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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선군시대가 자랑하는 <모성영웅>》
(평양 11월 13일발 조선중앙통신)13일부 《로동신문》은 《선군시대가 자랑하는 <모성영웅>》이라는 제목으로 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선군시대가 자랑하는 《모성영웅》
만경대구역 선구자동 서혜숙동무

온 나라가 하나의 화목한 대가정이 되여 경애하는 장군님과 뜻과 숨결을 같이해나가는 선군시대에 또하나의 감동적인 사실이 알려져 사람들의 가슴을 격동시키고있다.

만경대구역 선구자동 제70인민반에서 살고있는 서혜숙동무는 가정부인으로서 부모없는 아이들을 33명이나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고있으며 그중 15명을 위대한 장군님을 총대로 받드는 조국보위초소에 내세웠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오늘 우리 인민의 정신도덕적풍모는 일찌기 볼수 없었던 새로운 높이에서 발현되고있다.》

인간이 바칠수 있는 사랑가운데서도 가장 순결하고 진실하며 뜨거운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그것은 마를줄 모르는 샘처럼 끝이 없고 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이 없으며 이 세상만물에 빛과 열을 주는 해님처럼 대가를 모른다.

이런 숭고한 사랑과 정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 어떤 평가나 대가도 바람이 없이 수십명의 아이들을 맡아안아 선군시대의 역군으로 훌륭히 키워가는 서혜숙동무,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동지적사랑과 인간애가 우리 인민의 정신도덕적풍모를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주며 그 사랑을 체현할 때 우리 녀성들이 조국앞에 지닌 의무를 다해가는 시대의 참된 어머니가 되여 삶을 빛내일수 있다는것을 가슴뜨겁게 새기게 된다.

나의 아들딸들

서혜숙동무가 어린 두딸이 있는 김천만동무와 가정을 이룬지 두해가 지난 주체81(1992)년 가을의 어느날 아침이였다. 그날 당보를 펼쳐들었던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부모없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처녀방송원에 대한 기사가 실렸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한가정이 되여 화목하게 사는 우리 사회에서 마음속에 그늘을 안고사는 사람이 단 한명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부모없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방송원처녀… 기사를 읽어가는 서혜숙동무의 두눈에서는 저도모르게 뜨거운 감동의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얼마나 돋보이는 아름다운 처녀인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거칠어진 처녀의 두손을 품에 안아 소중히 쓸어주고 싶었다. 그날밤 서혜숙동무는 기사의 내용이 삼삼히 떠올라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처녀방송원의 소행에서 받은 충격과 함께 가슴에 갈마드는 뉘우침으로 해서였다.

서혜숙동무는 이국땅 일본에서 태여나 2살때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였다. 나라에서는 그를 애지중지 키워 공부시켜주고 희망을 마음껏 꽃피우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사랑이란 사랑은 다 받아안으면서도 지금까지 떳떳한 일을 하여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방송원처녀의 갸륵한 소행에 대한 기사를 읽고나니 자신이 더욱 부끄럽게 여겨졌다.

(기술과 힘으로 나라에 보탬을 주지는 못해도 방송원처녀처럼 부모없는 아이들이야 데려다 키울수 있지 않겠는가.)

그의 가슴속에는 저도모르게 이런 생각이 머리를 들었다. 그는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이튿날 그는 남편에게 자기 결심을 터놓았다.

김천만동무는 놀라운 눈길로 한동안 안해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는 두 어린것이 달린 몸으로 그런 부담을 이겨낼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실려있었다. 하지만 안해의 절절한 이야기에서 사회와 집단을 위해 한가지라도 좋은 일을 하여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진정을 알게 된 그는 가슴이 뜨거웠다. 김천만동무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열어주신 귀국의 배길을 따라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겨 군사복무를 하고 조선로동당원이 되였으며 기술일군으로 자라난 사람이였다.

《우리 마음을 합쳐 아이들을 데려다 훌륭히 키웁시다.》

그는 이런 말로 안해의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그후 서혜숙동무는 남편과 함께 갓난애기와 4살 난 어린이, 14살짜리 소년을 데려왔다. 나라에서는 그의 소행을 크게 여겨 현대적인 살림집도 배정해주었다.

