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2월 3일발 조선중앙통신)3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간또대지진때 감행된 야만적인 대학살만행》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학살만행은 일본땅에서도 벌어졌다.
일본땅에서 감행된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대량학살만행의 대표적실례로는 1923년 9월 간또대지진때의 대학살사건을 들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 살고있던 조선인들은 일제의 가혹한 민족차별정책과 노예로동강요로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고있었다.
이러한 때인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간또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강한 지진과 함께 일어난 화재로 하여 간또일대는 불바다로 변하였으며 순식간에 120여만명이 집을 잃고 한지에 나앉는 사태가 빚어졌다. 지진발생직후 재난을 당한 피해지역들에서는 시급한 대책을 취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급격히 높아졌다.
이에 바빠맞은 일본반동정부는 피해자들을 구제할 긴급대책을 취할 대신 정부에 대한 민심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묘안》으로 무서운 조선인대학살음모를 꾸미였다. 지진발생직후 수상관저의 마당에서 열린 《림시각의》에서는 정보부에 민심안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데 대한 명령을 주었으며 이에 따라 정보부장 나가오까란자는 《조선인이 방화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친다.》 등의 류언비어를 내돌렸다.
당시 일본의 치안을 책임졌던 내무대신 미즈노 렌따로와 경시총감 아까이께 아쯔시는 9월 1일 밤 도꾜시내를 순회하고나서 다음날 조선인탄압지령을 각 지방장관들에게 내리였다.
이 시기 일제가 조선인대학살을 위해 일본왕의 《칙령》 401호로 《계엄령》까지 공포하고 군대와 경찰, 헌병들을 대량적으로 투입하였다는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당시 일본법에 의하면 《계엄령》은 전시 혹은 사변이 발생할 경우에만 선포할수 있었고 사변인 경우에도 반드시 내란 또는 폭동의 발생이 인정되여야 내리게 되여있었다.그러나 일제는 자연재해구제와는 관계없이 《조선인폭동설》을 날조하고 무고한 재일조선인들을 터무니없이 《적》으로 규정하였고 그들을 탄압할데 대한 《계엄령》을 공포하였던것이다.이것은 일본반동정부가 저들이 날조한 《조선인폭동설》을 일본인들이 그대로 믿게 하기 위한 술책이였다.
《계엄령》을 선포한 일제는 9월 3일 내각비상회의를 열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던 가장 악질적인 장교들로 《간또계엄사령부》를 조작하였다.그리고 수만명의 무력을 간또일대에 집결시키고 대규모적인 조선인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여기에 일제는 불량배들로 조직된 3,000여개의 《자경단》까지 협동할것을 지시하였다.
이때 일본의 경찰서, 파출소의 게시판들에는 《불량조선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거짓내용과 함께 《반항하면 구태여 죽여도 일없다.》는 게시문이 붙여졌으며 경찰관들은 메가폰을 가지고 곳곳을 순회하며 《조선인들의 폭행에 대하여서는 죽여도 일없다.》고 일본인들에게 재일조선인학살을 공공연히 선동하였다.
간또대지진때 일제의 조선인집단학살만행은 이렇게 시작되게 되였다.《계엄사령부》의 지휘밑에 일제살인귀들은 각종 무기들과 함께 날창, 참대창, 곤봉, 쇠갈구리 등 살인흉기들을 가지고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무참히 학살하였다.
놈들은 이르는 곳마다에 《검문소》들을 만들어놓고 《고엔 고쥬고센(5원 55전)》이라는 발음하기 까다로운 일본말을 시켜보고 조선사람을 식별하고서는 그 자리에서 목을 자르지 않으면 배를 가르거나 눈알을 빼고 코를 베여냈으며 벌거벗겨 모욕을 준 다음 죽여서는 그 시체를 시내로 질질 끌고다니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살인귀들의 조선인집단학살만행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그들의 극악무도한 조선인집단학살만행으로 지진발생후 두주일 남짓한 기간에 도꾜 하네다부근에서 2,000여명, 스미다강부근에서 400여명, 혼죠부근에서 400여명, 가메도경찰서부근에서 300여명, 우에노경찰서부근에서 150여명, 쯔루미경찰서부근에서 100여명이 무참히 살해되였다.이때 일제야수들이 무참히 학살한 조선사람의 수는 2만 3,000명에 달하였다.
재일조선인학살광경을 직접 목격한 다나베 사다노스께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살해된 이웃동네에 가보았다. …공지에는 거의나 알몸뚱이인 조선사람의 시체들이 주런이 놓여있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목구멍이 끊기여서 기관지와 식도의 두 경동맥이 허옇게 드러난 시체도 있었다. 목이 떨어져나간 시체도 있었는데 목을 강짜로 비틀어 끊었는지 살과 피부와 힘줄이 풀려있었다. …불쌍하게 죽은 애젊은 조선녀성의 시체도 있었다. 그 녀성의 배는 갈라져있었고 6~7개월쯤 되여보이는 태아가 창자속에 딩굴고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놀라 옆으로 뛰면서 물러섰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잔인한짓을 한단 말인가.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수치감을 이때처럼 절감하기는 처음이였다.》
재일조선인학살만행에 직접 참가하였던 한 경찰은 《참살정형을 도저히 입으로 표현할수 없었다.…경찰서구내는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수 없는 형편이였다.》라고 그때의 참상을 고백하였다.
간또대지진때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학살만행은 일본반동정부의 지시밑에 조직적으로 감행된 잔인한 반인륜적범죄였다.
과거 수많은 우리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살해한 일제의 극악한 범죄는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무마될수 없고 지워질수 없다. 80여년세월이 흐른 오늘도 간또대지진때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재일조선인들의 령혼은 사무치는 대일원한을 품고 일제의 야만적인 살인죄악을 세상에 고발하고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