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4월 14일발 조선중앙통신)14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일본의 과거죄악을 반드시 결산할것이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감행한 범죄는 그 야만성과 악랄성에 있어서 동서고금에 류례없는 극악무도한 죄악으로 력사에 기록되여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에 일어난 임진조국전쟁(1592-1598년)때를 상기해보자.
1592년 4월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사무라이들은 1598년 11월 쫓겨갈 때까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수 없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
일본 교또시에 하나의 옛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을 《미미즈까》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는 《귀무덤》이라는 뜻이다. 이름그대로 이 무덤에는 사람들의 귀가 묻혀있다. 임진왜란때 일본사무라이들이 우리 나라에서 베여간 수만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의 귀가 여기에 묻혀있는것이다.
우리 나라에 침입한 가또, 시마즈, 나베시마부대놈들은 강원도, 함경도방향으로 진출하면서 조선사람을 죽이고 《전공》의 증거물로 머리를 잘라들이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무겁다고 하여 귀나 코만을 베여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하3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저들에게 떼여달라는 강도적요구를 내대는것으로 《강화》교섭을 결렬시킨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이 세 도에로 침략군을 내몰면서 조선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여 《그 귀를 베여 소금에 절궈서 제도(왕이 있는 수도를 말함)로 보낼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이자는 매 병졸에게 한되박씩의 귀를 잘라바칠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무고한 조선사람의 귀자르기가 더욱 악랄하게 벌어졌다.
가또 기요마사는 1만여명 되는 병졸들에게 1인당 세사람의 귀를 잘라바칠데 대한 《기준량》까지 정하여 인간살륙전에로 내몰았다. 당시 이자의 부대놈들이 잘라바친 조선사람의 귀만 하여도 3만개이상에 달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의 첫해인 1592년에 강원도 춘천에서 베여낸 조선군사 70여명의 귀를 도요도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여 《감사장》까지 받은 시마즈가문의 살인악당들은 1597년 7월 사천을 강점하고 3만 8,717명의 조선사람의 귀를 베여 10개의 큰 나무통에 넣어 일본에 보냈다.
일본의 한 기록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1593년 10월에 함경도의 23개 고을에서 1 300여명의 귀를 잘라 일본에 보낸데 이어 그의 셋째아들 나베시마 가쯔시게가 1597년 2월에 전라도 가야산전투뒤에 3,369명의 코를 베여 일본에 보냈다고 씌여있다. 1597년 8월 중순 남원성을 타고앉은 일본침략자들이 3,726명의 군사들과 인민들을 죽이고는 그중에서 장수들은 목을 자르고 병사들과 인민들은 귀와 코를 잘라내여 소금을 섞은 재를 쳐서 단지에 넣어 도요도미 히데요시에게 보낸것을 비롯하여 이런 잔악한 행위는 임진왜란 전기간 우리 나라 도처에서 감행되였다.
당시의 한 《진중일지》에 의하면 놈들은 《전공》을 평가받기 위하여 서로 더 많은 귀와 코를 베려고 경쟁적으로 미쳐날뛰였다. 전사한 조선군사들에게서 베여내다 못해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까지 달려들어 마구 잘라냈으며 마을의 집집을 뒤져서 아낙네들은 물론 어머니의 등에서 발버둥치는 젖먹이의 귀까지도 주저없이 칼로 잘라냈다.
일본의 한 책에는 이렇게 잘라낸 조선사람들의 귀가 적게 잡아도 10여만개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미미즈까》는 인류사를 더럽힌 하나의 치욕스러운 표적물인 동시에 일본사무라이들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고발하는 력사적증거물이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의 포악하고 잔인한 기질은 조선인민에 대한 대량적인 학살만행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1592년 4월 13일 남해의 관문인 부산을 공격하는것으로써 임진왜란을 개시한 일본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에 더러운 발을 들여놓은 첫 순간부터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마구 죽이였다.
당시 약 1,800명의 우리 나라 군사들이 지키고있던 부산성에 1만 8,700명의 왜놈병력이 달려들었다. 력량상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군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항전하였으며 마지막 한사람까지 결사의 혈투를 벌리였다.
이때 무너진 성벽사이로 물밀듯이 달려들어온 놈들은 성안의 인민들에 대한 일대 살륙전을 벌리였다. 일본살인귀들은 성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늙은이건 어린이건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륙하였다.한 기록에는 그때 8,500여명의 목을 잘랐다고 씌여있다.
