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7월 10일발 조선중앙통신)10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날강도적인 <을사5조약>날조범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백년숙적 일본이 력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그 하나하나가 다 일본이 천추만대를 두고도 갚지 못할 엄청난것들이다. 지난 세기 초엽에 감행된 일제의 날강도적인 《을사5조약》날조행위가 바로 그 한 실례이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강제적인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해냈다. 그들은 이 《조약》을 턱대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악명높은 《통감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법적근거》의 하나로 삼은 《을사5조약》은 국제법상의 요구와 원칙을 란폭하게 유린하면서 허위날조하고 일방적으로 공포한 불법무효한 《조약》이였다.
국제법에서는 조약의 불법무효성을 규정짓는 기본징표를 강제성으로 보고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것처럼 《을사5조약》은 근대세계력사에서 가장 조폭한 방법으로 날조된 대표적인 《조약》이였다.
《을사5조약》조작은 강압으로 시작되고 협박으로 진행되였으며 강도행위로 《조인》된 철두철미 비법적인 《조약》이였다.
조약의 강제성은 국가에 대한 강제와 국가대표에 대한 강제에 의하여 규정된다. 《을사5조약》은 강제의 이 두 형태가 함께 발동되여 조작된것이였다.
일제는 리조봉건정부의 최고대표자인 국왕과 정부대신들을 위협공갈하였다.
《을사5조약》을 리조봉건정부에 강요할 사명을 띠고 우리 나라에 기여든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는 조선황제 고종에게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사를 특별히 파견하니 대사의 지휘에 따라 조처》하기 바란다는 실로 오만무례한 내용이 담겨져있는 왜왕의 《친서》라는것을 전달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일제침략군무력이 서울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 하여 서울은 사실상 그들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였다.
일제침략군의 완전강점하에 놓인 1905년 11월 15일 또다시 왕궁에 기여든 이또는 고종을 만나 《1.황제의 아래에 전국을 통치하기 위해 일본인통감을 임명할것, 2.각 개항장에 일본인행정관을 임명할것, 3.한국외교사무를 도꾜에 이전할것, 4.일본의 승낙없이 어떠한 취국(협정)도 타국과 체결할수 없》다는 강도적인 내용이 담긴 《조약》원안을 전달하고 무조건 접수할것을 강박하였다. 이또는 《조약》원안에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는 고종에게 《본안은 … 변동의 여지가 없는 확정안이며 따라서 페하가 거부하면 귀국의 지위가 조약을 체결하는것보다 …일층 불리하게 되는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고 위협해나섰다.
고종은 이또의 요구를 단호히 일축하였다. 고종에게서 대답을 받아내지 못하게 되자 일제는 리조봉건정부의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유인하여 위협과 공갈, 회유와 기만의 방법으로 그들을 강제로 굴복시켜 저들의 범죄적목적을 어떻게 하나 달성하려고 하였다. 위협과 강박만으로는 정부대신들의 결심을 돌려세울수 없게 되자 일제는 저들의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서울에 들이밀었다.
그 무력은 기병 700~800명, 포병 4,000~5,000명, 보병 2만~3만명에 달하였다. 또한 일제는 궁성앞 종로부근에서 보병과 포병, 기병의 연습놀음까지 벌려놓았다.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일제의 이와 같은 강도적인 횡포는 명백히 조선봉건국가에 대한 군사적압박이며 국가의 자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해행위였다.
