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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추악한 력사외곡책동을 단죄한다-조선중앙통신사 비망록
(평양 5월 10일발 조선중앙통신)지난 세기 야만적인 살륙전쟁과 군사적강점통치로 조선과 아시아나라들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애하고 인민들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일본에서 오늘 피로 얼룩진 과거사를 부정하는 반력사적행위가 로골적으로 벌어지고있다.

아베내각 출현후 국제사회의 보편적력사인식에 정면도전한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은 정부당국자들이 직접 나서서 조직적으로 감행하는것으로 하여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있다.

수상과 외상 등 정계가 공식적으로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사실을 부정하고 사회계, 언론계, 교육계가 한동아리가 되여 력사외곡에 가담함으로써 전 일본사회가 국수주의,복수주의의 탁류에 휘말리고있다.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은 침략과 략탈의 과거사를 재현하려는 21세기의 위험천만한 반인류적범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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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력사외곡책동에서 주목되는것은 과거침략사에 대한 전면외곡이다.

일본반동들은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통치와 침략행위를 《합리화》하고있다.

무엇보다 일제의 조선강점진상을 악랄하게 외곡하고있다.

2003년 10월 28일 도꾜도 지사 이시하라는 1910년의 《한일합병》에 대해 언급하면서 《결코 무력으로 침공한것은 아니며 오히려 조선반도가 분렬되여 안정되여있지 않기때문에 결국 그들(조선인)의 총의로 같은 피부색을 가진 일본인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합병이 이루어졌다.》고 력설하였다. 10월 31일에는 1920년대에 창설된 국제련맹을 꺼들면서 《그때 국제련맹도 있었지만 누구도 일본을 비방하지는 않았다.》는 상식밖의 망언을 하였다.

2003년 자민당의 가메이파 회장 에또 다까미는 유엔이 1945년에 발족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병》은 《량국이 조인하였으며 유엔이 이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때로부터 90년이 지났는데 어찌하여 식민지지배로 된다는것인가.》고 떠들었다.

일제의 죄악중에서 가장 큰 죄악은 국권강탈이다.

1868년 《명치유신》후 《일본의 번영과 <천황>국가를 위하여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하여야 한다》는 《정한론》을 정책화한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수많은 헌병들로 조선왕궁을 포위하고 대신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강도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해냈다.

일본반동들은 《을사5조약》을 비롯한 구《조약》들이 구조선정부의 동의밑에 《합법》적으로 체결되여 당시 유효하게 실시되였다고 주장하고있으며 일부 어용학자들은 그것들이 국제법적으로는 《적법》성을 띠고있다고 맞장구를 치고있다.

2001년 당국이 검정통과시킨 중학교력사교과서는 수세기에 걸쳐 감행한 일본의 조선침략과 군사적강점을 심히 외곡서술하고있다.

력사교과서는 조선침략과 지배를 력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미 허위성이 드러난 《미마나미야께》설을 되풀이하였다.

일본이 4세기이후 수백년동안 조선의 남부지역에 성립된 가야(임나-미마나)에 《일본부(미야께)》를 설치하고 지배하였다는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한개 지방정권에 불과하였던 기내 야마또정권을 통일정권으로 묘사하였으며 이 정권이 조선에 출병하여 남부지역을 지배한듯이 외곡하였다. 일본력사의 《우수성》을 인위적으로 강조하고 그 비교, 방증대상으로 조선력사를 꺼들면서 조선력사는 예속의 력사이고 조선민족은 력사적으로 《속국》의 운명에 놓여있은듯이 서술하였다.

교과서는 또한 《임진왜란》개시를 《조선에로의 출병》,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씀으로써 침략을 분식하였다. 지어 일제의 군사적강점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면서 식민지지배의 《합리성》을 주장하였다.

일본각지에 건설된 《평화박물관》들에는 당국의 지시에 의해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자료들만 전시되여있다.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전대미문의 범죄행위들에 대한 미화분식은 과거침략사를 가리우기 위한 력사외곡행위이다.

