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0월 28일발 조선중앙통신)일본이 보물로 여기는 백자단지인 《흰 사쯔마》에는 조선사람의 피와 땀, 노력이 스며있다.
《흰 사쯔마》는 17~19세기 일본자기들가운데서 최고급으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19세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때 이채를 띤 이 자기는 유럽에까지 수출되여 호평을 받았다.
리조의 백자기를 모방한 《흰 사쯔마》는 조선의 유명한 도자기장공인이였던 박평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일본의 이름있는 력사소설가인 시바 료따로가 쓴 단편실화소설 《고향은 잊을수 없소이다》에 서술되여있다.
이 소설은 중세 일본의 명의로, 의학자로 이름났던 다찌바나 난게이의 려행기에 기초하여 쓴 작품이다.
박평의는 임진왜란(임진조국전쟁)때 사쯔마(오늘의 규슈서남부 가고시마현)의 령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패거리들에 의해 전라도 남원성(당시)에서 랍치당한 도자기기술자들중의 한사람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랍치한 70여명의 조선사람들을 도자기원료인 진흙탐사에 내몰았다.그들가운데서 도자기기술에 가장 밝았던 박평의와 그의 아들 박정용이 도자기제조에 필수적인 백토를 찾아냈으며 백자단지인 《흰 사쯔마》를 만들어내게 되였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자기공들은 외진 곳들에 가마터들을 꾸려놓고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수십년 지어 대를 이어가며 도자기제조에 종사하였다. 이때 일본의 전국각지에 생겨난 가마터만 해도 수백개나 되며 그후 이곳들은 일본의 자기생산의 중심으로 되였다.
사쯔마에만도 한개 거리가 통채로 조선사람들의 살림집으로 이루어졌고 성씨만 하여도 17가지나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거리를 가리켜 고마거리(고려거리)라고 불렀다.그때로부터 수백년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지방에서는 제사때 부르는 노래나 가마터에서 쓰는 기술용어들이 여전히 조선말로 사용되고있다.
일본의 《이름난 자기》들로 알려진 《아리따야끼》, 《하기야끼》, 《아가노야끼》 등도 임진왜란때 일본에 랍치되여간 조선도자기기술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이다.
일본의 자기문화는 그야말로 류례없는 절취문명, 랍치문화라고 말할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