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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련행피해자,유가족협회 《아소탄광》 강제로동 조사보고서
(평양 7월 25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는 25일 《과거 일본의 <아소탄광>에서 감행된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에 대한 조사보고서》라는 제목으로 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지금 국제사회계는 일본당국자들이 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를 비롯하여 과거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천추에 용납못할 반인륜적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있는데 대하여 항의와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있다.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는 최근 일본수상 아소 다로의 조상들이 경영한 《아소탄광》에서 지난날 수많은 조선사람들에게 노예로동을 강요한 관련자료와 피해사실들을 확인한것과 관련하여 이 조사보고서를 발표한다.

1. 아소가문에 의하여 감행된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실태

일본의 아소세멘트주식회사가 자기 회사의 연혁을 소개할 목적으로 1975년에 발행한 도서 《아소백년사》에는 《아소그룹》계렬기업들의 창설경위와 팽창과정 등이 서술되여있다.

아소가문은 일찌기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 군사교두보로 전변시키기 위한 일본제국주의침략세력의 책동에 적극 가담하여 우리 인민을 착취하고 우리 나라의 무진장한 자연부원을 략탈해가는데 앞장섰다.

침략전쟁물자확보에 절실히 요구되는 석탄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던 그 시기 《아소그룹》의 창업자라고 할수 있는 아소 다끼찌(현 일본수상의 증조할아버지)는 규슈지방의 지꾸호탄전들을 개발하여 막대한 돈을 긁어모았으며 탄광뿐아니라 점차 철도, 금융부문에까지 촉수를 뻗치였다.

그는 1927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로부터 당시 서산군 안면면의 6,000여정보의 산림을 사들여 안면도림업소를 개설한 후 8,000여명의 섬주민 대다수를 로무자로 고용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 그는 당시 김화군 원동면에 있던 금광산(269만 8,000평)과 안변군 서곡면에 있던 보성금광산(294만 5,000평)을 헐값으로 매수하고 로무자들을 가혹하게 부려먹으며 막대한 리윤을 짜냈다.

그의 손자인 아소 다가요시는 1934년에 할아버지로부터 아소광업주식회사 사장직을 넘겨받은 후 탄광과 광산개발, 세멘트공장, 철도, 발전소건설 등에 손을 뻗치면서 기업규모를 확대하였으며 조선에서 고률리윤을 추구하기 위해 날뛰였다.

그는 1943년에 김화군의 원동금광산을 원동광업소로 개칭하고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고역에로 내몰았다.

아소가문은 1920년대초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저들의 탄광들에 끌어다가 가혹한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일본잡지 《전쟁책임연구》 제51호에는 《…1928년 1월 현재 <지꾸호지방조선인주재조사>에는 조선사람이 가장 많은곳은 미쯔비시계렬탄광이며 <아소탄광>도 앞자리에 있었다.》고 씌여져있다.

아소광업주식회사에서는 후꾸오까현 지꾸호지역과 사가현에 많은 탄광들을 가지고있었는데 이를 일명 《아소탄광》이라고 불렀다.

일제는 아시아대륙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전선이 더욱 확대되는데 따라 부족되는 로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일본으로 끌어갔으며 《로무동원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조선사람들에 대한 강제련행을 기본수단으로 하였다.

1939년 가을부터 태평양전쟁발발직전인 1941년까지에만도 일본의 탄광들에 끌려간 조선사람의 수는 5만 8,000여명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서 《아소탄광》이 집중된 후꾸오까현 지꾸호지역에 강제련행된 조선사람의 수는 2만 1,000여명이나 되였다.

1939년부터 1945년사이에 후꾸오까현 지꾸호지역의 탄광들에만도 15만명이상의 조선사람들이 강제련행되였으며 《아소탄광》에도 적지않은 조선사람들이 끌려갔다.

일본 후생성 근무국이 1946년에 작성한 《조선인로무자에 관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후꾸오까현과 사가현내의 《아소탄광》에는 1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이 강제련행되였다.