일제는 군사적강점통치기간 840만여명의 조선청장년들을 랍치, 강제련행하고 100여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였으며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끌어갔다. 그리고 근 400t에 달하는 금을 비롯하여 1,798만t의 철과 3,000만㎥의 목재, 3,900만t의 쌀 등 귀중한 부원을 닥치는대로 강탈하였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이 모든 범죄가 미화분식되고있다.

1995년 총무청장관 에또는 일본이 조선에서 《좋은 일도 하였다》는 파렴치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력사교과서들에서는 조선인강제련행을 《조선인들의 자발성에 의한것》으로 오도하고있다.

정부가 최근에 발표한 《아시아태평양전쟁시에 <치시마>에로의 조선인련행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서》에서는 《다이헤이마루》사건의 희생자수를 극력 줄여 집단학살만행을 가리우려 하였다.

력사교과서들은 반일의병과 독립운동자들에 대한 학살, 1919년 3.1인민봉기와 1926년 6.10만세운동, 1920년 《경신년대토벌》, 1923년 간또대지진시 감행된 조선인 대학살만행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있다.

일제는 강점기간 《조선력사가 남아 있게 되는 경우 일본이 조선력사를 수용하였다는것이 남아 있게 되므로 조선력사를 진멸하여 버림으로써 그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는것이 좋다》는 강도적론리에 기초하여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려하였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고전에 대한 수색작전을 벌리고 수백명의 일본《학자》들을 조선의 방방곡곡에 들이밀어 헤아릴수 없이 많은 고서적들을 빼앗아갔으며 조선력사를 기록한 력사문헌들을 《불온도서》라고 하면서 20여만권이나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략탈해간 문화재는 도꾜국립박물관에 진렬된 조선문화재 4만여점을 비롯하여 고려자기, 민족고전 등 수십만점이 된다.

일본에서 발간된 《고적조사보고》는 조선의 시조릉인 단군릉을 비롯하여 고려태조릉 등 고려의 력대 왕릉들이 1910년대에 이르러 일제에 의하여 단 1기도 남지 않고 모조리 도굴되였다고 서술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문화와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감행해온 모든 죄행을 분식하고있다.

2002년부터 사용되고있는 중학교력사교과서를 비롯한 력사교과서들에서 우리의 민족고전을 소각하고 략탈하여 조선을 문헌의 참화지대로 만든 죄행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고있다.

2003년 5월 31일 당시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였던 아소는 《조선사람들이 이름자를 달라고 한것이 <창씨개명>의 첫 시작으로 되였다.》, 《한글문자는 일본인이 가르쳤다. 력사적사실을 옳게 인식하는것이 좋다.》고 망발하였다.

문부과학성에 제기되였던 2005년도 중학교력사교과서 신청본에서도 《창씨개명》이 마치 조선사람들의 《희망》에 의해 이루어진것으로 서술하였다.

2005년 문부과학상 나까야마는 교육에서 기본은 령토위치에 대해 가르치는것이라고 하면서 독도가 《일본의 령토》임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최근에는 정부가 2007년부터 사용될 고등학교 교과서들에 독도를 《일본령토》로 서술할것을 지시하였다.

독도를 《일본땅》으로 표기한 《독도우표》가 발행되였으며 교과서들과 책들도 출판되여 나돌고있다.

일본은 대륙침략행위를 미화분식하는 력사외곡행위를 감행하고있다.

2001년 검정통과된 력사교과서와 2005년 《새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행한 개정판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과 로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자위전쟁》, 《해방전쟁》으로 미화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의 《최대피해자》가 일본인것처럼 꾸미였다.

2002년 10월에 발행된 《자습용문제집》은 《일본의 전쟁리념》이 《각국의 자주독립》과 《인종차별철페》에 있었다고 서술하여 일본인에 의한 세계통치의 정당성을 합리화하였다.

2001년 2월 18일 이전 방위청장관 노로따는 일본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벌린 《군사깜빠니야는 아시아를 식민주의에서 해방하는데 기여한것으로 여전히 평가받고있다.》고 망발하였다.