이것이 임진왜란때 일본침략군이 감행한 첫 조선인학살만행이였다. 이렇듯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우리 인민에 대한 피비린 살륙전이였다.
일본침략자들의 살인만행은 리조봉건국가의 수도였던 서울에서 가장 야만적으로 감행되였다.
1592년 5월초 서울에 기여든 일본침략자들은 근 1년동안의 강점기간에 성안에 남아있던 수만명의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1593년 4월 일본침략자들은 조선군대의 드센 공격과 군량난으로 하여 더이상 견딜수 없어 퇴각하면서 성안의 인민들을 거의다 학살하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놈들이 쫓겨간 다음날에 서울에 돌아온 도체찰사 류성룡은 성안에서 목격한 끔찍한 광경을 《징비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성안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백에 한둘도 안되였는데… 사람과 말이 여기저기 마구 죽어넘어져있고 악취가 성안에 차넘쳐서 사람들은 코를 싸쥐고 다녔다.성안팎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그로부터 얼마후인 1593년 6월말 진주성에서는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전쟁기간중 가장 큰 규모의 조선인학살만행이 저질러졌다.
침략의 괴수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성을 기어코 점령하며 주민을 한사람도 남김없이 죽이라는 살인명령과 함께 12만 3,000명의 병력을 살륙에로 내몰았다. 성안에 쓸어든 놈들은 무려 6만명이나 되는 인민들을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이였다. 그리고 간신히 죽음을 면한 사람들을 붙잡아 창고에 몰아넣고 불태워죽이였다.그리하여 진주성안에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단 한명도 남지 않았다.
일본침략자들의 학살만행은 《강화담판》을 결렬시키고 재침을 개시한 1597년이후 더욱 극악무도하게 감행되였다.
당시 일본수군 우두머리의 하나였던 시마즈가문에 전해지고있는 《정한록》이라는 책에는 《전하의 노여움이 멎을길없어 (1597년에) 다시 대군을 일으켜 조선(사람)을 몰살시킴으로써…》라는 내용과 함께 재침의 주요목적이 조선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것이였다고 씌여져있다.
일본야수들은 우리 인민들을 마구 살륙하였을뿐아니라 심지어 조선사람을 죽여 살점까지 뜯어먹는 치떨리는 식인종행위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력사자료에 의하면 일본침략군의 한 부대는 1597년 7월부터 9월까지 경상남도 울산에 진을 치고 들어앉아 다시금 전조선에로 전쟁을 확대할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당시 그 부대에는 놈들에게 잡혀가서 강제로동을 당하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있었다. 놈들은 조선군대의 끊임없는 공격과 봉쇄로 하여 식량이 떨어지자 그들을 먹이지도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축성공사와 짐운반과 같은 고역에로 내몰았다. 허기진 배를 그러안고 일하다 쓰러져죽거나 매맞아죽을 처지에 놓여있던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군영을 빠져달아나군 하였다. 그러나 굶주림과 고역에 시달린 몸이여서 도저히 멀리 달아날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 붙잡아들인 놈들은 그들을 세워놓고 총과 활로 쏘아죽였으며 쓰러진 다음에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서로 다투어가며 살점을 뜯어먹었다.그중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의 살을 군도나 손칼로 뜯어내여 더운 피가 뚝뚝 흐르는것을 그대로 먹는 놈들도 있었다고 한다.
우의 자료들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저지른 일본침략자들의 조선인학살만행사실가운데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실로 임진조국전쟁기간 인간백정의 무리인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조선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당하였는지 다는 알수 없다.
수백년전 조선을 침략하고 사람잡이를 일삼은 일본사무라이후예들인 일제날강도무리들은 20세기초에 무력의 뒤받침밑에 또다시 우리 나라를 비법적으로 강점하고 40여년간 악랄한 식민지파쑈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고통과 재난을 들씌웠다.
일제살인마들에 의해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과거 일본이 우리 인민에게 끼친 죄악은 상상을 초월하는 특대형범죄이다.
하기에 지금도 우리 인민은 일본군국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며 불타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금치 못하고있다.
우리 인민은 수백년에 걸치는 일본의 과거죄악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것이며 대를 이어가면서라도 반드시 결산하고야말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