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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통신사 비망록 《미제는 조선전쟁의 도발자,침략자이다》
(조선중앙통신=도꾜)조선중앙통신사는 24일 《미제는 조선전쟁의 도발자, 침략자이다》라는 제목으로 된 비망록을 발표하였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6월 25일은 미제가 세계제패야망밑에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도발한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미제에 의해 강요된 조국해방전쟁은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 막대한 인적 및 물적피해를 가져다주었다.

전쟁의 포성이 멎고 정전이 실현된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미제는 오늘도 력사의 진실을 외곡하면서 전쟁도발자, 침략자로서의 정체를 가리우고 그 책임을 우리 공화국에 넘겨씌우려고 악랄하게 책동하고있다.

조선중앙통신사는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이며 백년숙적인 미제의 조선침략전쟁도발진상을 만천하에 고발하기 위하여 이 비망록을 발표한다.

1. 미제의 남조선강점책동

1) 미제의 38°선 분렬안 조작책동

1945년 8월 일제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면서 항복에 동의한다는것을 련합국측에 통고하였다.

통고를 받은 미국은 대일전쟁을 통하여 단독으로 조선을 강점하려던 야망을 실현할수 없게 되자 절반땅이라도 차지할 목적으로 《실제적인 해결책》을 세우기 위한 모략을 꾸미였다.

미국대통령 트루맨의 각본에 따라 조선의 38°선을 기준으로 하여 일본군의 항복지역을 쏘미가 나누어가질데 대한 초안이 작성되였다.

미륙군성에서는 그 초안을 《일반명령 제1호》라는 이름을 붙여 트루맨에게 제출하였으며 그는 이것을 련합국들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남조선잡지 《신동아》(1990년 7월)는 《38°선 분할과 미군진주가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서라면 이미 37°선까지 내려와있었던 쏘련군이 그대로 부산까지 내려오는것이 600여mile 떨어진 미국이 오는것보다 훨씬 빠르고 쉬웠을것이다. 따라서 38°선확정은 쏘련군이 조선반도전체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결정이였다고 본다.》고 까밝혔다.

특히 38°선을 조선의 분할선으로 할데 대한 문제는 한번도 국제적토의에 오르지 않았다.(미국도서 《트루맨회고록》1권 일문판 219페지)

2) 미제의 남조선강점

미제는 《일반명령 제1호》의 실행을 추진시키는것과 동시에 남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실천행동에 달라붙었다.

1945년 8월 13일 미제는 합동참모장회의에서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남조선을 비롯하여 미국이 책임진 지역들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것을 지시하였다. 맥아더는 24군단장 하지에게 일본군의 항복서를 받아내며 미국을 대표하여 남조선을 점령하고 통치할것을 지시하였다.(미국도서 《조선전쟁에서의 미륙군》 1972년 25~26페지)

1945년 9월 2일 맥아더는 하지의 이름으로 《한국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남조선각지에 뿌리였으며 9월 7일 맥아더사령부는 《포고》제1호를 발포하였다.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미륙군의 최고권한을 가지고 이로부터 조선북위 38°선이남과 동 지역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실시한다.》는 《포고》제1호에 이어 《포고》제2호, 제3호가 발포되였다.

맥아더는 요꼬하마항에 입항한 미제침략군 전함 《미주리》호의 함상에서 일본과의 항복문서 조인식을 끝내고 조선의 북위 38°선 이남을 점령한다는것을 공포하였으며 련이어 미제침략군 24군단에 남조선상륙을 명령하였다.

1945년 9월 4일 미제침략군 24군단의 선발대가 김포비행장에 도착한데 이어 9월 8일부터 10월중순까지 군단무력이 인천과 부산, 목포에 무혈상륙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인들도 《실지에 있어서 월가의 조선인민에 대한 전쟁은 그 장군들이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즉 1945년 9월에 시작되였다.》고 말하고있다. (미국도서 《아메리카현대사》일문판 148페지)

2. 조선전쟁도발을 위한 미제의

군사적준비책동

1)《북벌》군사전략계획의 작성

제2차세계대전후부터 세계제패전략을 로골적으로 추구한 미제는 그 실현을 위해 조선전쟁을 포함한 세계대전계획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작성완성하였다.