아소광업주식회사는 구일본정부와 공모결탁하여 1920년대초부터 여러 형태의 《모집》이라는 간판밑에 조선사람들을 《아소탄광》에 끌어갔으며 《국가총동원법》공포이후에는 《관알선》(정부알선), 《징용》 등의 방법으로 강제련행, 랍치해갔다.

이에 대하여 피해자 김무봉은 《나는 일제에 의하여 1938년 5월에 후꾸오까현 <아소탄광>에 끌려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막장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39년 당시 일본석탄광업련합회 리사회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아소탄광》에서 로무담당자들이 조선인강제련행에 직접 관여한데 대하여 《아소계렬의 아따고탄광에서 로무주임을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오래동안 조선에서 순사를 하면서 조선말을 할수 있는 사람을 로무담당자로 선정하였으며 조선의 어느 지역에서 로동자들을 모집할수 있는지 현지조사도 하게 하였다. 그러한 준비에 따라 강제동원이 시작되면 <아소탄광>에서는 매우 순조롭게 조선사람들을 모집할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와도 관계를 가지고 란폭한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을 끌어왔다고 한다.》고 폭로하였다.

《아소탄광》에서는 조선에서 끌어간 청장년들에게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무봉은 《우리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하루 14시간이상이나 갱안에서 혹사당하였다. 우리에게 차례진 식사란 보리로 만든 주먹밥 한덩어리뿐이였다. 조선사람들은 대체로 갱안에 들어가 굴진과 채탄같은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였다. 1940년말 갱안에서의 락반사고로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산나이탄광의 일본인로무계원은 《채탄작업은 조선사람들이 하였다. 아침에 늦게 나가는 사람이 6시, 일찍 나가는 사람이 새벽 3시경이였고 퇴근은 밤 10~11시, 늦을 때에는 새벽 1시경이였으니 결과적으로 잠자는 시간은 2~3시간정도였다. 조선에서 끌려온 청장년들은 탄광합숙에서 살았다. <죠와료>라는 합숙이 5동 있었는데 한개동에 150명씩 들이밀어 모두 750명이였다. 합숙에서는 물론 일터, 거리에 나갈때에도 그들을 감시하였으며 경찰과 헌병까지 개입하여 로동강도를 높이였다. 큰 기업은 조선에 직접 가서 로동자들을 끌어왔다.》고 실토하였다.

《아소탄광》에서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민족적멸시와 학대행위를 강화하면서 그들을 아무런 로동안전담보도 없는 위험한 갱안에 들이밀어 혹사시켰는데 이로하여 수많은 청장년들이 갱안에서 억울한 죽음을 강요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아따고탄광에 근무하였던 한 일본사람은 《첫 교대로 들어간 탄부들은 갱에서 나오자마자 그날밤에 또다시 채탄작업에 내몰리웠다. 전쟁이 확대되자 우리 아따고탄광에도 헌병들이 와서 작업에로 내몰았다. 갱내에는 조선사람뿐이였다.》고 말하였다.

후꾸오까현 《현청문서》에 편집된 《극비, 1944년 3월 이입 반도인로무자에 관한 조사표, 특별고등과》라는 문건에는 1944년 1월말 당시의 조선인강제련행자료와 관련한 도표가 있다.

도표에 의하면 후꾸오까현에서 조선청장년들이 가장 많이 끌려가 있은곳이 《아소탄광》으로서 그 수는 7,996명이며 그중 도주자는 4,919명이고 사망자는 56명이라고 기록되여있다.

《아소탄광》계렬의 하나인 요시구마탄광에서는 1936년 10월 25일 갱내에서 화재사고가 일어나 조선사람 24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이에 대하여 당시 재일조선인이 발행하고있던 《민중시보》에는 《… 위험한 로동에서 생계의 길을 찾으며 형언할수 없는 로동강도와 한심한 로동조건하에서 노예와 같이 일하고있던 사람들이 죽었다. 유가족들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요시구마탄광내의 화재는 지난 25일 30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아직까지 생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15명에 달하였다.》고 씌여져있었다.

이외에도 남조선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확인된 60여명의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비롯하여 《아소탄광》에서 강요된 노예로동의 실태를 립증하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료들은 적지 않다.

