손목을 하나씩 갈라잡고 교문에 들어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신입생이 몇명인가 하는것이 문제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한명일지라도 훌륭히 자라서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령도를 충성으로 받들어갈 조국의 귀중한 미래였기때문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수십,수백명의 신입생들을 맞이하는 심정에서 꽃대문을 세우고 분교의 안팎을 쓸고 닦았으며 신입생의 앞가슴에 달아줄 꽃송이와 꽃다발도 정성껏 만들었다.
밝은 해빛이 한껏 넘치는 개학날아침 어깨에 멘 책가방을 달싹이며 분교에 들어서는 신입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김경수동무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활짝 열린 사회주의의무교육의 꽃대문이 우리 어린이들을 어서 오라 부르는 뜻깊은 개학날,바로 이날부터 선군조국의 미래를 맡아 키우는 교육자의 한해가 시작되는것이 아닌가고.
경수동무가 지닌 교육사업에 대한 숭고한 자각과 높은 책임감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10여년전 어느날 경수동무가 4학년학생들의 오후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아래학년 학생들이 와르르 달려오면서 이렇게 소리치는것이였다.
《선생님,싹이 나왔습니다.》
학생들을 이끌고 달려가보니 정말 분교주변에 심은 여러종의 과일나무씨앗들에서 고운 싹이 뾰족뾰족 움터나와있었다.
두터운 땅이불을 들치고 씩씩하게 솟구친 어린 싹들을 바라보는 김경수동무의 눈굽은 뜨겁게 젖어들었다. 뒤미처 달려온 정옥동무도 포실하게 자란 애기싹을 어루만지며 가슴을 들먹이였다.
《척박한 땅이라도 밑거름을 듬뿍 주었더니 이렇게 훌륭한 싹이 나왔구만. 우리도 학생들을 당과 수령께 충직한 충신의 싹,애국자의 싹,나라를 떠받드는 기둥감의 억센 싹으로 키우는 진한 밑거름이 됩시다.》
실한 줄기와 푸르른 잎새,풍만한 열매는 다름아닌 튼튼한 싹에서 시작되는것이다. 그 억센 싹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여 한생을 묵묵히 바치려는것이 경수동무가 가슴에 안고사는 숭고한 자각이고 확고한 결심이였다.
그는 학생들이 분교를 꾸리고 학습장을 정리하며 노래 한곡을 불러도 경애하는 장군님을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면서 충성의 마음을 키워가도록 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는 매일 학생들의 학습장을 10번이상 검열하는것을 철칙으로 삼고 학생들이 글씨도 곱게 쓰고 학습도 잘해나가도록 이끌었다. 학습장정리를 되는대로 하고 공부를 잘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차근차근 타일렀다.
《아버지장군님께서 문득 우리 분교에 들리시여 너의 학습장을 보아주신다고 생각해보아라. 그러면 아버지장군님께서 기뻐하실것 같으냐 아니면 걱정하실것 같으냐?》
그러면 학생은 울먹이면서 앞으로는 학습장도 깨끗이 정리하고 공부도 잘하겠다고 굳게 굳게 마음다지는것이였다.
경수동무는 학생들에 대한 위대성교양사업에서 훌륭한 경험이 창조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100리라도 달려가 보고 교수교양사업에 받아들이였다. 몇해전 도소재지의 일부 학교들에서 백두산3대장군의 위대성교양카드들을 만들어놓고 학생들의 교수교양사업에 효과적으로 리용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된 경수동무는 수백리길을 달려가 그들의 경험을 배워가지고 돌아왔다. 그날부터 안해와 함께 여러밤을 꼬박 새워가며 수백매의 위대성교양카드를 만들어놓았고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는 혁명전설,혁명일화들을 소학교학생들의 심리에 맞게 자료화하여 교수교양에 리용하였다.
경수동무는 늘 학생들과 함께 있으면서 수령결사옹위,당정책결사관철의 길에서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친 혁명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실감있게 들려주었고 우리 나라의 애국명장들,조국해방전쟁시기 영웅들과 조국의 영예를 떨치고있는 과학자들과 체육인,예술인들이며 곳곳의 이름난 명승지들과 명소들에 대하여서도 알려주어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지니도록 교양하였다.
외진 산골에서 자라는 학생들이 조국을 알고 선군시대의 벅찬 현실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방학기간에 수학려행을 조직한것도 얼마인지 모른다.