맥아더사령부에는 《G-2》, 《G-3》이라고 하는 새 전쟁도발을 위한 작전계획과 정찰 및 첩보공작을 연구하는 집단이 무어졌고 전 일본군 고급장교들로 조직된 《력사반》과 《카토》기관이 그에 인입되였다.

미제는 이 집단을 통하여 수년간에 걸쳐 조선과 만주, 씨비리를 점령할것을 예견한 《A, B, C계획》을 연구작성하였다.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은 《A》계획과 관련한 《북벌》군사행동계획을 작성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잡지 《진부쯔 오라이》 1964년 9월호는 다음과 같이 폭로하였다.

《이전 일본군참모본부 차장이였던 가와베(K)를 비롯하여 아리스에(A), 다나까(T), 오노(O) 등 중요참모들로 구성된 <카토(KATO)>기관과 이전 대본영 륙군부 작전과장 핫또리의 <맥아더사령부 력사반>등은 <북벌>계획을 작성제공한 주되는 비밀단체였다. 이들은 <북벌>계획을 위하여 <남조선군의 제복과 미군제복을 입고 출국하였다.>고 한다. <북벌>계획은 우선 38°선에 남조선군, 미군 10개 사단을 집결시켜 중부와 서부의 2개 작전지대를 만든다. 전선서부는 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평양북방에 해공군이 협동하여 상륙작전을 진행하도록 되여있다. 전선동부 우익은 양덕, 좌익은 원산을 향해 평양과 원산을 련결하며 진격한다. 여기서도 원산북방에 해군부대의 상륙작전을 진행하도록 되여있다.

…이 작전계획이 맥아더사령부에 비치된것은 1950년초이며 그것은 그대로 남조선측에 전달되였다.》

1949년 7월경 남조선《정부》는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공할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당시 남조선군의 후방에서 빨찌산들이 적극적으로 전투행동을 전개하였고 지어 개별적부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편으로 넘어간것과 관련하여 침공계획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미국정부와 리승만도당은 침공준비를 한순간도 중지하지 않고 계속하였다.(쏘련도서 《조선전쟁》1부 1959년 64~65페지)

리승만괴뢰의 공격준비는 1950년 5월에 전부 끝났으며 군사작전계획이 완전히 수립되였다.(미국도서 《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165페지)

미국인들은 이러한 계획(침략계획A)이 《훨씬 이전인 1월(1950년)에 이미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로 결정되여있었던것》이라고 인정하였다.(미국신문 《뉴욕 헤랄드 트리뷴》 1950년 6월 20일)

미제는 또한 세계제패전략을 반영한 극비문건 《NSC-68》계획을 작성하였다.

이 계획은 1950년 1월 트루맨의 지시에 따라 미국방성과 미합동참모본부에서 작성합의되고 4월 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조선전쟁도발과 관련한 계획이였다. (미국신문 《뉴욕타임스》 1964년 4월 13일)

2) 남조선괴뢰군무력의 준비

미제는 침략전쟁준비의 일환으로 남조선괴뢰군조작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하여 미제는 북의 무력에 비한 《10:1의 우위》를 목적으로 남조선괴뢰군을 계단식으로 조직확대하고 미국식으로 교육, 훈련시켰으며 괴뢰군에 대한 미군의 통수권을 확립하였다.

1949년 7월 18일 리승만은 주미남조선괴뢰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10만명의 상비병, 20만명의 예비병, 10만명의 경찰 도합 40만명을 훈련시키고 장비시킬것이라고 하였다.

1949년 9월 28일 괴뢰국방장관 신성모는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 《국민총력전태세의 필요성을 수차 언명한것과 마찬가지로 정규군 10만, 예비군 20만을 절대 확보해야 하겠다.》고 떠벌이였다. (남조선《경향신문》 1949년 9월 29일)

1949년 3월 4만 5,000여명의 경찰을 포함하여 남조선의 병력은 11만 4,000여명에 달하고있었다. (미국도서 《조선전쟁의 력사》상 일문판 23페지)

1949년 미국은 5만명의 병력을 무장시키는데 충분한 군사장비를 넘겨주었으며 그후에 다시 8,700만US$이상의 군사지원을 추가로 제공하였다. (남조선도서 《한국전쟁사》 일신사 50페지)

