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1월 26일발 조선중앙통신)26일부 《로동신문》은 《동방강국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국가》라는 제목으로 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후보원사,교수,박사 박영해가 기고한 글을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반만년전부터 우리 민족의 국가들은 련면히 자기의 력사를 끊임없이 이어왔다.
우리 나라 력사상 첫 통일국가인 고려는 동방강국이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918년에 세운 고려는 개경(개성)을 수도로 하여 1392년까지 근 500년간 존재한 봉건국가이다.
민족력사에서 국가들의 계승관계는 력사에서 주류를 이루는 정통성에 관한 문제이며 해당 국가의 지위와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고려가 동방강국이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국가로서 그 위용을 자랑한데 대하여서는 당대나 그 이후 내외에서 자명한 사실로 인정되여왔으며 오늘도 우리 인민은 민족력사의 정통성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로서 이에 대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것은 나라이름을 고구려와 뜻,소리가 같은 고려라고 부른데서 뚜렷이 표현되고있다.
일반적으로 국호에는 건국자의 리상과 지향, 이전 국가와의 계승관계, 국가의 성격 등이 함축되여있다.
우리 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들의 력사기록들에서는 고구려와 고려가 같은 말과 뜻으로 기록되여왔다. 하기에 옛 고구려지역이였던 중부조선일대를 장악한 궁예는 901-904년까지의 기간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나라이름을 후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불렀다. 918년 6월 궁예의 태봉국을 전복한 왕건 역시 나라이름을 고려로 정했다. 이것은 동방강국이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의 출현을 선포한것이며 고구려와 같은 리상과 지향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결심의 표시였다.
993년 서희장군은 강화담판에서 적장의 강도적인 요구에 대하여 《우리 나라는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때문에 나라이름도 고려라고 했고 수도도 평양(부수도)에 정하였다.》라고 반박하였다. 적장은 고려측의 주장을 인정하고 군사들을 철수시키였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것은 건국시조 왕건과 나라를 세우는데서 주도적역할을 한 적지 않은 장수들과 군사들이 고구려유민의 후손들이며 건국초기 국가의 기본령역도 옛 고구려땅이였다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유민의 후손이였다. 그의 전설적인 먼 조상인 호경은 옛 고구려땅인 백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 송악산기슭에 집터를 정한 고구려유민이였다. 그의 할아버지도 고구려사람이였다. 왕건의 할아버지는 작제건, 아버지는 룡건 또는 륭, 그자신은 건으로서 성씨를 못가진 평민이였는데 왕이 되면서 성을 왕씨로 정하였다. 조선성씨를 종합한 책인 《만성대동보》를 보면 개성왕씨의 시조는 왕건의 증손자인 평양공 왕기로 되여있다. 왕건의 가문은 후기신라말기 옛 고구려땅인 송악일대를 지배하던 고구려유민출신의 대봉건세력이였다.
고려건국에서 결정적역할을 하였고 그 정치군사적지반으로 되여온것도 옛 고구려땅에서 살아온 고구려유민의 후손들이였다. 태봉국왕 궁예가 초기에 나라이름을 후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하고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데 대하여 복수하겠다고 하면서 신라를 《멸도》(망한 수도)라고 부르게 한것도 신라가 장악하고있던 옛 고구려지역인 중부조선일대에 사는 고구려유민후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태봉국의 최고관료인 시중이며 군사실권자였던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 지지해준 군사들과 관리들의 대부분도 중부조선일대의 고구려유민의 후손들이였다. 고려건국과 국토통일에서 결정적역할을 한 사람들은 옛 고구려지역들인 평산,토산,춘천출신들이였다. 이러한 고구려유민세력의 지지에 기초하여 왕건은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하여 옛 고구려판도였던 중부조선에서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것은 당대의 이웃나라들에서도 이것을 자명한 사실로 인정하고있은데서도 잘 알수 있다.
933년 3월 이웃나라에서 고려에 보내온 국서에는 왕건은 《주몽(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상서로운 전통을 계승하여 왕이 되였다.》,《홀한(발해의 수도)인들에게 먹을것,입을것을 주어 구제했다.》라고 지지가 표시되여있었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이웃나라의 한 관리도 자기의 방문기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왕씨의 조상은 고구려귀족이였다. 고씨(고구려)의 정치가 쇠약해지자 나라사람들이 왕건이 현명하였으므로 국왕으로 세웠다.》라고 썼다. 고려와 같은 시기에 존재한 이웃나라들에서 편찬된 《오대사》와 《송사》에서도 《고려는 원래의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것은 동족과 동족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을 계승하여 고려가 그것을 실현한 첫 통일국가로 출현하였고 존립전기간 그 완전한 실현을 위하여 시종 노력한 사실이 증명하여준다.
왕건은 나라를 세운 그해에 벌써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복구하고 이곳을 군사전략적기지로,수도로 삼을 목표밑에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곳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그 행정군사적지위를 높여 대도호부,서경으로 하고 후대왕들이 봄,가을에 순찰하라고 강조하였다. 3대왕 정종은 수도를 옮길 계획밑에 서경에서 왕궁건설을 추진하였고 4대왕 광종은 서쪽수도라고 하여 서경의 이름을 서도로 고치였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10세기 전기간에 걸쳐 동서북부지대에서 축성사업을 추진시켜 대동강과 문천계선이북의 넓은 옛 고구려지역을 통합하였다. 935년에는 후기신라왕 김부를 귀순시켜 신라를 통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병합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북방의 발해가 926년 외적에 의해 망한 다음에는 동족의 품을 찾아들어온 수십만의 발해유민들을 포섭하였다. 942년 왕건은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하면서 그를 멸망시킨 이웃나라의 사신을 류배보내고 례물로 가져온 락타는 굶겨죽이였다.
이러한 통합정책을 통하여 고려는 10세기 동족의 령토와 주민의 가장 많은 부분을 단일한 국가의 지배밑에 통합하여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첫 통일국가로 출현하였다.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완전히 성취하려는 고려의 활동은 존립전기간 계속되였다. 14세기 고려의 관료학자 리제현(1287-1367)은 왕건이 후백제를 타승하기전부터 서경과 북변을 자주 순찰한것은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성취하려는데 있었다고 하였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것은 고려군민이 반침략투쟁에서 고구려사람들과 같은 강의하고 용감한 애국적인 투쟁기질을 발휘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거둔 승리에 대하여 이웃나라의 한 고위관리가 감탄을 아끼지 않은것도 고려의 고구려적인 투쟁기질을 부러워한데서 출발한것이다. 무서운 초토화전술로 아시아와 동유럽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던 나라도 고려만은 몇차례의 침략으로써도 정복하지 못하였다. 하기에 1260년 이 나라의 왕은 만리밖에 있는 나라인 고려를 정복하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한 고위관료도 《고려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있어 우리 나라에서 출병한지 20여년이 되였으나 신하로서 귀속시키지 못하였다.》라고 비명을 질렀다.
이처럼 무적을 뽐내던 나라도 고구려와 같은 나라인 고려는 점령할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인하였다.
력사적사실들은 명실공히 고구려가 조선민족의 국가이며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국가라는것을 립증해주고있다.
동방의 강국이였던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로서 민족의 력사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