그는 송구스러웠다. 아직은 첫걸음을 뗀데 지나지 않은 자기를 내세워주고 보살펴주는 그 품이 고마와 그는 하나,둘 아이들을 더 데려왔다. 이렇게 서혜숙동무는 몇해사이에 33명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였다. 그의 집을 찾는 사람들은 방 가득 들어앉은 오롱조롱한 아이들을 둘러보며 《이건 집이 아니라 탁아소,유치원,학교로군.》라고 하면서 혀를 찼다.

어머니가 되기는 쉬워도 어머니구실을 하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참으로 나이도,성격도,취미도 다른 수십명의 아이들을 키운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루 세끼 죽을 끓여 먹여야 하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매일과 같이 옷을 빨아 입혀야 하는 조무래기들도 있었고 엇드레질로 마음을 썩이는 머리 큰 아이들도 있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손쉴새 없이 바삐 돌아쳐야 하는 육체적피로는 그렇다치고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것은 아이들이 눈치를 보면서 곁을 주지 않는것이였다.

어느날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한 아이를 찾으러 나갔던 서혜숙동무는 이웃집의 밥상에 마주앉아있는 그를 보게 되였다.

《아이가 배가 고팠던 모양이야. 한창 자랄 나이들인데 아이들의 밥사발이 곯게 해서야 안되지.》

핀잔비슷한 그집 할머니의 말에 서혜숙동무는 억이 막히였다. 자기는 배를 곯으면서도 아이들의 밥사발이 곯을가봐 늘 마음을 써온 그였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다니. …

이런 일이 있은 뒤 동네에서는 《아무렴 남의 자식이 남의 자식이지 제 자식만 하겠나.》하는 말이 돌았다. 그 소리를 들은 서혜숙동무는 얼굴을 싸쥐였다.

그날밤이였다. 부엌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있는 안해를 본 김천만동무는 놀라며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사연을 알게 된 그는 이런 일이 있을것을 생각 못하고 아이들을 데려왔는가고 나무람하였다.

《우리가 그 무슨 평가나 바라고 누구의 칭찬이나 듣자고 이런 길을 택했소? 위대한 장군님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조국의 은덕에 보답하자고 시작한 일인데 돌아가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

서혜숙동무는 자기를 꾸짖는 남편이 더없이 고맙게 생각되였다. 남편의 그 말은 꾸짖음이라기보다 잠시나마 나약해진 그의 마음을 바로 세워주는 따뜻한 고무였던것이다. 언제나 말없이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남편,그가 피곤에 실려 자리에 누울 때에도 항상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돌보고 그 많은 빨래까지 맡아하는 김천만동무였다.

그날 서혜숙동무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밤새워 아이들의 옷을 빨고 터진 옷을 손질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고를 알길 없는 아이들은 별치 않은 일을 가지고도 티각태각하기가 일쑤였고 대수롭지 않은 문제를 놓고도 신경을 쓰면서 가정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군 하였다. 그럴수록 서혜숙동무는 아이들에게 더 뜨거운 정을 쏟아부었다.

돌이 갓 지난 성새가 심하게 앓을 때였다. 생명이 위급한 아이에게 피가 요구된다는것을 알게 되자 서혜숙동무는 주저없이 팔소매를 걷어올렸다. 아이와 자기의 피형이 같은것이 참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자기 피를 뽑아 넣어주고 앓는 아이의 머리맡에서 한밤을 지새운 서혜숙동무는 새벽녘에야 쪽잠에 들었다.

《조용해. 어머니가 자는데.》

《엄마가 얼마나 힘들가.》

《이런 때 영양보충을 잘해야 한대.》

아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에 서혜숙동무는 잠에서 깨여났다. 발벼발벼 문을 나서려던 아이들이 그에게로 와-모여들었다. 산꿀이며 잉어탕을 권하는 아이들을 물기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서혜숙동무는 그들을 와락 껴안았다.

《원,애들두… 너희들이 나를 울리는구나.》

자식들을 잘 키우는것은 어머니의 마땅한 본분이다. 하기에 서혜숙동무는 아이들을 위해 바치는 그 어떤 수고도 달게 여기였다.

