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1월 21일발 조선중앙통신)21일부 《로동신문》은 《군사를 중시한 중세 동아시아의 강국-고구려》라는 제목으로된 다음과 같은 개인필명의 글을 실었다.
조선민족의 력사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동방의 천년강국 고구려는 중세 동아시아의 제일가는 군사강국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고구려는 넓은 령토와 발전된 문화를 가진 강대한 나라였으며 고구려인민들은 매우 용감하고 애국심이 강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강대성과 높은 문화수준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자랑입니다.》
남에 대한 사대와 의존심이 없이 자주적대를 강하게 세우면서 자기식의 발전된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선진문화를 창조하여온 고구려는 국방력에서도 동방의 강국으로서 자기의 위용을 높이 떨치였다.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 고구려가 그 어느 나라와 민족의 지배와 예속도 허용하지 않은 중세 동아시아의 제일 강대한 나라로 될수 있었던것은 바로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게 자체의 국방력을 부단히 강화발전시켜왔기때문이다.
국방력강화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그 담당자인 근로대중자신이 군사를 중시하는 관점을 가지고 여기에 적극 참가하는것이다.
고구려인민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이 그 어느 민족보다 강하였고 온 나라에는 군사를 중시하는 기풍이 꽉 차있었다. 이런것으로 하여 고구려는 세기를 이어 달려드는 침략자들을 련속 물리치고 동아시아의 무시할수 없는 군사강국으로 불리우면서 근 천년이라는 년륜을 새겨올수 있었다.
고구려사람들속에서는 무술을 숭상하는 생활기풍이 강하게 지배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자기식의 고유한 무술을 창조하고 그 전통을 계승발전시켜왔다. 맨주먹과 발로써 상대를 쳐서 쓰러뜨리는 권법은 고구려사람들이 창조하고 즐겨한 무술로서 후세에는 《18반무예》의 하나인 백타로,발차기가 위주로 된 택견,날파람으로 불리웠으며 오늘날 태권도로까지 발전완성된 우리 민족무술의 전신이였다.
고구려에는 무술과 함께 뛰여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고구려사람들은 매해 정초에 국가적행사로서 대동강가에 모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방에게 돌을 던져 승부를 가르는 석전(돌싸움)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은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큰몫을 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걷는것이 달리는것과 같았다.
이러한 력사적사실들은 고구려사람들이 날쌘 동작과 기동성,강한 정신력과 육체적준비를 요구하는 싸움수법을 창조하고 련마해온 패기있고 재능있는 민족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는 무술과 재주를 익히는데 신분과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참가하였으며 이것을 하나의 생활기풍,인습으로 여겨왔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상무적기풍이였다.
고구려의 무덤벽화들에는 달리기와 말타기,칼쓰기,창다루기,활쏘기,사냥,씨름과 권법 등 고구려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들이 그려져있고 《구당서》(고구려전)에는 《(고구려사람들의)풍속에 책읽기를 좋아하고 거리에 큰 집을 짓고 <경당>이라 부르면서 자제들이 결혼전에 주야로 여기서 책을 읽고 활쏘기 등을 익혔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왕도 어렸을 때부터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고 불리웠고 그것이 그대로 이름으로 되였으며 그의 아들도 활쏘기명수였다는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고구려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무술위주의 오락과 경기를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즐겨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무술에 출중한 사람이라면 신분의 차이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다. 고국회복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큰 공적을 남기고 전장에서 희생된 온달장군도 천한 백성의 자식이였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무술을 숭상하는 이러한 상무적기풍을 바탕으로 하여 우수하고 강한 군대를 가질수 있었으며 자기의 무력을 량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강화해나감으로써 군사강국의 기틀을 마련할수 있게 되였다.
고구려는 봉건적의무병역제를 실시하여 잘 훈련되고 무장된 30만명정도의 상비군을 가지고있었으며 일단 유사시에는 100만명정도의 군사가 동원되였다.
방대한 무력을 가진 고구려군은 군종,병종에 있어서도 매우 세분화되여있었으며 공격과 방어수단을 다 갖춘 강한 군대였다.
고구려군은 륙군과 수군으로 구분되여있었는데 륙군의 수가 더 많았다. 륙군에는 보병과 기병,각종 특수병종이 있었는데 보병에는 활,기계활,칼,도끼,창과 갈구리로 무장한 군사 등이 있었고 기병에는 중기병과 경기병 등이 있었다. 고구려의 륙군에서 기본주력은 기병이였다. 기병가운데서도 중기병에는 말과 기마수에게 다 찰갑(철패쪽)을 씌운 철기병이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보병과 기병,각종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전문병들로 조직된 중앙군안에 왕당(국왕의 직속부대)을 비롯한 여러 당들을 두고 무술과 전법,문장에 능한 사람들로 대모달(장군급),말객 등의 군사지휘관들을 임명하였다. 지방에서는 주,군,현급의 행정장관들이 지방군의 통솔자,군사지휘관으로 되여 행정-군사단위의 일치성을 보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산이 많은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을 리용하여 1,000여개에 달하는 크고작은 성들과 진을 쌓았으며 이것들을 련결하여 공고한 수도방위체계와 전연,전방,종심,장성방어체계를 형성함으로써 전국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긴 해안선을 끼고있던 고구려는 4세기 말부터 배무이기술과 항해술이 발전함에 따라 대규모적인 해상공격과 방어,해상기동과 상륙,순찰 및 사신호위 등 각종 해상활동을 목적으로 한 자체의 수군무력을 창설하고 동해와 서해에서 수백년간 활약하였다.
고구려에는 높은 산봉우리마다에 봉화대를 설치해놓고 적정을 알리는 통신련락체계인 봉수체계와 나라의 기본도로마다에 물자운반과 통신용말 등을 대기시켜놓고 리용하는 역참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져있었다.
고구려의 군사력은 강한 경제력을 밑바탕으로 하여 더욱 불패의것으로 다져졌다.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으로 하여 어느 한 성에만 하여도 10만∼50만석씩의 군량과 5만여필의 전투용군마,운반용축력을 비롯한 전략물자가 확보되여있었다. 제철,제강업과 수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함선,운제,충차와 같은 공성무기와 장검,쇠뇌,투구,갑옷 등의 장구류들이 지정된 국가관청수공업장들과 수공업자들에 의해 제작되였으며 다량의 소모품인 화살과 활촉은 전국의 모든 관청수공업장들과 수공업자들이 다 생산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의 경제적잠재력은 시기별로 내세웠던 소국통합,고국회복,삼국통일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에 더욱 장성강화되였다.
무변광대한 령토와 풍부한 인적 및 물질적자원에 의거하여 자기의 군대와 무장장비를 더욱 강화하여온 고구려의 군사적위력은 외래침략세력을 물리치는 투쟁과정에 남김없이 과시되였다.
B.C.3세기말부터 7세기중엽까지의 많은 전쟁들과 일화들은 중세 동아시아대륙을 크게 진감시켰던 군사강국으로서의 고구려의 위력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처럼 고구려사람들은 자기식의 전통적인 무술을 가지고 강한 군사력에 의거하여 중세세계전쟁사에 류례없는 수백만의 침략대군들과도 여러차례에 걸쳐 맞서 싸워이긴 강대한 민족이였다.
군사강국으로서의 고구려의 자랑찬 력사는 앞으로도 조선민족의 력사와 더불어 후세에 길이 전해질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