지난날 아소가문이 탄광뿐아니라 세멘트와 철도, 전력 등의 기업들을 경영하고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아소그룹》의 공장, 기업소들에 강제련행된 조선사람들의 수는 더 많았을것으로 추산된다.

이상의 증언과 자료들을 통하여 아소가문이 조선에서 다량의 목재와 금을 비롯한 자연부원을 략탈해갔을뿐아니라 일제의 《조선총독부》와 공모하여 1만여명의 조선청장년들을 강제련행하고 혹사시키였으며 그로하여 많은 조선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2. 과거청산에 대한 아소가문의 태도와 립장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은 구일본정부와 군부가 모든 권한을 총발동하여 감행한 범죄로서 중대한 인도에 대한 죄, 노예범죄, 전쟁범죄로 된다.

법적시효에 관한 국제관습법과 성문법에는 기본인권과 관련한 범죄에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밝혀져있다.

구일본의 책임은 국가의 권리와 의무계승의 국제법적원리에 따라 계승정권인 현 일본정부에 그대로 이전되고있다.

따라서 구일본정부와 공모하여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한 일본기업들의 후신회사들도 마땅히 그에 대한 법적, 도의적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일본정부와 기업들은 과거에 저지른 조선인강제련행 및 강제로동범죄에 대하여 오늘까지도 인정도 청산도 하지 않고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정당화하면서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고 해외팽창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책동에 열을 올리고있다.

이러한 책동에 앞장서 날뛰고있는것이 바로 현 일본수상 아소 다로이다.

《아소그룹》의 창업자인 아소 다로의 증조할아버지 아소 다끼찌는 1911년부터 1925년까지 《대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으로서 일제의 대조선침략정책작성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1921년부터는 일본석탄광업련합회 회장으로서 제국주의침략세력들과 결탁하여 식민지조선에서 인적, 물적자원을 닥치는대로 빼앗아간 악착한 략탈자, 흉악한 군국주의자였다.

아버지인 아소 다가요시 역시 선대의 전철을 밟아 일본의 식민지파쑈통치시기에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랍치련행하여 억압, 착취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한후에는 조선인랍치만행에 대한 응당한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았을뿐아니라 오히려 미국을 등에 업고 우리 인민에게 갖은 못된 짓을 일삼은 추악한 자본가, 반공보수분자였다.

그로 말하면 1949년부터 8년간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장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후 조선에 전승국의 지위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이전 수상이였던 요시다 시게루와 함께 1951년 9월에 미국을 행각하여 《쌘프랜씨스코강화조약》과 《일미안보조약》을 체결하는데 적극 가담한 자이다.

특히 그는 1950년대초 미제가 일으킨 3년간의 조선전쟁시기에 일본전토가 미군의 출격기지, 병참기지, 수리기지로 제공된 기회를 리용하여 석탄을 비롯한 전략물자들을 팔아 막대한 치부를 하였다.

바로 이 군국주의가문의 피줄을 이은 아소 다로는 1979년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때로부터 수상자리에 올라앉은 오늘까지 자기 가문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반인륜적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기는커녕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추구하면서 조선민족배타주의정신이 꽉 들어찬 국수주의자로서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그는 2003년 5월 31일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으로 있을 때 도꾜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창씨개명》은 조선사람들이 스스로 요구한것이라느니, 조선말도 일본사람이 배워준것이라느니 하면서 력사를 부정하는 터무니없는 망발을 줴쳤다.

외상직에 있을 때인 2005년 12월 일본국회 참의원 《오끼나와 및 북방령토문제에 관한 특별위원회》에서 그는 민주당출신의원이 앞으로 아소광업주식회사에서 감행한 조선인강제련행과 관련한 자료들을 제출할 의향이 있는가고 질문한데 대하여 《그것은 지난날의 자료로서 <국가총동원법>시대의 일이다. 앞으로 관계자료가 있는지 조사하려고 생각한다.》고 하고는 지금까지 그 결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그는 2005년 11월 26일 가나자와시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당시 수상 고이즈미의 《야스구니진쟈》참배문제와 관련하여 그에 대해 말하는것은 중국을 비롯한 일부 나라들뿐이라느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느니 뭐니 하는 망발을 줴쳐 일본의 침략력사를 극구찬양하는 우익정치가로서의 정체를 다시금 드러내놓았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상의 승인과 묵인하에 과거범죄사실이 력사교과서에서 삭제, 외곡되고 전범자들이 《렬사》로, 《영웅》으로 떠받들리우고있다.