언제인가 푸짐히 한상 차렸을 때였다. 맛있게 음식을 드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흐뭇해졌던 서혜숙동무는 낯색이 흐려졌다. 조숙이가 고기국을 밀어놓는것이였다. 그에게 고기국을 싫어하는가고 물으니 《오늘은 먹고싶지 않아서…》하고 말끝을 흐리는것이였다. 이제는 아이들이 자기를 따른다고 생각했던 서혜숙동무는 마음이 허전하였다.

이튿날 아침,조숙이누나는 수산물을 좋아한다는 한 꼬마의 귀띔에 서혜숙동무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친어머니라면 제 자식의 식성도 몰랐을텐가.)

자신을 아프게 질책한 서혜숙동무는 아이들에게 친어머니의 정을 기울이기 위해 애썼다. 아이들의 입맛을 돋구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고난의 행군》을 하던 때에는 강냉이죽그릇을 밀어놓는 아이들을 탓함이 없이 식량을 구하러 수십리 밤길을 걷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딸의 집을 찾은 어머니가 아이들시중에 바삐 돌아가는 서혜숙동무를 측은히 바라보다가 《이젠 너도 나이가 있는데 제 아이를 한명이라도 낳아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서혜숙동무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유치원에 다니는 한 어린것이 서혜숙동무에게 다가와 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엄마가 애기를 낳으면 우리를 미워하고 다 버리나?》하더니 왕- 하고 울음을 터치였다. 서혜숙동무가 놀라며 그게 무슨 말인가고 따지고들자 어린것은 형님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하는것이였다. 며칠전에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를 어느새 아이들이 엿들었던것이다.

서혜숙동무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과연 자기에게 친자식이 생기면 그런 일이 생길수 있지 않을가,똑같이 정을 준다고 해도 그때 아이들이 자기 마음처럼 그 정을 받아들일가? 아니다,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33명중 그 어느 한 아이의 마음에도 그늘이 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생각한 서혜숙동무는 어린것을 품에 껴안으며 속삭였다.

《너희들모두가 나의 친자식인데 또 무슨 아이란 말이냐.》

그도 녀성이였다. 그라고 왜 자기의 살붙이를 품에 안아 키우고싶은 마음이 없었으랴. 하지만 우리 당이 아끼고 사랑하는 후대들을 조국과 인민앞에 보다 훌륭히 키워 내세우려는 마음이 더 강렬했기에 그는 한자식의 어머니가 아니라 33명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는 길을 택하였던것이다.

정에는 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서혜숙동무의 진정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머리 큰 아이들은 그의 일손을 도와주고 동생들의 학습과 생활도 보살펴 주었다.

어느 해 서혜숙동무의 생일날이였다. 그날 아침 아이들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서혜숙동무에게 새로 지은 분홍색치마저고리를 안겨주면서 어서 입으라고 하는것이였다. 신통히도 몸에 꼭 맞는것을 보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던 아이들은 서혜숙동무더러 화장도 곱게 하라고 야단이였다. 아이들의 기분에 휩쓸린 서혜숙동무는 저도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서 아이들이 바라는대로 하였다.

이윽고 아이들은 서혜숙,김천만부부를 소박하게 차린 상앞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영문을 몰라하자 16살 난 충일이가 말하였다.

《우리는 다 압니다. 어머니가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결혼식도 치르지 못했다는것을,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아버지,어머니의 결혼상을 차렸습니다. 우리들의 밝은 웃음을 바라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행복을 축하합니다.》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속에 올망졸망한 어린이들은 상앞에 주런이 앉고 큰 아이들은 서혜숙,김천만부부의 뒤에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세상에 보기 드문 《결혼식》사진이였다. 자기들의 지혜를 합쳐 지은 축하의 시를 읊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앞에서 서혜숙동무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참으로 서혜숙동무가 아이들을 위해 바친 뜨거운 사랑의 낮과 밤은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한 행복의 시간,보람찬 삶의 순간순간이였다.