리승만역도는 1949년 10월 17일 UP통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조선군의 훈련이 성과를 거두고있다.》고 하면서 《3일이내에 평양을 점령할수도 있다.》고 망발하였다. (미국도서 《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일문판 39페지)

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1950년 6월 기자들의 질문에 한 대답에서 《…남조선군대는 현재 수준으로 보아 외국의 동등무력의 2~3배의 병력을 물리칠수 있는 실력이 있는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남조선《서울신문》 1950년 6월 9일)

미군사전문가들은 무장을 대주고 미국식으로 훈련시킨 《남조선군을 아시아에서 제일의 군대》라고 추어주면서 괴뢰들에게 전쟁열을 고취하였다.(미국도서 《맥아더의 수수께끼》 일문판 258페지)

3) 침략무력의 공격집단편성

미제는 《2계단 전쟁론》에 따라 남조선괴뢰군으로 하여금 전쟁을 시작하게 하고 미군을 개입시키는 수법에 맞게 침략무력을 공격대형으로 편성하였다.

당시 38°선에는 5개 사단이 제1제대로 전개되였으며 3개 사단은 작전예비대로서 서울부근에 집결되여있었다. (일본도서 《조선전쟁》 83페지)

남조선군사령부와 미군사고문들은 오래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공할 준비를 하였다. 이 침공을 위하여 남조선군 총력량의 70%이상이 집중되였다. 이들은 이만한 력량으로 불의에 침공하면 조선인민군을 얼마든지 《격파》할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쏘련도서 《조선전쟁》1부 1959년 155페지)

1951년 5월 3~14일에 진행된 국회상원청문회에서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남조선군은 보급품이나 장비를 38°선에서 멀지 않은곳에 놓아두고있었다. 그들은 종심진지를 만들고 있지 않았다. 38°선과 서울사이의 이르는곳마다가 모두 병참지역이였다.》(미국도서《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69페지)

맥아더사령부의 정보국장이였던 월로우비는 《남조선의 전군은 몇주동안 비상상태였고 실제로 38°선을 따라 주둔하고있었다.》라고 고백하였다. (남조선잡지 《신동아》 1990년 7월)

조선전쟁개시직전 극동주둔 미군은 륙해공군으로 구성되여있었다. 그에 대한 지휘는 극동군사령관이 하였다. 참모부는 도꾜에 있었다. 륙군가운데서 7, 24, 25보병사단과 1기병사단으로 구성된 미8군이 일본에 주둔하고있었다. (쏘련도서 《조선전쟁》 1부 1959년 48페지)

서울에 기여든 미국방장관 로얄, 맥아더사령부 외교국장 시볼트는 《일본에 있는 미국군함과 비행기가 남조선측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게 될것이다. 때문에 해군과 공군에 관하여서는 당신들이 아무것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5페지)

3. 미제의 조선전쟁도발

1) 조선전쟁의 서막-38°선무장도발

남조선강점으로 조선을 분렬시킨 미제는 우리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장도발을 끊임없이 감행하였다.

1947년부터 전쟁도발직전까지의 3년반동안에 5,150여차의 무장도발을 감행하였다. 주로 공화국의 경비대와 남조선《정규군》간에 련대병력과 중무기까지 동원되여 전개되였던 38°선에서의 전투는 다분히 남조선측의 《전쟁로선》에 의해 고무되였다.(남조선잡지 《사회와 사상 》 1990년 6월)

38°선무장도발의 직접적인 조직자, 지휘자는 미국이였다.

1949년 10월 괴뢰륙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38°선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였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것이다. 남조선군의 진공은 오직 미군사고문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페지)

일본의 평론가 후지시마 우다이는 1975년 7월 4일 《조선에서의 미제의 전쟁도발책동은 흔히 조선전쟁발발로 불리우는 1950년 6월 25일에 돌발적으로 시작된것이 아니고 이미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부터 시작되였다.》고 평하였다.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충돌의 결과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전 여러해동안 반도 량쪽사이의 충돌은 계속되였으며 1949년에는 서울의 압력에 따라 그 격렬성이 더해갔다. 일부 조선문제전문가들은 전쟁이 사실상 그해에 시작되였다고 생각하고있다.(미국도서《조선전쟁;대답없는 질문》 5페지)

2) 전쟁도발전야의 위장과 기만

미제는 조선전쟁에서 불의성을 달성하며 전쟁도발의 책임을 우리 공화국에 넘겨씌우기 위하여 전례없는 기만과 위장공세를 감행하였다.

