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기사 달력>>2009년 6월 18일기사 목록
로동신문 《일본의 뿌리깊은 랍치범죄》-임진조국전쟁
(평양 6월 18일발 조선중앙통신)18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일본의 뿌리깊은 랍치범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 일본반동들이 《랍치문제》를 거들며 반공화국소동에 미쳐날뛰고있다. 사실 일본은 《랍치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으며 그럴 처지에 있지 못하다.

랍치문제는 우리가 일본에 따지고 계산하여야 할 문제이다. 랍치는 일본의 타고난 기질적범죄이다. 력사적으로 놓고볼 때 랍치문제에서 일본은 가해자이고 우리는 피해자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들을 랍치해간 범죄국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진행된 임진조국전쟁은 일본이야말로 력사에 류례없는 극악한 랍치국가이라는것을 그대로 실증해주고있다.

당시 조선침략의 괴수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지휘하에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일본사무라이들은 무고한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하는 한편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련행, 랍치하여 일본으로 끌어갔다. 그들은 조선사람들의 목을 바줄로 매고 발에는 족쇄를 채워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면서 짐운반과 성쌓기, 길닦이와 물길파기, 황무지개간과 같은 고역에 내몰았다.

일본사무라이들이 얼마나 많은 조선사람들을 강제련행, 랍치하여갔는지 일본의 한 력사가도 《조선서교사》라는 책에 《…7년간에 걸치는 조선역(조선전쟁이라는 뜻)은 한 측면에서 보면 <사람사냥>전쟁이였다.》라고 썼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사무라이들은 무엇보다도 기술인재들을 강제련행, 랍치하여 일본으로 끌어가는데 기본을 두었다. 이것을 직접 지시한것은 도요도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자기 졸개들에게 보낸 《명령서》라는데서 《조선인을 잡아두었다가 세공을 하는자 그리고 봉관(옷만드는 사람), 재간좋은 녀자가 있거든 진상》하라고 지시하였다.

도요도미의 지령에 따라 일본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의 곳곳에서 《사람사냥》에 미쳐돌아갔다.

그 대표적실례가 바로 조선인도공들을 강제련행, 랍치하여 일본으로 끌어간것이다. 당시 일본사무라이들은 일본에서 《야끼모노(도자기류의 총칭)전쟁》이라고 전해질 정도로 우리 나라에서 수많은 도자기들을 략탈해가는것과 함께 많은 조선인도공들을 강제련행, 랍치하여갔다. 남원에서만도 박평의, 심당길 등 43명의 도공들이 강제련행, 랍치되여 끌려갔다.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제련행, 랍치되여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나라 도공들은 외진 곳의 가마터들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수십년, 지어 대를 이어가며 도자기제조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얼마나 많은 조선사람들이 랍치되여갔는지 사쯔마에만도 한개 거리가 통채로 조선사람들의 살림집으로 이루어졌고 성씨만 하여도 17가지나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쯔마사람들은 이 거리를 가리켜 고마거리(고려거리)라고 불렀다. 그때로부터 수백년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지방에서는 가마터에서 쓰는 기술용어들이 여전히 조선말로 사용되고있다고 한다. 그들은 만리타향에 끌려가 고역살이속에서 한생을 보냈으며 죽을 때도 고향산천을 그려보며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다. 이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사실이다.

임진조국전쟁이 끝난 후 일본 서남부의 여러 지역들에서는 《사쯔마야끼》, 《아리따야끼》, 《이마리야끼》, 《가라쯔야끼》 등으로 불리운 도자기문화들이 발전하게 되였는데 이것도 다 강제련행, 랍치되여간 조선인도공들의 고역에 의하여 마련된것이였다.