고마움의 인사는 어디에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을 하던 어느 해 여름이였다. 서혜숙동무의 가정은 당의 사랑속에 또다시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게 되였다.

눈부신 해빛이 넘쳐나는 해수욕장이며 터져오르는 웃음소리로 시간 가는줄 모르는 유희오락실,당의 은혜로운 사랑이 곳곳마다 슴배여있는 식당이며 침실들… 야영소에서 서혜숙동무는 우리 어린이들을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이 그 얼마나 뜨거운것인가를 가슴깊이 느끼였다.

그들이 야영소에서 돌아온 후였다. 모두 모여앉아 즐거운 추억을 더듬고있는데 8살 난 단숙이가 불쑥 《우리 어머니가 제일이야. 우리가 엄마와 함께 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런 훌륭한 야영소에 가보았겠니.》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옳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이런 행복한 생활을 하는것은 다 어머니를 잘 만난 덕분이라고 하였다.

순간 서혜숙동무는 가슴이 섬찍하였다. 내덕에 행복을 누리다니?…

아이들을 데려온 후 서혜숙동무는 그들이 자기를 친어머니처럼 따르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면서 진정을 쏟아부었다. 사랑이 뚫지 못하는 《장벽》이란 없는 법이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해하던 아이들이 점차 서혜숙동무의 따뜻한 정에 끌려 응석도 부리고 투정질도 하기 시작하였다. 젖먹이아이들은 서로 제 엄마라고 하면서 다투어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저마다 어머니를 위해주려고 마음을 썼다. 그러는 아이들이 더욱 사랑스럽고 고마왔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 이처럼 엄청난 오해를 받게 될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서혜숙동무에게는 아이들을 데려올 때의 일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데 마당에 낯익은 승용차가 서있었다. 락랑구역당위원회 책임일군의 차였다. 언제나 그들의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는 책임일군이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차까지 보낸것이였다.

서혜숙동무의 가슴속에는 고마움이 사무쳐올랐다. 그렇게 따뜻이 돌봐주는 사람은 그뿐이 아니였다. 서혜숙동무가 수십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다는것을 알고는 일부러 집에 찾아와 보고 하나라도 돕기 위해 늘 마음을 쓰는 성,중앙기관의 여러 일군들…

자기들이 야영이나 견학을 떠날 때에도 모두가 떨쳐나서 세면도구며 준비품을 마련해주고 멀리까지 손저어 바래워주는 그들이였다.

(내가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들을 안아 훌륭히 키워주는 고마운 품이 진정 무엇인가를 똑바로 새겨주지 못하였구나.)

자책감으로 서혜숙동무는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텔레비죤으로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활동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 그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너희들의 행복을 지켜 오늘도 멀고 험한 길을 걷고 계신다. 아버지장군님이 계시여 우리 가정의 행복이 있고 너희들의 웃음이 꽃피는거란다.》

조선지도를 펼쳐놓은 그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가시는 곳마다에 우리 장군님의 현지지도성과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붉은 기발을 꽂아 놓는것이 어떤가고 하였다. 아이들은 환성을 올리였다.

서혜숙동무는 여러 계기들에 아이들에게 위대한 장군님의 품,사회주의조국의 품이 그 얼마나 따사로운가를 깊이 새겨주기 위해 애썼다. 노래를 하나 불러도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고 글 한편을 지어도 장군님께 충성다할 맹세를 담으며 좋은 일을 찾아해도 그 착한 마음이 사회와 집단,어머니조국을 위해 큰일을 할수 있는 애국의 싹으로 튼튼히 자라도록 아이들을 이끌어주었다.

은혜를 모르고서는 보답도 할수 없다고 생각한 서혜숙동무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후대들에게 돌려주시는 뜨거운 사랑과 은정,어린이들을 위한 당과 국가의 크나큰 혜택에 대하여서도 가슴뜨겁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서혜숙동무의 가정은 만경대구역 선구자동의 좋은 살림집으로 이사하였다. 나라에서는 크고 좋은 집이 생길 때마다 남먼저 그들에게 주었던것이다. 그날밤 서혜숙동무는 오래전부터 써오던 두툼한 《우리 가정수첩》을 꺼내들었다.