1950년 1월초 미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 코나리의 미국《방위최전선》에 관한 담화와 1월 12일 미국무장관 애치슨의 《미극동방위선》에 대한 《정책성명》을 통하여 미제는 마치나 남조선이 제놈들의 관심밖에 있다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책동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전쟁도발음모를 가리우기 위한 미제의 기만술책이였다는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1950년 2월 20일 이에 대해 우려와 의혹을 표시하는 주미남조선괴뢰대사에게 미국무성 동북아시아담당 국무차관보 월던 버터워드는 《미국이 남조선문제에 관해서 유엔의 다른 나라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고 따라서 남조선의 지위는 특정방향으로 설정된 관심의 선을 초월하는것》이라고 하였다. (남조선도서《한국외교비록》 211페지)

미제와 그 주구들은 주말휴식, 려행, 만찬회 등의 명목으로 고위급인물들의 움직임을 조작함으로써 전쟁도발의 시작을 위장하려고 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을 일으킨 그 시간에 모두 《주말휴식》이라는 명목밑에 자리를 떠나있었거나 전투력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행동을 하고있는것처럼 사태를 꾸며놓았다. (미국도서《맥아더의 수수께끼》 일문판 257페지)

6월 24일(토요일)아침 트루맨은 미주리주에서 처, 딸과 같이 조용히 주말을 지내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워싱톤을 떠났다. (미국도서《미국과 조선전쟁》 일문판 99페지)

덜레스는 24일에 맥아더와 만나고 관광을 하러 일본에 갔다. (일본도서 《조선전쟁의 발발》 70페지)

언제 터질지 모를 조선전쟁의 분화구앞에서 군사고문단 단장이 자리를 비우고 그의 대리인인 참모장까지도 도꾜에 가있게 한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조선전쟁발발때 미군사고문단 단장과 참모장이 작전지휘를 하지 않고 자리를 뜬다고 광고한것은 전쟁도발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서투른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도서《조선전쟁》 1966년 33페지)

미제의 각본에 따라 리승만도 전쟁도발직전에 비상계엄령의 해제와 괴뢰군의 외출, 외박의 허용, 만찬회 등으로 전쟁도발자의 정체를 가리우기 위한 기만과 위장공세를 음흉하게 감행하였다.

당시 괴뢰군 8보병사단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1선의 사단장으로서 비상상태에 있었다. 외출도 금지되였고 6월 25일 새벽 그냥 전투에 들어갔다.》(남조선잡지 《계》 1965년 6월)

3) 전쟁도발지령의 하달과 전쟁발발

조선전쟁준비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미제는 그 실행에 착수하였다.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북침전쟁도발준비상태를 현지에서 검열, 확정하고 전쟁개시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미국방장관 죤슨, 미합동참모본부 의장 브랫들리를 도꾜에 있는 맥아더사령부에로 그리고 미국무성 고문 덜레스를 자기의 특사로 남조선에 파견하였다.덜레스의 서울방문은 공격개시신호를 주고 이와 함께 미해공군이 지원한다는것을 최고위급에서 리승만에게 담보해주기 위한것이였다. (미국도서《조선전쟁의 력사》 상 일문판 99페지)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이번에 남조선을 방문한것은 북침준비상태를 직접 보고 부족점이 없다면 곧 북진을 단행하라는 트루맨대통령의 명령을 가지고왔다, 준비가 된 이상 북진을 하루도 늦출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본도서《조선전쟁사론》 8페지)

6월 21일 남조선에서 도꾜에 도착한 덜레스는 미국이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것이라는것을 예언하였다.(미국신문《뉴욕타임스》 1950년 6월 22일)

그가 념두에 둔 《적극적인 행동》이란 6월 25일 조선전쟁의 발발과 6월 27일 미국정부의 《태평양지역공산주의》에 대한 대규모간섭의 약속이였다. (미국도서 《비사조선전쟁》 일문판 41~42페지)

결국 덜레스가 현지에서 확정하고 미국대통령 트루맨이 최종적으로 비준한 전쟁비밀지령이 리승만괴뢰군에 하달되였다.

남조선괴뢰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1950년 6월 21일 1, 2전투사령부들에 25일 새벽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리였다.