집권자민당이 작성하여 국회에 제출한 《전후 60년 국회결의안》에서는 일제의 아시아나라들에 대한 《식민지지배》와 《침략행위》라는 표현을 모두 빼버렸다.

《국민의 력사》와 같이 침략사를 찬양한 위험한 책들이 출판보급되고있으며 《자존-운명의 순간》과 같이 전범자들을 극구 찬미하는 영화, 록화물들이 제작방영되고있다.

1950년대중엽 은페,축소로부터 시작되여 계단식으로 전면외곡, 부정, 찬양, 확대에로 이어지고있는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은 단순히 학술상 오유나 력사인식의 부족에 기인된것이 아니라 당국과 집권세력의 조장, 묵인하에 감행되는 일대 정치사기행위이다.

2001년 4월 3일과 2005년 4월 5일, 2006년 3월에 문부과학성은 과거침략사를 외곡, 미화분식한 력사교과서들에 《합격》도장을 눌러 발행하도록 하였으며 2007년 3월 30일에는 고등학교들에서 사용할 력사교과서들에서 반인륜적범죄들을 삭제하거나 외곡하여 서술할것을 지시하였다.

력사외곡책동과 관련한 다른 나라의 항의와 규탄을 《내정간섭》으로, 《헌법침해》로 걸고있으며 외무성을 비롯한 당국이 외곡된 력사교과서의 재수정을 반대한다는 립장을 표명하고있다.

여야정치인들과 재계, 언론계 등 광범한 배후세력이 력사외곡책동을 정신물질적으로, 재정적으로 적극 성원하고있다.

최대후원세력은 력사외곡을 목적으로 1997년에 조직된 극우익단체인 《일본의 전도와 력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이다.

자민당은 1993년 8월 105명의 《유명인》들로 구성된 《력사검토위원회》를, 1996년 10월에는 교과서들에서 반일적색채를 없앨 목적으로《교육문제에 관한 기획팀》을 공식 발족시켰다.

국회의원 240여명이 망라된 《일본회의》가 외곡된 력사교과서편찬사업에 거액의 자금을 대주고있으며 100여개의 기업체와 《산께이신붕》을 비롯한 언론기관들이 든든한 후원자로 나서고있다.

일본에서의 력사외곡의 본격화는 국민들속에 군국주의적력사관과 복수주의적감정을 주입하고 재침을 위한 국내의 사상정신적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있다.

2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에서 간과할수 없는것은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에 대한 전면부정이다.

1996년 6월 4일 자민당소속 중의원의원 오꾸노는 제2차세계대전시기 정부가 일부 아시아나라 녀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모집한것은 《결코 정부의 강압적인 처사가 아닌 상적행위》라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망발을 꺼리낌없이 늘어놓았다.

《새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리사 사까모또는 《<위안부>력사는 화장실력사》라고 줴치면서 녀성을 성노예, 성도구로 삼았던 일제의 녀성멸시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내였다.(남조선통신 《련합뉴스》, 2001년 4월 13일)

1996년 4월 6일 일본당국은 유엔인권에 관한 위원회 제52차회의에서 일본군《위안부》범죄를 합리화하는 《녀성폭행에 관한 특별보고자의 보고서에 대한 일본정부의 견해》라는 문건을 제출하였다.

문건은 국제법을 꺼들어 《성문화된것이 없다》고 하면서 《위안부》범죄가 국제법위반이 아니며 따라서 일본정부에 범죄자적발, 기소, 처벌과 관련한 법적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2005년 8월 외무성은 일본군성노예문제는 관계국들과의 일괄처리협정에 의해 법적으로 다 해결되였다는 립장을 다시 드러내였다.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범죄에 대한 부정은 아베내각하에서 더욱 집요하고 악랄하게 감행되고있다.

올해 3월 1일 수상 아베는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위안부》강제동원사실을 립증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하였으며 5일 국회 참의원예산위원회에서 미국회에 제출된 성노예범죄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된다해도 절대로 사죄하지 않을것이라고 하였다.

