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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 방재순의 수기 《<판문점충격> 통일려명을 부른다》
(평양 11월 18일발 조선중앙통신)18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비전향장기수 방재순의 수기 《<판문점충격> 통일려명을 부른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마음은 판문점에로 달려가군 한다.

10년전 11월 24일,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전방중의 최전방인 판문점을 시찰하신 소식은 온 남녘땅을 뒤흔들며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마음속에도 밝게 비쳐왔었다.어두운 남쪽땅에서 그 충격을 접하고 밝은 마음으로 만세환호를 터치던 때가 어제런듯 하다.

그날을 되새겨보느라면 선군으로 위력떨치는 우리 조국의 경이적인 오늘의 현실이 그날에 잇닿아있고 6.15시대의 통일려명이 그때에 동트기 시작했었다는 생각에 잠기군 한다.

그래서 10년전 흰안개속에 펼쳐졌던 《판문점충격》의 거대한 민족사적의미를 다시금 새겨보며 붓을 든다.



위대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온 남녘땅을 커다란 충격속에 휩싸이게 했다.

내가 위대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소식을 들은것은 38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남강원도 횡성군에 가있던 때였다.어느날 조카가 《한겨레》신문을 들고와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판문점을 찾으셨다고 알려주었다.나는 저도모르게 무릎을 치고 벌떡 일어서며 탄성을 터쳤다.

경비병들의 발자국소리에도 살기가 뻗치고 가랑잎 날리는 바람소리에도 긴장이 감도는 판문점,지난 수십년동안 어느 한 순간도 상대를 겨눈 총구가 내리워진적이 없는 그 삼엄하고 위험한 최전방에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우리 장군님께서 나오셨다니 그것은 실로 천만대적을 발아래로 굽어보시는 백두령장이 아니고서는 내릴수 없는 결단이였다.

얼마나 준엄하고 첨예한 정세가 흐르던 때였던가.우리 겨레가 하늘처럼 믿고 살던 어버이수령님을 잃은 비애의 눈물은 강물처럼 흐르고 미제를 괴수로 한 제국주의련합세력은 《북조선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떠들며 압살의 칼을 빼들고 무엄하게 덤벼들었다.남조선의 친미사대매국세력은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떠들며 《흡수통일》의 야망을 실현해보려고 미친듯이 덤벼들었다.설상가상으로 우리 공화국에는 전례없는 자연재해까지 겹쳐들었다.

자주적인민으로 사느냐 노예로 되느냐,전쟁이냐 평화이냐가 눈금사이를 오가던 때 우리 장군님께서 판문점에 성스러운 령도의 자욱을 찍으실줄은 누구도 생각할수 없었다.

조국의 품에 안긴 다음해 판문점을 찾은 우리에게 그곳 일군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참으로 가슴 울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해 초도의 병사들을 찾아 풍랑사나운 배길을 헤쳐 현지시찰하신 피로도 푸실사이 없이 또 한밤을 새우시고 새벽녘에 판문점으로 향하시였다고 한다.11월의 마지막 일요일마저 현지지도에 바치시려는 장군님께 일군들은 절대로 판문점에만은 가실수 없다고 절절히 말씀올리였다.그러나 그이께서는 나는 빨찌산의 아들이라고,우리 전사들이 있는 곳이라면 나는 그 어디에라도 가야 하고 또 가고있다고 하시며 결연히 판문점시찰의 길에 나서시였다는것이다.

판문점에 도착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업적을 상징하는 통일친필 《김일성 1994.7.7.》을 모신 기념비앞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수령님의 한생을 되새겨보시고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통일방침들을 조국통일3대헌장으로 정립해주시며 수령님의 통일유훈을 기어이 실현하실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시였다고 했다.

강대성의 《신화》를 뽐내던 미제가 청소한 우리 공화국앞에 무릎을 꿇고 처음으로 항복서에 도장을 찍은 력사의 땅,통일을 바라는 겨레의 열망이 비낀 판문점.이곳 시찰을 어찌 한개 최전연초소에 대한 시찰이라고만 하겠는가.

그것은 온 겨레에게 통일의 희망과 신심을 주고 내외분렬주의세력에게는 공포와 실망을 안긴 성스러운 애국장거였다.그것은 우리를 압살해보려고 악을 쓰며 달려드는 미제에게 지난 조선전쟁때보다 더 참혹한 패배를 면치 못한다는것을 단호히 경고한 선군우뢰였고 온 겨레가 하나로 될 그날이 기필코 밝아오리라는것을 내외에 소리높이 선포한 통일뢰성이였다.

