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2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8일부 《로동신문》은 비전향장기수 리경찬의 글 《통일을 불러오는 위인의 새벽》을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새벽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족이 바라는 자주통일도 새벽이 있기마련이다. 민족적화해와 단합,통일의 새 력사가 펼쳐지고있는 오늘의 6.15시대는 과연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였던가.
나는 대결과 분렬의 검은 장막을 밀어내고 《우리 민족끼리》의 밝은 아침을 열어놓은 력사의 새벽,통일의 새벽에 마음을 얹으며 이 글을 쓴다.
1
조국의 품에 안긴 이후 나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활동력사를 담은 책자들을 많이 탐독했다. 그 모든 책자들은 다 심장을 울리고 가슴을 적시는 혁명의 위대한 교과서들이였다. 그 책자들에서도 소리없이 말해주는 새벽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의 가슴에 더 깊이 젖어들었다.
새벽길은 만경대가문이 대를 이어 걸은 거룩한 길이다.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였던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뼈가 부서지고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제와 끝까지 싸워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하시며 삼천리에 양춘을 안아오기 위한 독립투쟁의 길, 력사의 새벽길을 끊임없이 걸으시였다.
혁명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얻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찌기 이 진리를 터득하신 선생님께서는 동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밤길에 이어 새벽길을 걷고걸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에서 언젠가 아버님의 동지였던 오동진이 황해도지방으로 가다가 집에 들려 공영이라는 좋은 벽동사람을 만났다고 자랑하던 때를 회억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오동진의 말에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며 그 다음날로 짚신을 신고 길을 떠났다고,한달가량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어찌나 걸음을 많이 걸었는지 신총이 다 끊어져 너덜너덜했으나 아버지는 지친 기색이 없이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흐뭇해하였다고,나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고 감동깊게 회고하시였다.
동지가 그처럼 귀하고 조직이 그처럼 소중하기에 선생님께서는 국내각지는 물론 중국의 상해에까지 무수한 새벽길을 잇고이으시며 다녀오시였다. 그러다나니 사립문도 남먼저 새벽일찍 여시였고 바지가랭이는 늘 이슬에 축축히 젖어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동지들과의 회합을 위해 이슬덮인 잡관목들을 헤치시며 강동 봉화산에도 오르시였고 독립운동자들의 회의를 지도하시기 위해 새벽길을 걸으시여 의주군 청수동에도 가시였으며 새벽안개 자욱히 흐르는 압록강도 수없이 넘나드시였다. 일제교형리들의 악착한 고문으로 온몸이 찢겨졌으나 짓밟힌 겨레를 생각하며 감옥문을 나서시자마자 또다시 그 멀고 험난한 독립투쟁의 새벽길을 걸으신 선생님이시였다.
선생님께서는 새벽과 더불어 자신의 온넋과 육체를 깡그리 바치시여 《지원》의 새로운 사상도 천명하시였고 우리 나라 첫 반일지하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도 결성하시였으며 광범한 무산대중을 묶어세워 투쟁에 궐기시킬데 대한 독립의 새 방략도 제시하시였다.
실로 김형직선생님께서 한생토록 맞고 보내신 새벽이야말로 자기의 운명은 자기자신이 개척해야 한다는 민족운명개척의 철리를 밝혀준 자주의 새벽이였고 일제와 맞서싸우다 내가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쓰러지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기어이 독립의 아침을 열어야 한다는 의지를 안고 걸으신 위대한 헌신의 새벽, 혁명의 새벽이였다.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나라찾을 큰뜻을 품으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신 우리 수령님께서 맞고보내신 혁명의 새벽은 또 이루 헤아릴수 없다. 수령님께서 아슬아슬한 위험이 순간마다 뒤따르는 초기혁명활동시기에 맞으신 새벽은 그 얼마였고 항일무장투쟁시기 백두밀영의 모닥불가와 간고한 행군과 전투의 나날들에 맞고보내신 잊지 못할 새벽들은 또 얼마였는가.
지친 대원들을 잠자리에 눕히시고 자신께서는 나라가 해방된 다음 푹 쉬겠다고 하시며 조국해방의 새날을 위해 새벽이슬을 맞고 또 맞으시였다.
그렇게 맞으신 화전의 새벽에서 《ㅌ.ㄷ》의 기치가 휘날렸고 동강의 새벽에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 태여났으며 서강의 새벽이 보천보의 불길을 지펴올리고 백두산밀영의 그 새벽에서 마침내 조국해방의 새날은 밝아왔다.