외상 아소는 2월 중의원예산위원회에서 일본정부가 《위안부》문제에 관해 명확히 사죄할것을 요구한 결의안이 미하원에 제출된것과 관련하여 《객관적사실에 기초한것이 전혀 아니다. 매우 유감스럽다.》고 하면서 불만을 표시하였다.

3월 25일 내각관방부장관 시모무라는 종군간호부나 종군기자는 있었지만 《위안부》는 없었다, 일본군이 《위안부》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력설하였으며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은 《위안부》범죄를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한 고노내각관방장관의 담화가 명백하지 않고 오해를 초래하는 등 잘못된것이라고 하였다.

《일본의 전도와 력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은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정부의 공식견해로 채택할것을 당국에 요구하였으며 일본군《위안부》범죄와 관련하여 1993년 고노내각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를 《재검토》하겠다고 나섰다.

이 《담화》는 일본군《위안부》범죄가 구일본정부와 군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반인륜죄행이라는것을 부정해오던 정부가 저들의 책임을 립증하는 증거자료들이 발견되고 국제사회의 비난과 추궁이 높아지자 마지못해 《사죄와 반성의 심정》을 표명하면서 군부의 관여와 강제성을 공식 인정한것이다.

그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 현 집권세력이 불충분하게나마 인정하였던 《담화》에 대한 《재검토》를 떠들고있다.

《재검토》를 맨 앞장에서 들고나온 현 내각관방부장관 시모무라와 《일본의 전도와 력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 회장 나까야마는 력사교과서에서 《<위안부>나 강제련행소리가 줄어들어 좋다》, 《<위안부>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등의 망언을 한 극우익정치인들이다.

이런 인물들이 주도하는 《재검토》가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을 전면부정하고 그 반인륜성을 약화시키거나 백지화하리라는것은 명백하다.

3월 16일 정부는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그 무슨 답변서라는데서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는 일본군이나 경찰에 의한 《위안부》 강제련행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산께이신붕》 4월 8일부는 일본군이 《위안소》의 성병검사 등에 관여한 일은 있어도 노예사냥과 같은 강제련행을 직접 감행한 일은 없었다고 하면서 당국의 력사외곡에 합세하였다.

일본반동들은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범죄의 실상을 가리우려고 비렬하게 책동하고있다.

그 하나가 2001년 1월 NHK TV방송이 만든 《녀성국제전범법정》을 다룬 련속편집물 《전쟁을 어떻게 재판하겠는가》의 속편 《따져지는 전시성폭력》의 내용이 방영직전에 우익보수정객들의 압력에 의해 일본의 전쟁책임을 가리우는 방향에서 대폭수정된것이다.

아베를 비롯한 정부당국자들에 의해 편집물은 일본군성노예범죄에 대한 이전 일본군인의 가해증언과 피해자들의 증언은 물론 《천황》 히로히또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일본의 국가적책임을 선언한 장면까지 빼버리고 《법정》을 비난하는 우익반동들의 발언을 첨가한 얼뜨기작품으로 되고말았다.

그러나 범죄의 력사는 절대로 덮을수 없다.

일제가 관권과 군권을 동원하여 여러 나라 녀성들을 침략전쟁터에 강제로 끌고가 비인간적인 성노예생활을 강요한 사실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수많은 피해자들과 증견자들의 증언, 당시의 관헌문서들, 《위안소》에 드나들던 구일본군 군인들의 자백에 의해 명백히 밝혀지고있다.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풍곡동에서 발견된 《위안소》건물은 구일본군 조선주둔 라남 제19사단이 편성초기부터 《위안부》강제련행에 가입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1992년 11월 17일 영국주간잡지 《에코노미스트》는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에 당시 내각 수상이며 륙군상이였던 도죠가 관계한 자료를 밝히는 1942년 3월 12일부로 된 전시전보를 공개하였다. 전보는 대만주둔 《황군》사령관이 도죠에게 보낸것으로서 거기에는 《남방의 군본부로부터 50명의 <위안부>들을 브루네이에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은것과 관련하여 나는 헌병에 의해 선발된 다음의 3명의 인물들을 <위안소>관리인으로 파견하도록 허락해줄것을 당신에게 요청하는바이다.》라고 씌여있었다.