호기심이 많고 한가지 사실에 대하여서도 꼬치꼬치 캐여묻기 잘하는 소학교학생들의 일반적인 심리에 맞게 경수동무는 간단하고 통속적이면서도 원리적인 지식을 줄수 있게 교수준비를 짜고들었고 야외학습터를 비롯하여 분교주변에 여러가지 수학공식과 상식자료들을 패쪽에 써붙여놓아 학생들이 수업시간이나 과외시간이나 할것없이 언제나 많은 지식을 습득할수 있는
교육환경을 마련하였다. 교육사업에서는 실물교육,직관교육이 기본이라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심장에 새긴 그는 하나의 교편물을 구하기 위해 밤길도 서슴없이 걸었으며 정열과 지혜를 다 하여 교편물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백두산부석에 대하여 물은적이 있었다. 그런데 분교에는 그 표본이 없었다. 부석에 대하여 설명하면서도 경수동무는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하여도 조국의 한부분인 이 땅에서 사는 학생들이 백두산3대장군의 불멸의 업적과 항일혁명투사들의 숭고한 넋이 깃든 혁명의 성산의 돌 하나,나무 한그루를 모르게 키워서야 되겠는가 하는 자책감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날 그는 서슴없이 밤길을 떠났다. 군안의 학교들에서도 돌을 얻을수 없게 되자 그는 창성을 거쳐 수백리나 떨어진 삭주에까지 가서 백두산부석을 기어이 얻어가지고야 돌아왔다.
다음날 첫 수업은 마침 자연과목시간이였다. 늘쌍 봐야 아침일찍 나와서 교문에 들어서는 자기들을 다정한 눈길로 맞아주던 선생님이 수업종소리가 날 때까지도 보이지 않자 학생들은 영문을 몰라 머리를 기웃거렸다. 이때였다. 수업종소리의 마지막여운이 사라질무렵 교실문이 열리더니 경수동무가 들어섰다. 온몸이 물주머니가 되고 머리에는 성에가 하얗게 불린 경수동무가 《백두산부석이 바로 이겁니다.》라고 하면서 교탁우에 돌 하나를 올려놓았을 때 학생들은 《선생님!》하고 소리쳐 부르면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이것은 한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광석이나 동식물표본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가 걸은 길과 산속을 헤매며 새운 밤들은 그 얼마나 될것인가. 오늘 분교주변에 설레이는 수백그루의 수종이 좋은 나무들과 과일나무들도 그가 학생들의 자연관찰수업에 리용하기 위해 먼곳에서부터 어린 모를 가져다가 정성껏 심고 가꾼 나무들이다.
김경수동무의 머리속에는 언제나 학생들을 당의 의도대로 선군시대의 인재로 훌륭히 키워야 한다는 한 생각뿐이였다.
몇해전 경수동무가 일이 있어 평양에 왔다가 평양제1중학교 소학반에서 텔레비죤으로 보여주기수업을 하는것을 참관한 일이 있었다. 그날밤 그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록화교재를 리용하여 교육내용을 알기 쉽게 리해하면서 재미있게 공부하던 그곳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삼삼 떠올랐던것이다.
- 발전하는 현실은 교육의 질을 더 한층 높일것을 요구하고있다. 그렇다면 우리 분교에서도 교육사업을 마땅히 그 요구에 따라세워야 할것이 아닌가.
경수동무는 이런 생각에 옴하여 한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분교에 돌아온 그는 안해에게 약초를 가꾸어 교육용 록화설비를 마련하자고 하였다. 정옥동무도 대뜸 찬성해나섰다. 그들은 다음날부터 배를 타고 다니며 강기슭의 빈땅에서 자라는 약초들의 씨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열흘나마 애써 모았지만 그 량은 보잘것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점심참에 경수동무는 집터밭쪽으로 안해를 이끌었다. 터밭에서는 소담하게 자라난 강냉이포기들이 바람결에 살랑대고있었다. 다른 때없이 그 포기들을 이윽토록 어루만지던 경수동무가 정옥동무에게 《우리 이 터밭에도 약초들을 옮겨심읍시다.》하고 조용히 말하였다.
순간 정옥동무는 깜짝 놀랐다. 통강냉이 한줌이 귀한 《고난의 행군》때였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는 터밭의 싱싱하게 자라는 강냉이마저 뽑아내고 그 자리에 약초를 옮겨심으려 하다니…
《선남이 아버지,이 밭의 강냉이만은 그대로 둡시다.》
이렇게 말하며 울먹이는 안해에게 경수동무는 애타는듯 말하였다.
《우리야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치는 참된 교육자가 되자고 맹세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 한뙈기밭의 강냉이때문에 교육자의 본분을 잊어서야 되겠소?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선군조국의 미래를 먼저 생각합시다.》
그날 정옥동무는 눈물을 삼키며 남편과 함께 강냉이포기들을 말끔히 뽑아내고 그 자리에 약초들을 촘촘히 옮겨심었다.
