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4월 16일발 조선중앙통신)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생전에 인민들과 함께 있을 때가 제일 기쁘다고, 이 세상 제일 큰 락이라고 하시며 한평생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언제나 인민들속에 계시였다.
온 나라 방방곡곡의 헤아릴수 없이 많은 공장들과 농장들을 비롯하여 그 어디에나 주석의 발자취가 어리여있다.
c그 길에는 자동차가 다닐수 없는 머나먼 산촌의 오솔길도 있고 총폭탄이 울부짖는 전선길,눈비내리는 진창길도 있었지만 주석께서는 인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 할것없이 다 찾아가시였다.
인민을 위한 그이의 헌신의 로고는 평안남도 온천군 간석지벌에도 깃들어있다.
주체49(1960)년 6월 3일 온천군의 간석지를 찾으신 주석께서는 발을 옮겨딛기가 어려운 간석지가 시작되는 뚝에 올라서시였다.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곳을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좀 더 나가보자고 말씀하시였다.
뚝앞으로는 그 험한 길마저도 없어 일군들이 그이께 더는 가실수 없다고 말씀올리자 주석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괜찮다고, 인민을 위한 길인데 무엇을 가리겠는가고 하시며 길없는 간석지로 걸음을 내짚으시였다.
주석께서는 신발이 감탕속에 쑥쑥 빠지는것도 아랑곳없이 진펄에 오래도록 서계시면서 간석지를 개간할 방도와 문화주택구역까지 정해주시였다.
인민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이어진 주석의 현지지도의 길에 꽃펴난 수많은 이야기들중에는 평양방직공장이 훌륭히 꾸려지게 된 가슴뜨거운 사연도 있다.
1949년 여름 어느날 강원도 법동군의 한 산간마을을 현지지도하시던 주석께서 마을로인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주석의 겸허하고 한없이 소탈하신 풍모에 매혹된 한 로인이 그이께 제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 쌀독을 가득 채우고 이 심심산골에도 학교가 생겨나 자식들을 공부시켰으면 하던 소원도 다 풀리고보니 이제는 나들이옷 여벌과 이부자리가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솔직히 말씀올리였다.
그 로인의 진심이 담긴 말을 나무람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신 주석께서는 수첩을 꺼내시여 마을의 인구수와 요구되는 천의 량을 계산하시였다.
주석께서는 평양에 돌아오신 그길로 해당 일군들을 부르시여 로인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시면서 막대한 돈을 더 투자하여 평양방직공장의 방추수를 당초에 예견했던 3만추가 아니라 6만추로 하자고 결연히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한창 건설중이던 평양방직공장이 배나 더 크게 확장되는 사변이 일어나게 되였다.
새 사회건설의 첫날부터 위대한 생애를 마치신 그날까지 무려 57만 8,000여km에 달하는 주석의 현지지도로정, 이 불멸할 길은 세기와 더불어 길이 빛나며 전해질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