11월 17일 왕궁에서는 《조약》문제에 관한 어전회의가 열리였다. 어전회의에서는《조약》의 체결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리조봉건정부 대신들과 일본의 하야시공사사이의 《조약》체결과 관련한 론의는 대신들의 반대로 결렬에 이르게 되였다. 무지막지한 이또는 이 소식을 받자 만일의 경우 즉시 일제침략무력에 명령을 내리기 편리하게 할 목적으로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동행하고 궁궐로 들어갔다. 왕궁에 뛰여든 이또는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 정부대신들을 붙들어놓고 《조약》에 찬성할것을 강박하였다. 그는 《몇시까지 우물쭈물 생각만 하겠는가.소용이 없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반대냐, 찬성이냐 의견을 묻겠으니 말하라.》고 을러메면서 대신들을 한사람씩 일으켜세워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찬성반대여부를 따졌다. 한규설참정대신이 절대로 반대한다고 하자 《나는 우리 <천황>페하의 명령을 받들어 이 임무에 림하고있다. 제군들에게 우롱당하여 가만있지 않을것이다.》라고 대신들을 협박하였다. 그래도 한규설이 완강히 반대하자 그를 다른 방으로 끌어낸 후 이또는 옆에 있는자에게 《그놈이 옹고집을 부리면 죽여버리라.》고 줴쳤다. 참으로 이것은 력사에 류례없는 불법무도하고 오만무례한 날강도행위였다.
이렇듯 《을사5조약》은 《협상》과 《조인》에서 평등의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고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강제와 공포에 의한 《동의》로 날조된 불법무효한 《조약》이였다.
《을사5조약》은 비준절차도 거치지 않은 엉터리《조약》이였다. 《을사5조약》은 당시 리조봉건국가의 주권자인 고종황제의 검토비준을 받아야 효력을 발생할수 있게 되여있었다. 이것을 알고있는 이또는 《조약》을 날조한 직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약》에 고종황제의 수결(수표)을 받고 국새를 찍으려고 여러모로 시도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조약》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수결을 거부하였다. 결과 《을사5조약》에는 전권대표로 임명되지도 않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과 당시 서울주재 일본공사 하야시의 도장이 찍혀있을뿐 고종황제의 수결이나 리조봉건국가의 국새가 찍혀지지 않았다. 이처럼 《을사5조약》은 조약체결을 위한 국가의 승인도 없는 그리고 전권대표가 공식적인 조인도 하지 않고 주권자의 검토비준수표도 받지 않은 거짓협잡문서였다.
포악무도한 일제는 《을사5조약》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리조봉건정부 외부대신의 인장을 훔쳐내여 제멋대로 찍는 외교관례상 류례없는 비렬한짓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차이나 가제트》(석간)는 서울발 전보에서 《다음날인 18일 새벽 1시 외교관보 누마노가 그 관인을 빼앗아가지고 돌아와 옥신각신한끝에 같은 날 오전 1시반 일본전권 등은 제멋대로 이를 <협정서>에 날인하고 그것이 <조인>되였다는것을 선언하였다. …실로 이 <조인>은 사기협잡으로 이루어진것이다.》라고 보도하였다. 서울에 와있던 도이췰란드외교관 폰 잘데른 역시 1905년 11월 20일 자국 총통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왕궁은 일본군대들과 헌병들로 욱실거리고있었으며 일부 대신들의 도장은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눌렀다.》고 밝혔다.
허위날조된 《을사5조약》의 원본에 리조봉건정부 외부대신의 인장이 찍혀지게 된것은 바로 일제의 이렇듯 파렴치한 사기협잡과 날강도적인 행위에 의한것이였다.
《을사5조약》은 그밖의 문서형식과 절차에서도 허점투성이였다.
이처럼 《을사5조약》은 일제에 의해 강도적으로, 비법적으로 날조된 불법문서, 허위문서였다.
하지만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일제는 국제법적견지에서나 조약체결의 상황으로 보나 한갖 빈종이장에 불과한 이 《문서》를 법적기초로 하여 40여년간이나 우리 나라에 대한 전대미문의 악독한 식민지강점통치를 실시하였으며 우리 인민에게 이루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 재난을 들씌웠다.
강도 일제에 의해 《을사5조약》이 날조된 때로부터 100여년 그리고 일제가 패망한 때로부터 60여년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우리 인민은 백년숙적, 불구대천의 원쑤인 일본의 과거죄악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으며 반드시 그 대가를 백배, 천배로 받아내고야말 복수심으로 가슴을 끓이고있다.
일본은 우리 인민의 대일적개심을 똑바로 알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하며 하루빨리 과거청산에 나서야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