첫장을 펼치니 김천만동무가 어느 한 대회에 참가하여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지닌 사실이,그 다음장을 번지니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에 의하여 자기 가정이 여러 출판물들에 소개된 이야기가 적혀져있었다. 또한 여러 성,중앙기관들과 사회단체들에서 보내여온 지원품명세들도 일일이 적혀져있었다. 곁에서 들여다보던 아이들은 호기심이 나서 서혜숙동무더러 왜 그런것을 다 적어놓는가고 물었다. 서혜숙동무는 대답하였다.

《후날 너희들이 커서 어른이 된 다음에 누가 너희들을 키우고 보살펴줬는가를 똑똑히 알려주기 위해 서란다. 이 하나하나의 지원품에 위대한 장군님의 인덕정치가 꽃펴난 우리 사회의 참모습이 어리여있단다. 잊지 말아라.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면 고마운 이 제도를 마련해주신 아버지장군님께 드려라.》

그것은 서혜숙동무의 진정이였다.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볼 때면 그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군 하였다. 고마운 이 제도가 아니라면 내가 이 많은 아이들을 맡아 키울 엄두나 냈을가 하고…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 때로부터 그는 은혜로운 당의 손길아래 세상에 부럼없이 행복하게 자랐다. 해빛밝은 창가에서 돈 한푼 내지 않고 배우고 평양학생소년궁전의 소조실에서 희망의 푸른 꿈을 키웠으며 한 체육선수단에서 선수생활도 하였다. 기쁨과 행복에 넘쳐나는 딸의 얼굴을 보며 서혜숙동무의 어머니는 자주 《꿈만 같은 일이지.》라고 하였다. 서혜숙동무는 이국살이로 가슴에 멍이 든 어머니의 지난날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국의 품에 안긴 자기는 얼마나 행복한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군 하였다.

흘러간 어린 시절도 기쁘고 즐거웠지만 서혜숙동무에게는 지금처럼 행복하고 보람찬 시절이 없는것만 같았다. 아무리 많은 일감이 차례지고 그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힘든줄 몰랐다.

(나의 곁에는 언제나 보살펴주고 이끌어주는 훌륭한 일군들이 있고 인간사랑의 화원인 위대한 장군님의 품이 있다.)

서혜숙동무의 머리속에는 늘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만경대구역에 이사온 그의 집을 제일먼저 찾은 사람은 구역당위원회의 책임일군이였다. 한 꼬마를 번쩍 들어 품에 안은 그는 누군가고 하는 아이들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너희들의 할아버지다. 이제부터 나하구 친하자.》

서혜숙동무의 인사를 받으며 책임일군은 《앞으로 친정아버지처럼 생각해주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날부터 그는 서혜숙동무의 가정과 한식솔이 되였다. 설날에 제일먼저 찾아와 아이들에게 기념품을 안겨주고 세배를 받는 사람도,때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아이들의 숙제장을 보아주는 사람도 바로 그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온 나라가 화목한 대가정이 되여 서로 돕고 이끌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참모습에 서혜숙동무는 눈굽을 적신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들이 살고있는 동,인민반은 물론 낯모를 사람들까지도 찾아와 그들의 생활상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마음을 썼다. 언제인가 서혜숙동무의 아이들이 《문두드리는 소리》라는 즉흥시를 지어 읊은것도 바로 그때문이였다. 날마다 우리 집에 들려오는 문두드리는 소리는 아버지장군님의 사랑을 전하는 소리이고 우리들을 보답에로 부르는 뜻깊은 소리라고 하는 시구절을 들으면서 서혜숙동무는 저도모르게 가슴이 뜨거워났다.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그의 삶은 보람차고 조국의 따사로운 손길에 떠받들려 그의 힘과 열정은 더욱 세차게 용솟음치는것이 아닌가. 서혜숙동무는 목소리를 합쳐 그 시를 읊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 이렇게 속삭이였다.

우리의 운명을 지켜주고 참다운 인생의 행복을 안겨주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은 정녕 죽어서도 못떠날 영원한 삶의 보금자리이라고.