교육사업을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각오하고 나서서 아낌없이 바치는 이런 숭고한 희생정신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경수동무는 짧은 기간에 필요한 교육기재들과 설비들을 갖추어놓고 매 학년 과목들의 교육내용과 형식을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일신하였다.
교원의 자질은 학생들의 실력에서 나타난다. 최근년간에 분교의 학생들은 군제1중학교입학시험과 군학과경연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쟁취하였으며 분교는 군적으로도 실력이 높은 학교들중의 하나로 되였다.
오늘 벽동군 읍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경수동무를 만나면 자기 아이들을 분교에서 공부하게 해달라고 청을 들이고있는 사실은 그가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얼마나 알찬 열매를 맺고있는가를 그대로 말해주고있다.
친부모의 정과 사랑으로
교육자라고 하면 흔히 배워주고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정으로 키운다면 어머니에 비기지 못할 웅심깊고 다심하며 뜨거운 정을 바쳐 선군조국의 미래를 키우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교육자들이다. 김경수동무가 소학교학생들을 위해 바친 20년의 세월에서 우리는 그런 참된 교육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지난해 여름의 어느날이였다. 김정옥동무와 함께 분교의 교실들이며 주변을 깊은 추억에 잠겨 돌아보는 한 처녀대학생이 있었다. 방학이 되여 집에 온 신의주교원대학에 다니는 딸 선희였다.
《어머니,여기서 아버지가 내 종아리를 치던 일이 생각납니다.》
교원실문앞에 이르러 선희가 속삭이는 말이였다.
《원 자식두,아직까지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정옥동무의 눈에는 저도 모르게 물기가 어리였다. 그것은 선희가 소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의 일이였다. 어느날 오후에 경수동무는 아이들과 함께 꽃밭을 가꾸고있었다. 그런데 한개의 솔솔이를 놓고 아이들속에서 서로 가지려는 싱갱이가 벌어졌다. 그때였다. 문득 선희가 역성을 들어달라는듯 경수동무를 쳐다보며 《아버지,이거 내거지?》하고 물었다. 그 말에 싱갱이를 하던 아이들이 주춤거리며 손을 놓고 물러섰다. 그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경수동무는 흠칫 놀랐다.
바로 이런 일이 있을가봐,천진하기만 해야 할 동심에 작은 그늘이라도 질가싶어 자식들에게 분교에 나와서는 절대로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다른 애들과 꼭같이 선생님으로 부르도록 요구해온 그였다. 경수동무는 그 자리에서 선희를 데리고 교원실로 갔다.
《내 그만큼 일렀는데 아직도 아버지냐?》
종아리를 맞으며 선희는 섧게섧게 울었다. 매가 아파서라기보다 남과 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설음이 눈물로 솟구쳐 올랐던것이다.
《지금도 난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교육자가 후대들을 위해 바치는 사랑이 어떤것이여야 하는가를 가슴에 새기군 합니다.》
《그래,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아버지에겐 너와 선남이만이 아닌 분교의 모든 아이들이 다 친딸이고 친아들들이란다.》
선희의 말을 받아 조용히 외우는 정옥동무의 눈에는 깊은 감회의 빛이 어리였다.
경수동무라고 어찌 제 자식이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으랴. 하지만 그는 부모이기에 앞서 교육자였던것이다. 그 숭고한 자각이 친자식들이라고 하여 분교의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정을 주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꾸지람을 해도 자식들을 더 엄하게 하였고 나무 한대를 옮겨도 제일 무거운것을 들게 하였다. 그래서 학부형들속에서는 선희와 선남이가 정말 친자식들인가 하는 말까지 돌았다.
그 소문이 귀에 들어온 날 정옥동무는 너무도 억이 막히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였다. 그러는 안해를 달래며 경수동무는 이렇게 말하였다.
《차라리 그 말이 우리가 자기 자식들이라고 하여 남다른 정을 준다는 말보다 나에게는 더 듣기 좋구만. 나라에서 분교의 모든 아이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었는데 제 자식만 자식이라고 애지중지한다면 그게 무슨 교육자겠소. 이제 아이들도 크면 우리의 이 마음을 다 리해하게 되리라고 믿소.》
경수동무는 이런 숭고한 자각을 안고 분교아이들을 키웠다. 평양견학을 가서도 아이들생각에 먼저 아동백화점부터 들려 학용품과 옷과 신발을 샀으며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먼곳에 있는 아이들이 넘어져 상할가봐 그들을 집에 불러 머리를 맞대고 자군 하였다.
