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2월 11일발 조선중앙통신)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연구집단이 최근 고려시기의 왕궁인 대화궁터유적을 새로 조사발굴하였다.
대화궁은 조선력사에서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가 수도를 개성(당시 개경)으로부터 평양 (당시 서경)으로 옮기기 위하여 건설한 왕궁이다.
평양을 매우 중시한 태조 왕건은 유언인 《10가지훈요》에서 서경이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만대왕업의 기지》라고 하면서 고려의 모든 후계왕들은 매해 일정한 기간 평양에 가서 정사를 보아 왕실의 번영을 도모하도록 부탁하였다.
이로부터 고려는 여러차례 수도를 개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기려고 시도하였으며 12세기전반기 인종왕때에는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 1동에 왕궁을 짓고 그것을 《대화궁》이라고 이름지었다.
대화궁터는 해발 160m되는 산봉우리를 진산으로 하고 거기에서 좌우로 뻗어나간 2개의 릉선과 그 사이에 있는 짧은 릉선으로 이루어진 묘한 위치에 자리잡고있다.
성벽의 길이는 3km이며 총부지면적은 55만㎡이다.
궁성안에는 제1궁전구역과 제2궁전구역으로 이루어져있다.
왕이 신하들을 만나 모임을 가지고 연회를 베풀며 정사를 하던 곳으로 보는 제1궁전구역에는 정면길이 50m, 측면너비 46.5m, 길이 46m, 너비 20m되는 2개의 건물터가 있다.
1궁전구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3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제2궁전구역에는 4개의 건물터와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한개의 건물터가 있다.
중심건물로 보이는 3호건물터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한 형식으로 되여있다.
크기가 정면길이 71m,측면너비 40m정도되는 이 건물터는 좌우에 나래채가 달린 큰 규모의 중심건물이 있고 건물전체를 둘러막은 회랑,중심건물과 이어지는 회랑들이 질서있게 배치되여있으며 바닥에는 벽돌이 규모있게 깔려있고 둘레의 회랑선을 따라 배수시설이 정연하게 갖추어져있다.
이 건물터의 중심건물 량옆에 약간 낮은 지면을 형성하고 나래채들을 곁붙여 지은 형식은 고구려시기부터 전해오는 건축형식이다.
궁전구역들에서는 많은 유물들도 발견되였는데 건물우에 설치되였던 룡대가리와 괴면을 형상한 잡상 그리고 자기,도기쪼각들, 철제품들이다.
그중에는 꽃잎을 형상하고 《대산명수》라는 글이 새겨진 암기와막새와 꽃잎,넝쿨,괴면무늬가 새겨진 수기와막새들도 있다.
특히 쇠로 만든 기와쪼각도 나와 주목을 끌고있다.
이번의 대화궁터유적발굴은 평양의 력사와 지위, 고구려와 고려와의 계승관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고려시기 건축양식과 유물연구를 하는데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지금까지 발굴된 왕궁터유적들은 고구려의 안학궁터, 발해의 상경룡천부, 고려의 만월대였는데 여기에 대화궁터유적이 합쳐지게 됨으로써 또하나의 민족의 재부가 늘어나게 되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