우리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너무도 조용히 진행되였지만 그 소식은 천파만파의 갈기를 일으키며 세상을 들었다놓았다.

온 겨레의 심장을 격동시킨것은 그것이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어버이수령님의 철의 담력과 불굴의 의지,령활무쌍한 지략을 그대로 체현하신 위대한 빨찌산아들만이 내리실수 있는 대용단이였다는것이다.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일제의 삼엄한 국경경비진을 돌파하여 북변의 군사요충지 보천보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고 온 겨레에게 광복의 서광을 안겨주시였던 김일성장군님의 조국진군의 기상을 방불케 하는 빨찌산식 시찰이였다.

나는 20살 잡히던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보천보전투소식을 알게 되였다.그때 반일투쟁을 하던 삼촌집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펼쳐들고 보천보전투담으로 흥성거리였다.

서울에 가서 보천보에까지 다녀온 려운형선생을 만나고 온 삼촌의 말이 서울장안도 온통 그 소식으로 죽가마끓듯 한다는것이였다.

판문점시찰소식을 듣고보니 보천보전투소식에 접하던 때의 격정이 되살아오르는것이였다.

보천보전투와 판문점시찰,그것은 다같이 민족사에 거대한 의의를 남긴 충격적인 사변들이였다.

겨레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고 재생의 희망마저 사라져가던 1930년대 중엽과 민족의 운명이 전쟁접경에로 치닫던 1990년대 중엽의 정세는 신통히도 흡사하였다.일제가 1선,2선,3선도 모자라 4선의 경비진을 쳤던 삼엄한 보천보와 적의 감시와 경계가 비길데 없이 조밀하고 군사적대치상태가 가장 첨예한 판문점은 다같이 위험지역중의 위험지역이였다.

적진을 불과 수십m 코앞에 둔 판문각로대에 나가시여 통일의 뢰성을 울리신 빨찌산아들의 모습은 그대로 일제경찰관주재소가 코앞에 보이는 황철나무아래에서 멸적의 신호총소리를 높이 울리신 빨찌산 김대장의 모습이였다.7천만겨레에게 통일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천명하신 우리 장군님의 영상은 짓밟힌 2천만동포에게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선언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영상 그대로였다.

보천보전투와 판문점시찰의 충격 또한 세상을 뒤흔드는 《메가톤급》이였다.

보천보전투를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주요신문들뿐아니라 《도꾜니찌니찌신붕》,《만주보》,《쁘라우다》 등 세계의 출판보도물들이 《톱뉴스》로 보도했듯이 판문점시찰을 국내외의 신문,방송,통신들이 앞을 다투어 대서특보로 전하였다.

일제가 보천보전투를 두고 《예상하지 않았던 너무나 큰 중대사건돌발에 흡사 후두부를 쾅하고 강타를 당한것 같다》,《천날동안 베여들인 새초를 한순간에 태워버린듯한 한을 남겼다》,《일생 잊지 못할 슬픈 기념일로 되였다》고 한탄했듯이 판문점시찰에 겁을 먹은 미제의 비명소리 또한 경악에 찬 곡성이였다.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측 비서장이였던 미군대령은 장군님의 판문점시찰보도를 접하는 순간 발밑에서 북조선의 원자탄이 터진것 같은 공포에 질렸다고 했다.펜타곤의 추궁을 받은 남조선주재 미8군사령관은 판문점에 나가있는 미군장교를 찾아 정형을 알아봤는데 그날따라 짙은 안개때문에 상황을 알수 없었다는 대답을 듣고는 북조선의 최고사령관은 립동도 지난 겨울에 안개를 몰고다닌단 말인가고 하면서 그 신비스러움에 또 혼절했다는것이였다.

나는 통쾌하기 이를데 없는 이 희소식을 비전향장기수동지들과 함께 나누고싶어 서울로 달려갔다.거기서 감옥에 면회를 다녀온 동지들로부터 아연실색하는 적들의 몰골에 대한 가슴후련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들의 말이 여느때엔 살기등등해서 못되게 굴던 교도관들이 기가 죽어 비실비실 피해다니더라는것이였다.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는데 간수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들어보니 우리 장군님께서 판문점을 시찰하시였다고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것이라고,휴전선콩크리트장벽이 금방 무너져내리는것 같다고,지금 청와대가 야단법석이라고 하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돌아치더라는것이다.그 몰골을 보니 0.75평의 좁고 어두운 감방안이 수만평의 대광장인듯 마음은 커지고 밝아졌다고 한다.굵은 쇠창살이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는듯 하고 감옥의 높은 담장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리는것만 같더라는것이였다.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에서 미국놈들을 때려눕힌 위대한 승리에 고지가 떠나갈듯 만세환호를 터치던 그때의 환희가 용솟음치더라는것이였다.