구일본군에 의한 일본군《위안부》의 조직적인 관리가 정부가 발표한 1936년보다 3년 앞선 1933년부터 시작되였음을 밝히는 새문서도 일본문서관에서 확인되였다.(남조선《MBC》방송, 1992년 12월 6일)

문서는 구일본군 혼성 제14려단사령부가 만주에 진출했을 때 작성한 위생업무기록 34편과 《위안부》건강관리기록 등 모두 48편 1,000여페지에 이르는 상세한 자료이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에 직접 관여하였으며 그 지시로 아시아각지에 《위안소》가 조직되였다는것을 밝힌 당시 륙군성간부의 업무일지가 《일본의 전쟁책임에 관한 자료쎈터》대표인 아라이교수에 의해 공표되였다.(《마이니찌신붕》, 1993년 7월 27일)

중국에 있던 일본수비대가 1944년에 발표한 《위안소》리용에 관한 《병사구락부규정》에는 군부가 위생관리 및 재정유지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여있었다.(UPI통신, 1992년 6월 25일)

제2차세계대전종결당시 구일본군 제117사단장이였던 스즈끼는 《위안소》설치를 3차례에 걸쳐 명령하고 조선과 중국녀성 총 140명을 《위안부》로 강제련행한 사실을 진술하였다.

일본군《위안부》강제련행책임자의 한 사람이였던 요시다 세이지는 《명백히 할것은 일본군<위안부>들을 모집한것이 아니라 강제로 랍치하였다는 점이다. <위안부>모집에 자발적으로 응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고 증언하였다.(《도꾜신붕》, 1998년 4월 5일)

일본의 간또가꾸잉대학 교수 하야시 히로후미는 올해 4월 17일 외국특파원협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 새자료 7점을 발표하였다.

자료들은 일본군점령지에서의 잔인한 행위에 관해 각국 검찰당국의 노력으로 방대한 량의 증거서류들이 준비되고 제출된데 대하여 밝히고있다.

구일본군병사들인 고야마와 사까꾸라가 4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제2차세계대전시기에 감행된 성노예범죄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배치되는 부대마다 《위안소》가 있었다고 하면서 《위안소》설치는 군부의 명령없이는 실현될수 없는것이였다고 고백하였다. 지어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는 군수품을 수송하는 마차를 리용한 이동식《위안소》까지 설치되였다고 하면서 후에 《위안부》들이 강제련행되여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증언하였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강제동원을 립증하는 네데를란드정부 비밀문서가 얼마전에 공개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인도네시아에 파견되였던 네데를란드장교가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 반영된 자료들은 일본군이 《위안부》강제동원에서부터 《위안소》운영에까지 전면개입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여러 나라의 국가문서들과 피해생존자들,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일제의 천인공노할 죄악이 계속 드러나고 그에 대한 법적책임이 론의되고있지만 일본의 현 집권세력은 력사외곡책동에 더욱 집요하게 매여달리고있다.

* *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은 과거청산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고 일본사회의 사상정신적반동화를 추동하여 침략의 력사를 재현하려는 엄중한 범죄행위이다.

지금 일본은 력사를 망각한 정치인들과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들뜬 우익반동세력에 의해 해외침략정책수행의 길로 거침없이 나가고있다.

전쟁방지를 규제한 《평화헌법》은 이미 사멸되고 《자위대》가 공격형무력으로 전환되였으며 국가체제가 전시체제로 개편되여가고있다.

날을 따라 일본에 의한 전쟁위험이 커가고있으며 조선반도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은 엄중히 위협당하고있다.

20세기를 침략전쟁과 대학살만행, 최대의 집단강간행위로 더럽히고도 그것을 력사의 흑막속에 묻어버리려는 일본반동들의 력사외곡책동에 세계는 각성을 높여야 한다.

일본이 추악한 력사외곡행위에서 끝끝내 손을 떼지 못한다면 21세기 인류사에 또다시 수치스러운 죄악을 남길것이며 국제적고립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주체96(2007)년 5월 10일
평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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