세상에 혁명가,령도자는 많아도 우리 수령님처럼 한생에 새벽이슬을 그처럼 많이 맞으신 위대한 혁명가,령도자는 없다고 본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시였기에 새벽을 즐겨하시고 언제나 새벽에 사신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인민을 위한 수령님의 새벽에는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당시 대동군 원화리)에 깃든 감동깊은 일화도 있다.
1952년 5월 봄씨붙임계절을 맞은 농민들을 전시농업생산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시기 위하여 이른새벽 원화마을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녀맹위원장이 사는 농가로 가시였다. 농가에 이르신 수령님께서는 한참 생각하시고나서 단잠을 자는 사람을 깨우면 곤해할텐데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시며 집주인을 깨우지 말라고 이르시였다고 한다. 그러시고는 찬이슬 내리는 마당가에 눅눅히 젖은 짚단을 펴고 앉으시여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시였다는것이다.
전쟁의 운명을 한몸에 걸머지신 수령님께서 한 농민가정의 새벽잠을 위해 오랜 시간 바깥에서 찬이슬을 맞으시였으니 정말 우리 수령님은 인민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어버이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맞고보내신 새벽들에는 진눈까비 날리는 공장의 구내길도 있고 농장의 포전길도 있었으며 인민생활문제를 풀기 위해 걸으신 사랑의 새벽도 있고 조국통일을 위해 걸으신 헌신의 새벽,애국의 새벽도 있었다.
지금도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나라의 새벽문을 제일먼저 여시고 온 나라 가정에 행복의 밝은 아침을 안겨주시던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어려와 눈굽이 뜨거워지군 한다.
우리 조국의 새벽은 어버이수령님의 새벽이자 경애하는 장군님의 새벽이다.
김형직선생님께서 걸으시고 어버이수령님께서 걸으신 숭고한 애국의 새벽길을 이어 지금 이 시각에도 선군장정의 머나먼 길에서 새벽을 맞고보내시는 경애하는 장군님,
조국의 안녕과 인민의 행복을 위해 순간의 휴식도 없이 깊은 밤,이른새벽을 집무실에서 보내시고 전선길에서 맞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느해 겨울 새벽에는 자강도에 도착하시자마자 낮과 밤,새벽을 이어가시며 20여개 단위를 련이어 현지지도하시였다. 언젠가는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온밤을 밝히시며 쌓인 문건들을 보아주시였다.
또 언제는 새벽 6시에 잠간 쉬려고 자리에 누우셨다가 삼풍백화점붕괴사고로 재난을 당한 남조선인민들의 정상이 가슴아프시여 뜬눈으로 새날을 맞으시기도 하시였다고 한다.
새벽은 누구나 단잠을 자는 시간이다. 우리 장군님이신들 어찌 새벽의 단잠이 그립지 않으시랴.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조국을 생각하시고 겨레를 위하시기에 장군님께서는 비오는 새벽에도 야전차에 오르시였고 눈내리는 새벽에도 철령을 넘으시였다.
간고하고 시련에 찬 선군길에서 힘에 부칠 때마다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새벽공기를 마시면 좋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우리들처럼 새벽공기를 남먼저 마시는 사람은 많지 못할것이라고,새벽공기는 혁명가들이 남먼저 마시게 된다고, 힘겨워도 인민을 위한 선군의 길을 끝까지 가자고…
장군님께서 맞으신 새벽은 모두 조국을 위한 새벽이였고 인민을 위한 새벽이였으며 겨레를 위한 뜨거운 애국애족의 새벽이였다.
만경대가문의 대를 이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온몸으로 헤쳐가시는 력사의 새벽길에서 자주적인민의 존엄과 긍지가 꽃피고 후손만대의 행복을 위한 창조물들이 솟았다.
오늘 우리 조국이 제국주의의 그 어떤 침략도 막아낼수 있는 전쟁억제력을 가진 핵보유국이 되고 부강조국의 찬란한 려명을 마중하고있는 경이적인 사변은 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거룩한 새벽길에서 마련되고 펼쳐진것이다.
2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새벽은 통일의 새벽이기도 하다. 그것은 력사의 땅 판문점의 새벽이 웅변으로 말해주고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판문점을 시찰하시였다는 소식을 남쪽감옥에서 들었을 때 나는 놀랐다.
판문점은 나의 어린시절 추억이 깃들어있는 정든 고장이다. 지금의 황해북도 장풍군에서 나서자란 나는 어린시절 판문점에 자주 놀러 가군 하였다. 내 고향 월고마을의 화장산에 올라가면 아릿한 운무속에 그림처럼 판문점이 바라보인다. 그곳에 놀러 가면 개성에서 서울로,서울에서 개성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주막집에 들려 다리쉼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들이 참 이채로웠다.