실로 《판문점충격》은 무비의 위력한 타격으로 서울과 워싱톤을 통채로 뒤흔들어놓았다.

위대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축지법》,《동성서격》,《신출귀몰》 등 항일빨찌산전설과 같은 수많은 전설을 낳아 남녘동포들을 통쾌감에 싸이게 했다.

무릇 전설이라고 하면 당대보다도 먼 어제날 뭇영웅들의 무훈담이 신비롭게 후세에 전해지는것이 일반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 장군님의 선군령도는 그 자욱마다가 다 현실속의 전설로,현대의 신화로 남녘동포들의 페부에 안겨들었다.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이후 북녘이 바라보이는 군사분계선근방을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속에 림진각에서는 통일운동단체들의 해맞이모임이 정례화되였다.

모임참가자들은 강산을 밝히며 솟아오르는 해님은 통일의 태양이신 김정일장군님이시라고 하면서 장군님께서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글을 써서 풍선에 실어 북녘으로 날려보내기도 했다.

위대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원쑤들에게는 멸적의 공포를 주고 겨레에게는 필승의 신심을 주는 영원한 충격파가 되여 오늘도 끝없이 메아리치고있다.



안개가 걷히면 밝은 태양이 누리를 찬란히 비치듯이 판문점의 흰안개는 통일의 려명으로 불타며 분렬의 암운을 가셔내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시고 이끌어오신 조국통일위업을 계승하여 우리 대에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려는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우리 인민의 혁명적의지이다.》

이 말씀에는 판문점에서 선언하신대로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유훈을 자신께서 책임지시고 선군으로 기어이 실현하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철석의 신념과 의지가 빛발치고있다.

판문점은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위업을 받들어오신 우리 장군님의 뜨거운 숨결과 거룩한 발자취가 력력히 어려있는 력사의 땅이다.

우리가 판문점에 갔을 때 들은데 의하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찌기 북남대화가 열리던 1972년에 이어 70년대에 여러차례 판문점을 찾아주셨다고 한다.

그 나날들에 장군님께서는 판문점에 나오면 하루빨리 분계선을 걷어내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더욱 굳어진다고 하시며 전사들에게 통일의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시였고 북남대화에서 착잡하게 얽히고 막혔던 문제들도 선견지명의 예지로 대번에 풀어주시였다고 한다.

조국통일을 생각하시는 장군님의 심중에서 한시도 떠난적 없었던 판문점,그래서 우리 장군님께서는 외세가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을 영영 거두어내실 의지를 안으시고 10년전 또다시 판문점을 찾으시여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을 지켜 기어이 조국통일을 이룩하실 설계도를 엄숙히 천명하시고 그 실현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던것이다.

장군님의 철석의 통일신념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 등 불후의 통일로작들에도 나래치고 통일전사들에게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도모하여 조국통일의 앞길을 열어나갈 방도를 밝혀주신 강령적가르치심에도 맥박치고있다.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바치시는 장군님의 거룩한 자욱자욱은 깊은 밤 슬피우는 새소리를 들으니 남녘동포들에 대한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하신 수령님을 그리시던 태양절의 그날에도 어리여있고 사랑하는 어머님을 추억하시며 조국통일은 수령님앞에 책임진 자신의 당면과업이라고 하신 절절한 말씀에도 깃들어있다.

통일을 위해 바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 위대한 애국애족의 헌신으로 이 땅에는 마침내 《우리 민족끼리》의 시대가 펼쳐졌다.

민족분렬이래 처음 있은 북남수뇌분들의 평양상봉은 삼천리강토와 5대륙을 새로운 위인충격으로 흔들어놓은 력사적인 대사변이였다.

그것은 선군의 길에서 일으킨 《판문점충격》에 이어 선군의 힘으로 안아온 《평양충격》이였다.

전세계가 《세기의 악수》로 대서특필하며 환희에 휩싸였던 6년전 6월의 그날,나는 평양비행장에 몸소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의 환하신 모습을 TV에서 뵈오며 판문각로대에서 남쪽을 굽어보시던 장군님영상을 그려보았다.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유훈을 실현하시기 위해 판문점에 소문도 없이 나오시여 온 세상에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키시고 마침내 평양상봉의 대사변을 안아오신 장군님에 대한 고마움을 진정할수 없었다.