일본사무라이들은 도공들뿐아니라 유학자들과 중, 의사와 화가, 건축가는 물론 활자, 인쇄, 수예 및 방직부문의 수많은 기술인재들을 강제련행, 랍치하여 일본으로 끌고가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그들은 강제련행, 랍치한 조선사람들을 다른 나라에 팔아넘기기도 하였다. 외국인목격자들이 남긴 단편적인 자료들에 의하더라도 당시 나가사끼, 오무라, 히라또 등 일본의 여러곳에서 노예매매가 성행하였다. 거기에서 노예상인들에게 넘어간 조선인들은 인디아서부해안의 고아시에 있던 노예시장을 통하여 인디아 각지는 물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까지 팔려갔다.

일본사무라이들은 랍치한 조선사람들을 유럽에도 눅거리로 팔아먹었다. 이에 대해 에스빠냐상인 아비라 히론은 일본인노예상인들이 《왕국에도 포로를 만재한 많은 배를 몰아왔는데 내가 본 포로는 실로 눅은 값이였다.》라고 하였으며 이딸리아사람인 프란체스꼬 카를렛티는 나가사끼에 갔다가 5명의 포로를 샀는데 이때 포로 한명은 은 24몸메 즉 쌀 2석 4두의 값으로서 당시 진귀한것으로 치던 비누값으로 환산하면 겨우 2장분에 해당한것이였다고 하였다. 유명한 화가 루벤스(1577-1640년)가 그린 《조선옷을 입은 사나이》라는 그림의 주인공청년은 카를렛티가 이딸리아에 데려간 조선사람이였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사무라이들이 감행한 만행중에서 가장 흉악무도한것은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랍치하여 성노예로 삼은것이다.

일본침략군안에서 벌어진 《녀자사냥》은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감행된것이였다. 이자는 1592년 11월 29일 전쟁터에 있는 왜장들에게 《손재주있는 조선녀자들을 골라보내라》는 《의뢰장》을 보냈다. 이 《의뢰장》이라는것은 이름을 바꾼 명령서였고 《손재주》를 운운한것은 한갖 허울에 지나지 않는것이였으며 실제로는 얼굴고운 조선녀성들을 골라보내라는 요구였던것이다.

조선의 젊고 예쁜 녀자들을 바치라는 도요도미의 명령에 따라 일본침략자들은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끌어갔으며 지어 《성봉사》까지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쇄미록》(상 권1)에서는 《왜적들이 령남의 사녀들가운데서 예쁘장한 녀자들을 골라 5척의 배에 가득 실어 먼저 일본에 보내였는데 그들에게 머리를 빗고 분칠하고 눈섭을 그리게 하였다. …저들의 뜻을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여러 도적놈들이 돌아가며 간음하였다.》고 폭로하였다. 이렇게 많은 조선녀성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모진 정신적, 육체적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일본땅에서 온갖 수치와 모멸감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지금도 시고꾸의 다까마쯔에는 그들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일본에 랍치되여간 조선녀성들의 불우했던 처지와 운명을 력력히 전해주고있으며 일본사무라이들의 야수성과 도덕적저렬성을 만천하에 고발하고있다.

일본사무라이들은 조선녀성들을 랍치, 강제련행하여 도요도미에게 적극 섬겨바치는 한편 그들을 전쟁터에 끌고다니며 《성노예》생활을 강요하였다.

짐승같은 일본사무라이들은 수많은 녀성들을 붙잡아다 병영안에 가두어놓고 때없이 무리로 달려들어 륜간하였다. 싸움터를 옮길 때면 녀성들을 묶어서 이동해가면서 성욕을 채웠다. 당시 일본사무라이들이 전투에 나간 틈에 100여명의 조선녀성들이 탈출하였다는 사실은 한개 군영에 수십명 또는 그이상의 조선녀성들이 갇히여 강간, 륜간당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력사적사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랍치는 왜적들의 타고난 기질이였다.

오늘도 교활하고 파렴치한 일본침략자들에게 랍치되여 일본땅에 끌려가 눈물속에 살다가 무주고혼이 된 사람들의 령혼이 죄악에 찬 일본의 력사를 단죄하고있다.

우리 인민은 력사적으로 감행된 일본의 랍치범죄를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그 대가를 기어이 받아낼것이다.(끝)

Copyright (C) KOREA NEWS SERVICE(KN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