당시 남조선괴뢰군 17련대 참모장교였던 한수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1950년 6월 24일은 토요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교들은 외출이 금지되고 전쟁명령을 대기할것이 지시되였다. 24일 밤에 25일 새벽을 기하여 38°선을 돌파하여 북조선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할데 대한 비밀명령을 받았다.》(일본잡지 《가이즈》 1953년 8월)

작전계획대로 남조선괴뢰군은 미군사고문들의 지휘밑에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전역에 걸쳐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4) 유엔의 비법적도용

미제는 전쟁도발자, 침략자로서의 정체를 가리우고 전쟁발발의 책임을 우리 공화국에 넘겨씌우며 조선에 대한 전면적무력침공을 감행하기 위하여 유엔의 이름을 도용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유엔안전보장리사회와 유엔총회에서 자기들에게 순종하는 많은 성원국들을 리용하여 유엔의 《권위자》가 무력침공을 하였다는것을 감추어보려고 하였다. (쏘련도서 《조선전쟁》 1부 1959년 85페지)

미제는 전쟁준비를 다그치는 한편 유엔의 간판밑에 미군의 전면개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미국무성에 《문건작성그루빠》를 미리 조직해놓고 유엔안전보장리사회와 총회에 제기할 《기초문건》과 채택될 《결의안》까지 작성해놓았다. (미국도서《조선전쟁의 력사》 상 일문판 162페지)

미제의 권모술수와 강도적인 요구에 의하여 유엔안보리사회 회의가 1950년 6월 25일에 소집되였고 여기에서 북침을 《남침》으로 단정하는 《결의》가 채택되였다.

유엔안전보장리사회는 《유엔조선위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무성의 성급한 요구에 의하여 소집되였다. (미국도서《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56페지)

리사회는 그 어떤 추가적정보도 없이 38°선에서 일어난 사태도 상세하게 알지 못한채 북조선에 《침략》의 딱지를 붙이려고 몹시 흥분한 미국의 제안을 강다짐으로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도서《조선전쟁의 력사》 상 일문판 128페지)

미제는 유엔안전보장리사회 《결의》들을 통하여 자기들의 침략책동을 《합법화》하려고 하였다.

명목상 미국이 유엔의 《명령》으로 싸움에 뛰여들었다. 실제로는 유엔이 미국의 압력으로 원조요청을 한것이다. 미군이 전투행동에 들어가고있다고 트루맨대통령이 성명한 2~3시간이후에 유엔은 남조선에 원조를 주도록 전체 성원국들에 호소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미국신문《미네아폴리스타임스》 1950년 7월 23일)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전쟁이 일어난 날인 1950년 6월 25일에 벌써 일본기지에 있던 전투폭격기들을 조선전쟁에 출격시켰다. 맥아더는 이 명령(트루맨이 공군과 해군을 조선에 파견할데 대하여 맥아더에게 준 명령-편집자)에 앞서 독단적으로 비행기를 조선에서 활동시키고있었다. (일본도서《조선전쟁》 70페지)

유엔안전보장리사회 《결의》들의 부당성에 대하여서는 이미 력사의 정확한 평가가 내려졌다.

미국은 의문스러울 정도의 신속성으로 유엔을 리용하여 자기들의 리기적인 리익에 너무도 밀착시킨 《결의》를 조작하였다. (프랑스 월간잡지 《레스플리》 1950년 8월)

일본의 력사가 가미 야후지는 자기의 저서 《조선전쟁》에서 《6월 25일, 6월 27일, 7월 7일의 3개의 유엔안전보장리사회 〈결의〉들은 사실상 미국의〈결의〉였다.》고 정확히 평하였다.

4. 조선전쟁도발진상에 대한 외곡, 날조책동

1) 전쟁도발준비를 가리우기 위한 책동

미제는 남조선을 강점한 첫시기부터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침략전쟁을 기정사실화하는 한편 그 준비를 다그칠 목적밑에 《남정》, 《남벌》허위선전공세를 미친듯이 벌리였다.