경수동무의 지극한 마음은 그가 아이들을 위해 일군 밭들이며 도처에 심은 과일나무들,새로 꾸린 토끼산,닭우리를 두고도 잘 알수 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였을 때였다. 아이들이 들고오는 점심그릇을 보며 경수동무는 가슴이 아팠다. 많은 아이들이 밥대신 풀죽을 사발에 담아 싸들고 왔고 그나마도 없어서 빈손으로 오는 아이들이 여러명 되였다.
(오늘처럼 어려운 때에 아이들을 가르치는것만으로 교육자의 본분을 다했다고 할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들의 건강까지도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립장에 서야 한다. 앞으로 선군조국을 떠메고나갈 이 귀중한 아이들을 위해 할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자.)
이런 결심을 한 경수동무는 안해와 함께 강기슭의 빈땅을 직심스럽게 일구고 토끼와 닭종자도 얻어왔다. 그때로부터 오늘까지 경수동무는 빈땅을 가꾸어 걷어들인 낟알과 품들여 기른 토끼,닭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꼭꼭 푸짐한 생일상을 차려주었으며 자기는 죽을 먹으면서도 생활이 어려운 집 아이들에게 매일 점심밥을 해먹이였다.
언제인가 한 학생의 어머니가 딸의 생일이여서 색다르게 점심을 마련해가지고 분교에 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교실은 비여있고 언덕에 있는 선생의 집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인가 하여 그쪽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었던 그는 깜짝 놀랐다. 방 한가운데 긴 상이 놓여있고 그 둘레에 자기 딸을 중심으로 분교의 아이들이 모두 앉아있는데 그들의 앞에 갖가지 떡이며 과일, 닭고기며 토끼고기를 담은 그릇들이 자리가 비좁게 놓여있었던것이다.
《선생님이 늘 아이들의 생일을 차려준다고 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렇게까지 극진히… 정말 아이들의 어머니는 우리가 아니라 선생님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앓는 아이가 있으면 나을 때까지 업고 다니며 공부시킨 사실이며 오래전에 소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라고 하여도 잊지 않고 찾아다니며 맡은 일을 잘하도록 보살피고 정보산업시대의 인재가 되라고 품들여 새로 나온 기술서적들도 구해다 안겨주고있는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정에는 마음이 따르기 마련이다.
경수동무의 손에서 자란 제자들은 오늘도 그를 잊지 못하여 초소에서,각곳에서 자주 편지를 보내오며 자기 집을 찾듯이 때없이 들리기도 한다.
지난해 경수동무의 생일날에 있은 일이였다. 공부가 끝나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마련해온 기념품들을 저마다 꺼내놓았다. 손으로 뜬 양말과 장갑이며 원주필,자그마한 봉지에 든 사탕,과자…
어린 아이들이 마련한것들이고 보니 무슨 큰것이 있었으랴만 그 하나하나에는 선생의 수고를 두고 어린 가슴에 새겨온 잊지 못할 사연들이 담겨져있었다.
잠시후 아이들은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하여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면서 앞으로 줄지어 나섰다.
흘러가는 세월속에 추억은 많아도
학창시절 선생님을 잊을수 없어라
은혜론 당의 참된 아들딸로
우리를 키워준 선생님
아 선생님
…
노래 《우리 선생님》이였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도 그 노래를 듣는 경수동무와 정옥동무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선생님,교육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고귀한 부름이 어디 있으랴. 이 부름속에는 자기들을 참답게 키우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온 잊지 못할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천백마디의 말에도 다 담을수 없게 함축되여있는것이다.
김경수동무는 이렇게 20대의 청춘시절로부터 50나이가 가까운 오늘까지 20년동안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믿음과 기대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창주땅의 아이들을 조국의 역군으로 훌륭히 키우기 위하여 순결한 량심과 헌신의 땀을 바쳐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경수동무의 숨은 노력을 깊이 헤아리시여 조선지식인대회를 비롯한 여러 대회들에 그를 대표로 불러주시였으며 오늘은 선군시대 숨은 영웅,숨은 공로자의 전형의 한사람으로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김경수동무에 대한 이야기는 선군시대 교육일군들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고 새겨안게 한다.
혁명적군인품성을 본받아 결사관철의 정신을 안고 후대교육사업에 지혜와 열정,사랑을 다 바치며 그 길에서 삶의 참다운 보람과 행복을 찾는 사람,그리하여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기대대로 숨은 혁명가라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이름앞에 언제나 자신을 떳떳이 세울수 있는 사람,바로 이런 사람이 선군시대 당의 참된 교육자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