그러던 판문점에서 지난 전쟁시기 우리 공화국과 미국사이에 정전담판이 진행된 때로부터 이곳은 온 민족이 알고 세계가 아는 고장으로 되였으며 전후에는 민족분렬의 산 현장으로 되였다. 여기에서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들이 진행되였고 미군에 의해 《판문점사건》과 같은 엄중한 도발사건들도 벌어졌었다.
그런 삼엄한 판문점에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친필이 새겨진 화강석비가 건립된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내가 조국에 와서 들은데 의하면 어버이수령님께서 불멸의 통일친필을 남기신것은 주체83(1994)년 7월 7일 새벽이였다고 한다.
위대한 80여평생을 조국과 겨레를 위한 혁명의 새벽으로 수놓아가시며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루셨고 미국의 무력침공을 물리친 전승의 기적도 안아오시였으며 자주,자립,자위의 주체조국도 마련하여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날 새벽에는 산책도 미루시고 집무를 보시였다.
시간은 새벽 4시 30분, 수령님 집무실에서는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일군이 방에 들어섰을 때 수령님께서는 부피두터운 문건을 한장 또 한장 번지시며 검토하고 또 검토하시였다.
마침내 문건을 마지막페지까지 완성하신 수령님께서는 미구에 도래할 대사변의 시각을 예감하시듯 문건에 활달하신 필체로 힘주어 쓰시였다.
《 김 일 성
1994.7.7.》
그러시고는 일군에게 확신과 신심에 넘친 어조로 우리 겨레가 일일천추로 고대하던 조국통일은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왔다고 말씀하시며 창가로 가시여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시였다.
이 문건이 바로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애의 마지막새벽에 보아주시고 비준해주신 조국통일과 관련한 문건이였다.
그렇게 조국통일을 위해 온 심혈을 다 기울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 다음날 새벽 2시에 위대한 심장의 고동을 멈추시였다. 이 뜻밖의 비보에 접한 장군님께서 너무나 크나큰 상실의 아픔과 절통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시며 수령님의 집무실에 들어서시였을 때였다.
책상우에는 수령님의 활달하신 친필존함이 모셔져있는 문건이 놓여있었다.
어버이수령님의 한생의 통일자욱이 어려있는 문건,그 문건을 보시는 순간 장군님께서는 더욱 비통함을 누르지 못하시였다. 그 문건을 완성하시기 전날 수령님께서는 전화로 장군님께 당의 의견을 받자고 한다고 하시며 북남관계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결심하시면 당에서는 그대로 할것이라고 말씀드리시였고 수령님께서는 그러면 당에서 승인한것으로 보고 활동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것이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나누신 마지막전화말씀이였다고 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해 바치신 수령님의 심혈이 그대로 어리여있는 마지막친필비준문건을 보고 또 보시며 이 력사적인 문건을 민족만대에 길이 전해갈 귀중한 국보로 잘 보관할데 대한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고 한다.
판문점언덕에 숭엄히 서있는 수령님의 통일친필비는 장군님의 그 숭고한 충정을 안고 오늘도 력사의 진실을 전하고있으며 통일을 갈망하는 겨레의 투쟁을 고무하고있다.
조국의 품에 안긴 후 일군들이 전해준 이 뜨거운 혁명일화는 력사의 새벽과 더불어 우리의 가슴에 오늘도 세차게 울려오고 래일에도 영원히 고동칠것이다.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100일 중앙추모회가 진행되던 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조국통일을 이룩하는것은 수령님의 유훈이며 온 민족이 통일된 조국에서 화목하게 잘 살도록 하시려는것이 수령님의 뜻이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령님께서 그처럼 바라시던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기어이 성취하여 수령님의 생전의 뜻을 꽃피워야 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통일의 새벽을 기어이 통일의 아침으로 이어놓으시기 위해 주체85(1996)년 11월 24일 새벽 3시 력사적인 판문점시찰의 길에 나서신것이다.
판문점에 근무하는 인민군군관들이 들려준데 의하면 장군님께서는 어둠속을 달려 판문점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문득 차를 멈춰세우게 하시였다고 한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일군들에게 그이께서는 이제 판문점에 들어가게 되면 단잠을 자는 병사들을 깨우게 되겠는데 그들이 잠에서 깨여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자고 말씀하시였다는것이다.