미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리승만괴뢰도당에게 《남조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는것을 세계가 인정하도록 해야 할 필요성》을 력설하면서 《남정》, 《남벌》허위선전공세를 감행하였다. (미국도서 《조선전쟁; 대답없는 질문》 44~45페지)

미제는 1948년 8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연 4차에 걸치는 남조선괴뢰군에 대한 숙청을 진행하면서 그 누구의 《남정》, 《남벌》정책에 동조하였기때문이라고 내외에 류포시켰다.(남조선도서《한국전쟁비사》 1권 1992년 80페지)

미제의 사촉을 받은 리승만은 괴뢰국방장관 신성모와 괴뢰참모총장 채병덕에게 《덜레스가 38°선에 도착하면 남조선군의 한 구분대를 북조선군으로 변장시켜 총을 쏘게 하며 북조선군의 기습으로 설명하도록 명령》하였다. (《서울 AP통신 특파》 1950년 6월 19일)

2)조선전쟁도발의 책임을 넘겨씌우기 위한 책동

미제는 조선전쟁발발을 《북의 기습》, 《전혀 뜻밖의 사변》으로 날조하기 위해 음흉하게 책동하였다.

이를 1950년 6월 25일 남조선주재 미국대사 무쵸가 미국무성앞으로 보낸 《첫 보고》를 통하여 실현하려고 꾀하였다.

미국도서《조선전쟁;대답없는 질문》은 무쵸의 《첫 보고》가 현실성과 과학성, 공정성이 없고 의혹들로 가득차있는데 대하여 구체적인 자료를 들어 폭로하였다.

무쵸의 《첫 보고》전보문을 받은 미국무장관 애치슨은 유엔주재 미국대표 그로스를 통해 유엔사무총장 트루그베리에게 유엔안보리사회의 소집을 요구하면서 미리 준비한 《결의안》도 넘겨주었다.

미제의 권모술수와 강도적요구에 의하여 밤 2시에 유엔안전보장리사회가 소집되고 부당한 《결의》가 채택되게 되였다.

조선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철저히 북침에 의해 일어났다는데 대하여 미제와 그 주구들자체가 인정하였다.

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 시작되였다. (일본《교도통신》 1975년 6월 25일)

조선전쟁방화자의 주역을 맡았던 맥아더는 《이 전쟁은 나의 계획이였다.》고 실토하였다.

미제는 전쟁과정에 우리 인민군대가 서울을 해방하고 압수한 기밀문건에 의하여 조선전쟁도발진상이 낱낱이 밝혀지자 한동안 입도 벌리지 못하고있다가 1951년 5월에 날조문건을 들고 나와 《6.25남침》을 《립증》하려고 하였으며 전쟁도발진상을 뒤집어 엎으려고 악랄하게 날뛰였다.

전후시기에도 미제는 조선전쟁도발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미 쓰던 수법들을 되풀이하는 한편 《정보자유법》에 따른 《비밀해제》놀음을 통한 《재조명》과 동유럽의 개방정책을 교묘하게 리용한 《교전쌍방간의 공동평가》를 들고나와 조선전쟁도발력사외곡책동을 집요하게 감행하였다.

미제는 랭전이 종식되자 미국식《철학》에 따라 힘의 립장에서 조선전쟁도발진상을 거세, 말살하려고 책동하였다.

미제가 제창한 조선전쟁도발력사《번복》이란 《강자》의 립장에서 저들의 리익에 맞게 조선전쟁도발진상을 뒤집어엎는 강도적론리이다.

미제의 조선전쟁도발력사《번복》책동의 리면에는 철두철미 랭전이 종식된 기회를 리용하여 조선전쟁도발의 책임을 우리에게 넘겨씌움으로써 우리 공화국을 《전범국가》로 몰아 압살해보려는 음흉한 속심이 있다.

미제와 그 주구들의 조선전쟁도발진상에 대한 외곡, 날조책동은 남조선강점을 영구화하고 세계제패를 위한 조선전쟁을 또다시 일으키려는데 목적을 두고있다.

* * *

력사의 진실은 가리울수도 없고 지울수도 없다.

미제가 제아무리 온갖 권모술수를 다 쓴다고 하여도 조선전쟁의 도발자, 침략자로서의 정체는 절대로 감출수 없다.

만약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이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끝끝내 《제2의 조선전쟁》을 도발한다면 선군으로 다져진 백두산혁명강군의 정의의 총검은 추호의 자비심도 없이 침략자들을 격멸소탕하고야말것이다.

주체99(2010)년 6월 24일
평양(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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