《리수복영웅처럼 되거라》

서혜숙동무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들이 어릴 때부터 도덕이 밝고 의리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도록 특별히 마음을 썼다. 그 마음이 자라야 앞으로 위대한 장군님을 신념과 의리로 받들줄 아는 선군시대 참된 충신이 될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충일이를 데려왔을 때였다. 서혜숙동무가 부모들에 대하여 묻자 그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것이였다. 서혜숙동무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이튿날 충일이가 배우던 학원에 찾아갔다. 거기서도 구체적인 자료를 알수 없게 되자 서혜숙동무는 그가 부모와 함께 살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삼복철에 땀흘리며 찾아온 서혜숙동무에게 충일이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람들은 놀라와 했다.

《그애가 따르게 하자면 친부모를 모르는 편이 나을텐데…》

서혜숙동무는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모르고 자식된 도리도 지킬줄 모르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다할수 없습니다.》

그해 한가위날 여러 아이들에게 음식들을 꾸려주어 부모들의 묘를 찾아가게 한 서혜숙동무는 충일이를 데리고 그의 친어머니의 묘를 찾았다. 묘비를 새로 세운 다음 상돌우에 준비해간 음식과 함께 꽃묶음을 놓은 그는 충일이에게 일렀다.

《인사드려라. 너의 어머니는 좋은분이였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경애하는 장군님께 충성다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서혜숙동무에게서 자기 부모들에 대하여 잘 알게 된 충일이는 《어머니!》라고 목메여 부르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서혜숙동무는 위대한 수령님을 신념과 의리로 높이 받들어모시고 충성다해 온 혁명선렬들의 고귀한 넋을 심어주기 위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대성산혁명렬사릉을 찾군 하였다.

그러던 주체83(1994)년 7월,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온 나라가 피눈물에 잠겼던 그 나날 서혜숙동무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과 같이 만수대언덕에 올랐다.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우러르는 그에게는 수령님의 품속에서 누려온 행복했던 나날의 일들이 되새겨져 사무치는 그리움을 금할길이 없었다. 그는 눈물속에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대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더 잘 받들어가리라 굳게 마음다지였다.

그는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백두산을 마음에 안고 살도록 하기 위하여 그해 여름방학에 그들을 데리고 백두산지구를 찾았다. 그는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혁명사적지들마다에서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하였던 항일혁명투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의 넋을 이어 경애하는 장군님만을 따르는 참된 충신이 되여야 한다고 뜨겁게 말하였다.

이듬해 설날,그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다박솔초소를 찾으신 소식을 커다란 격정속에 접하였다. 어버이수령님을 잃고 피눈물의 해를 보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선군장정의 길에 오르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총대로 찾아주신 내 나라,내 조국을 총대로 굳건히 수호하며 김일성조선의 존엄과 영예를 누리에 떨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가슴에 새기며 서혜숙동무는 결심을 굳혔다.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사상과 령도를 받들어 아이들을 총폭탄용사들로 키워 선군시대 어머니의 본분을 다하리라고.

그 마음으로 서혜숙동무는 남편과 의논한 후 아이들의 이름을 가운데글자를 합치면 일편단심 충성 다하리라,조국통일,영웅동,총폭탄 등이 되게 고쳐 지었다. 그리고 군사복무를 하는 가정의 맏이인 다숙이와 자주 편지련계를 가지고 모든 아이들이 그를 따라배우도록 이끌어주었으며 아이들과 함께 인민군대원호사업도 적극 벌리였다.

어느날 다숙이에게서 안변청년발전소 건설에 참가하였다는 편지가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서혜숙동무는 아이들과 함께 원호물자도 정성껏 마련하고 예술소품공연도 준비하였다. 그리고나서 안변청년발전소 건설장을 찾았다. 그들을 맞이한 부대의 지휘관은 서혜숙동무의 손을 뜨겁게 잡고 감동을 금치 못해 하였다.