1분1초도 천금같이 귀중한 장군님의 시간이였지만 판문점의 초병들을 위해 오랜 시간 길가에서 11월의 새벽 찬이슬을 맞으신 장군님,가슴뜨거운 이 사연을 전해들었을 때 나는 이른새벽 원화리의 한 농민가정의 새벽잠을 깨우지 않으시려고 밖에서 찬이슬을 맞으셨던 어버이수령님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더욱 높뛰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날 새벽안개를 헤치시며 판문점을 찾으시여 뜻깊은 통일친필비앞에서 수령님의 통일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강령적인 말씀을 주시였다.
그래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온 겨레와 인류에게 커다란 격정을 일으킨 일대 사변으로 되였던것이다.
나는 남쪽의 감옥에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소식에 접하여 온 겨레가 커다란 신심과 고무를 받아안은 반면에 통일의 원쑤들은 공포와 절망에 빠져 갈팡질팡하는것을 직접 목격했다. 나는 거기에서 천만대적이 달려들어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으시는 장군님의 기상, 《백두산호랑이》의 위용을 읽었다.
그것이 나에게 백배의 힘을 주어 이미전부터 장군님을 경모하여 감방안에서 그려오던 《백두산호랑이》그림창작에 더욱 달라붙게 되였다. 교형리들의 눈을 피해 나무꼬챙이를 붓으로 삼아 그려오던 《백두산호랑이》는 그대로 백두산의 천출명장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라고 생각되였다. 그리고 그 기상을 그림에 바로 담으려고 모대기며 열과 성을 다 바쳤다.
나는 주로 간수들이 깊은 잠에 빠진 새벽에 그림을 그리여 드디여 완성하였다. 조국의 품에 안길 때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감옥에서 그린 《백두산호랑이》를 나의 온넋과 신념의 결정체로 안고왔다. 그래서 새벽은 나에게 남달리 정든 시간으로 되였다.
새벽은 또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에게 깊은 추억을 더듬게 한다.
우리가 남쪽의 차디찬 감방에서 새벽을 맞을 때마다 언제나 마음속에 그려보군 한것도 어버이수령님과 장군님의 자애로운 모습이였다.
어둠이 가셔지고 새벽이 오면 우리들은 교형리들의 모진 고문과 살인적인 전향강요를 또 하루 이겨내고 통일신념을 굳게 지켜냈다는 승리의 기쁨을 느끼며 새날의 투쟁을 마음속으로 준비하군 하였다. 밤은 깊어도 새벽은 반드시 오듯이 조국통일의 아침도 기어이 밝아오고야말것이라는것이 우리의 신념이고 믿음이였다.
그 새벽들에 조국을,수령님과 장군님을 그리군 하였다.
(우리 조국도 지금 새벽을 맞고있겠지. 우리 수령님은 지금 무엇을 하실가. 장군님은 이 새벽에도 집무를 보시겠지.…?)
그러면 마음은 한없이 격정에 부풀고 저도모르게 새 힘과 용기가 솟구치군 하였다.
우리는 모두가 조국의 새벽,수령님과 장군님의 새벽을 가슴에 안고 싸움에서 이기고 또 이겼다. 이렇게 새벽의 힘으로 전향도 물리치고 마침내 승리하여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수 있었던것이다.
나는 오늘 6.15자주통일시대의 새벽은 판문점의 새벽과 이어져있다고 말하고싶다.
판문점의 새벽이 있어 굳게 닫겨있던 분계선에는 마침내 래왕의 길,통일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장군님께서 열어주신 그 길로 맨 먼저 행운의 걸음을 옮긴것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였다.
분렬의 《장벽》이 판문점을 가로질러가 북으로 가고싶어도 갈수 없었던 남녘겨레들이였고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였다.
판문점 중앙분리선을 넘어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친필비앞에 서니 4년전 새벽안개를 헤치시며 판문점을 찾으시였던 장군님의 거룩한 모습이 안겨와 가슴은 더욱 크게 들먹이였다.
지금도 나는 판문점을 찾을 때면 대결과 분렬의 상징을 화합과 통일의 상징으로 바꾸어놓게 한 력사의 그 새벽을 생각하고 장군님을 생각하군 한다. 판문점의 새벽에 천명된 선군령장의 통일의지를 되새기며 통일애국위업수행에 여생을 다바쳐갈 결의도 가다듬는다.
세상에 새벽은 많아도 만경대가문의 새벽처럼 성스러운 새벽은 없다. 숭고하고 위대한 모든것이 만경대가문의 새벽에 함축되여있고 그 새벽에서 탄생하고있다.
만경대가문의 새벽에서 조선혁명의 새 력사가 시작되였고 조국의 새아침이 밝아왔으며 민족의 창창한 래일이 열리고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걸으시는 선군의 새벽은 머지 않아 이 땅우에 통일강국의 아침을 기어이 안아오고야말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