남녘겨레들은 6월의 평양상봉에서 위대한 장군님의 확고한 민족자주사상과 투철한 통일의지,광폭의 겨레사랑을 보았으며 장군님이시야말로 조국통일을 안아오실 민족의 유일한 령도자이심을 재삼 확인하였다.

6월상봉이후 남조선은 《김정일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가는 곳마다에서 장군님의 잠바옷과 안경,인사법과 필체가 류행이였다.신문지면과 TV화면에는 장군님의 영상사진이 모셔지지 않은 날이 없었고 장군님에 대한 칭송기사가 실리지 않은 때가 없었다.이남땅은 온통 장군님 세상으로 변한것만 같았다.

그 경이적인 충격을 안고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판문점을 넘어서는 순간 눈앞에 바라보이는 판문각을 경건히 우러렀다.어버이장군님께서 저 로대에 서시여 우리들을 두팔벌려 어서 오라 정답게 불러주시는것만 같았다.아,장군님께서는 판문점시찰의 그날 온 세상을 격동시킬 이 귀환의 화폭도 다 내다보고계시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장군님의 품에 안겨 6년세월,우리는 《판문점충격》에 이은 《평양충격》이 낳은 오늘의 격동적인 《우리 민족끼리》시대에 사는 긍지와 행복에 넘쳐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선군정치,선군령도로 강력한 전쟁억제력을 마련하시여 새로운 《조선충격》으로 자주적평화통일의 보다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고 계신다.

조선반도의 평화를 수호하며 통일의 려명을 앞당겨오기 위해서는 군력을 다져야 한다.강력한 자위적전쟁억제력만이 조국통일의 기본장애물인 미국을 제압하고 평화통일의 넓은 길을 열어갈수 있다는것은 과학이고 진리이다.

조국과 인민을 위한 길이라면 그 어떤 험한 길도 걸으시는 우리 장군님,나라사정이 어렵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어려운 속에서도 쉬임없는 선군장정으로 오늘의 승리를 몸소 안아오신 김정일장군님 같으신 절세의 애국자,위대한 령수는 일찌기 없었다.

얼마전 한 일군으로부터 이런 가슴뜨거운 이야기를 들은바 있다.머나먼 전선시찰의 길에서 희붐히 동터오는 하늘가를 바라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수행일군들에게 시간을 물어보신적이 있었다고 한다.그때 새벽 5시까지는 3분이 남아있었다는것이다.

3분,끊임없이 오고가는 시간에서 3분은 대양의 물방울만큼 대수롭지 않은 순간이다.허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3분을 두고 깊이 생각하시며 우리에게는 1분1초를 소홀히 할 권리가 없다고,우리의 걸음에 조국의 전진이 달려있다고,선군시대에 시간은 생명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선군장정의 길을 재촉하시였다는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장군님께서 우리 나라를 강력한 자위의 강국으로 만드시기 위해 얼마나 정력에 넘쳐 선군장정의 길을 걸으시였는가를 생각하며 가슴을 적시였다.

백전로장은 결코 전장에서 포연과 더불어 한생을 보낸 장군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고 본다.

자신께서는 3살적부터 군인이였다고 하시며 일생을 군인으로 살겠다고 하신 말씀대로 수십성상 선군길을 이어오시며 인민군대의 자애로운 어버이가 되신 우리 장군님이시야말로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백전로장중의 백승로장이 아니시겠는가.

위대한 장군님께서 3분을 3년맞잡이로 귀중히 여기시며 선군의 길에서 1분1초를 그렇듯 무한한 헌신으로 불태워오시였기에 우리 조국은 화승대도 제대로 못 갖추어 나라를 빼앗겼던 100여년전의 치욕을 씻고 막강한 군사적억제력을 가진 강대국대렬에 당당히 들어서는 대충격을 일으킨것이다.

우리의 강력한 선군위력에 겨레가 환호하고 세계가 끓고있다.

일제통치시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 조직전개하신 항일무장투쟁에 의해 조국해방의 려명이 이 땅에 해방의 밝은 날을 안아왔듯이 위대한 장군님의 무적필승의 선군정치에 의해 통일의 려명이 마침내 삼천리강토에 통일강성대국의 찬란한 아침을 펼쳐놓게 될것이다.

7천만겨레가 위대한 선군령장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통일조국의 새시대를 마중할 력사적충격의 그날은 멀지 않아 오고야말것이다.

력사의 《판문점충격》은 통일의 려명을 부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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