《정말 훌륭합니다. 이렇게 씩씩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니 더 힘이 납니다. 우리들은 발전소건설에서 위대한 장군님의 군대답게 위훈을 떨치겠습니다.》

부모의 교양을 받으며 아이들은 총대의 귀중함을 가슴깊이 새기였으며 모두가 조국보위초소에 서는것을 가장 큰 희망으로 간직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서혜숙동무가 아이들의 학습지도를 하고있는데 중학교졸업을 앞둔 한 아이가 책을 펴놓은채 텔레비죤화면에 정신을 팔고있었다.

《넌 공부를 안하니?》

《나야 이제 군대에 나갈텐데요뭐.》

《?》

서혜숙동무는 말문이 막혔다.

일요일에 서혜숙동무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을 찾았다. 영웅들의 군상앞에 아이들을 주런이 세운 서혜숙동무는 이렇게 말하였다.

《리수복영웅은 학교때 최우등생이였고 모범학생이였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조국앞에 위훈도 세울수 있는것이란다.》

리수복영웅이 지은 시를 읊어주고나서 서혜숙동무는 절절히 당부하였다.

《나는 너희들이 자라서 모두가 리수복영웅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경애하는 장군님을 결사옹위하는 길에서 너희들이 육탄영웅,총폭탄영웅이 된다면 이 어머니는 더 바랄것이 없다.》

그날의 서혜숙동무의 당부는 아이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텔레비죤으로 예술영화 《내가 설 자리》가 방영되였을 때였다. 영화가 끝난 후 서혜숙동무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느꼈는가고 물었다.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우리가 설 자리는 조국보위초소입니다.》

라일이가 조국보위초소로 떠나던 날,그는 바래워주는 서혜숙,김천만동무들에게 정색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잘 압니다.》

아들은 시를 읊었다.


리수복의 어머니처럼
수령님 기억하시고
우리 당이 그 이름 불러주는
그런 영웅의 어머니로 내가 된다면
너를 두고 늘 근심으로 희여졌던 이 머리가
그 순간에 검어지리라

그들이 사랑하는 시였다.

《어머니,이 아들은 꼭 가슴에 훈장을 번쩍이며 돌아오겠습니다.》

라일이의 의젓한 말을 들으며 서혜숙동무는 그가 집을 뛰쳐나가 속을 태우던 일들이 어제런듯 떠올라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한해 두해 세월이 흘러 서혜숙동무의 품에서 자란 아이들 15명이 조국보위초소에 섰다. 초소에서 편지가 올 때마다 서혜숙동무는 무등 기뻤다. 그는 자기의 편지와 함께 집에 남은 아이들의 편지도 초소에 보내주군 하였다. 정든 부모형제들을 잊지 말고 군사복무를 더 잘하라는 간절한 마음 담아,

초소에 선 다숙이가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닌 소식이 전해진 날은 서혜숙동무에게 있어서 명절이였다.

《맏이가 당원이 되다니. 얘들아,우리 집에 경사가 났구나. 너희들도 다숙이처럼 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렴.》

서혜숙동무가 첫 아이를 데려온 때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서혜숙동무가 귀여운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였으며 귀밑머리에 드문드문 흰서리가 불리였다. 그 한오리한오리의 흰머리칼에는 33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맡아안고 남모르는 정을 기울여온 눈물겨운 사연들이 얼마나 잊을수 없게 비껴있는것인가. 그 나날에 서혜숙동무는 전국원군미풍열성자대회와 제2차 전국어머니대회에 참가하고 위대한 장군님의 감사를 받아안았으며 김천만동무는 전국적으로 진행된 미풍선구자들의 대회에 참가하였다.

얼마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많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고있는 서혜숙동무에게 또다시 은정깊은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우리 당과 혁명의 력사를 승리와 영광으로 수놓아온 조국의 수천만아들딸들의 영웅적위훈에는 이 나라 어머니들의 뜨거운 애국충정과 지성이 깃들어있다.

서혜숙동무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선군시대가 낳은 자랑스러운 《모성영웅》이다.

서혜숙동무와 같이 위대한 장군님과 뜻과 숨결을 같이 하며 자식들을 수령결사옹위투사로 키워 나라앞에 떳떳이 내세우는 훌륭한 어머니들을 가지고있는것은 우리 당과 인민의 커다란 자랑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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