지난 4월에는 수상이 직접 특급전범자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구니진쟈》에 봉납을 하고 그 뒤를 이어 국회의원 87명이 무리지어 그곳에 몰려가 참배놀음을 벌리는 추태를 부리였다.

더우기 엄중한것은 수상이 선두에 나서서 《랍치문제 및 핵문제, 미싸일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반공화국압살책동과 반총련탄압소동에 광분하고있는것이다.

올해에 들어와서만도 그는 유럽행각시에 과거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성은 한마디도 없이 《랍치문제》를 들고나와 또다시 우리를 악랄하게 비난하였는가 하면 우리 공화국의 2차 핵시험이 《일본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되며 동북아시아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에 《현저한 해를 끼치는것》으로 되기때문에 《결코 용인할수 없다.》는 악담을 퍼부었다.

최근 아소 다로를 비롯한 일본당국자들은 우리의 《핵 및 미싸일문제》를 걸고 대조선《단독제재》를 결정하고 《선제공격》이니 뭐니 하고 떠드는가 하면 핵무장화를 비롯한 군비증강책동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조상들이 이루지 못했던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기어이 실현해보려고 미쳐날뛰고있다.

죄는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은페한다고 하여 무마될수 없다.

일본의 과거청산문제는 본질에 있어서 과거 일본이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모든 인적, 정신적, 물적피해에 대해 철저히 사죄하고 배상해야 하는 문제로서 조일관계에서 기본을 이루는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일본이 유엔헌장에 못박혀있는 적국의 오명에서 벗어나 국제적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오늘 일본이 운운하는 인권과 문명, 인도주의와 법치의 진가를 검증하는 시금석으로 되고있다.

수상 아소와 일본의 정부, 기업들은 마땅히 과거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모든 반인륜적범죄행위들에 대하여 그 진상을 명백히 조사공개하고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철저히 사죄, 배상하며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두 찾아 유가족들의 희망에 따라 그들의 고향과 가족들이 사는 곳에 안장하고 그와 관련된 범죄자들을 찾아내여 책임에 따라 엄격히 처벌하여야 한다.

그리고 일본사회에 군국주의사상과 민족배타주의감정을 고취하는 비렬한 책동과 반총련탄압소동을 걷어치우고 우리 공화국의 존엄높은 합법적해외동포조직인 총련의 활동과 조선인강제련행범죄의 가장 비참한 피해자이며 그 후손인 재일동포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여야 한다.

일본당국자들은 군국주의적망상에서 벗어나 시대착오적인 력사외곡과 군국화책동을 당장 그만두고 아시아와 세계인민들과의 신뢰구축에 나서야 한다.

2010년은 일본이 패망한지 65년이 되는 해이다.

과거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 인간생지옥에서 노예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은 물론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도 일제에 의해 강제련행된 혈육들의 생사여부를 모르는 유가족들을 비롯한 전체 조선인민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은 극도에 이르고있다.

아소는 과거 조선인강제련행, 랍치만행을 비롯한 반인륜적죄행을 저지른 범죄자의 후예로서 이에 대한 법적, 력사적, 인륜도덕적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알고 시간이 더 가기전에 그 해결을 위한 정치적용단을 하루빨리 내려야 할것이다.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는 앞으로도 세계 여러 나라의 진보적단체들과의 련대와 련합을 강화하여 일제의 반인륜적범죄를 폭로단죄하고 그 해결을 요구하는 투쟁을 보다 힘있게 벌려나갈것이다.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 유가족협회

주체98(2009)년 7월 25일
평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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