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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세계에 고발한다》
(평양 8월 24일발 조선중앙통신)24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개인필명의 론설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세계에 고발한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24일, 이날은 평범한 날이 아니였다.

지금으로부터 65년전 이날 일제는 해방의 기쁨을 안고 귀향길에 오른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태운 일본해군수송선 《우끼시마마루》를 바다에서 폭침시키는 야수적인 살인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폭침사건으로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히고싶어하던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그리운 조국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검푸른 날바다에 수장되였다.

수십년세월 일제의 식민지노예로 온갖 불행과 고통을 당한것만도 억울하기 그지없는데 조국이 해방된 후에도 일제에 의해 이런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하였으니 이 얼마나 통분할 일인가.

일제는 그야말로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살인악마이며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이다.

일본당국은 《우끼시마마루》폭침후 이 사건이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불가피한 사고》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건전과정과 체험자들의 이야기는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것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명백히 말하건대 이 폭침사건은 단순한 침몰사고가 아니라 일제에 의해 조작감행된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조선인집단학살만행이였다.

그것은 우선 일본당국이 직접 나서서 조선사람들을 고향에 보내준다고 하면서 거의나 강제로 승선시킨 사실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당시 《우끼시마마루》의 조선인승선과 출항은 일본정부의 허가와 지시밑에 군부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였다. 일본은 조선사람들에게 배가 부산으로 가는데 조선으로 가는 배편은 이것밖에 없다고 회유절반, 강박절반으로 사람들을 배에 태웠다. 결과 《우끼시마마루》는 정원을 훨씬 초과하는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을 태우고 오미나또항을 떠나게 되였다. 당시로 말하면 련합군의 명령으로 일본령해에서 100t급이상 되는 선박들의 항행이 중지되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0t급이 훨씬 넘는 《우끼시마마루》에 대한 승선과 출항이 승인되고 무난하게 이루어졌다.바로 여기에 일제의 조선인대학살참상의 계획적인 범죄적성격이 있다.

《우끼시마마루》의 항로를 놓고보아도 이 폭침사건의 진상을 똑똑히 알수 있다. 일본인들을 포함한 여러 증언자들의 고발에 의하면 《우끼시마마루》는 처음부터 부산이 목표가 아니라 폭침장소인 마이즈루항 앞바다로 항로를 정하고 떠났다. 1945년 8월 22일 조선사람들을 태우고 군항을 떠난 《우끼시마마루》가 부산으로 간다고 하면서 일본의 서부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교또부 마이즈루항가까이에 이르러 키를 돌린것은 일본의 말대로 물을 실으려고 한것이 아니였다. 그때 배에는 부산으로 가는데 필요한 연료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것은 애당초 배가 부산항까지 갈 계획이 아니였다는것을 명백히 말해준다. 폭발직전에 배에 탔던 일본인들이 부랴부랴 뽀트를 타고 달아난것도 폭침흉계를 사전에 통보받았기때문이였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이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일제가 이 사건을 《기뢰에 의한 폭침》으로 주장하는것도 완전한 거짓이며 날조이다. 폭침당일인 8월 24일로 말하면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는 항로의 기뢰해제가 끝난 시점이였고 《우끼시마마루》는 항경비대신호소로부터 안전신호를 받은 후에야 항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실지 이날 많은 배들이 이 항로를 따라 항행하였지만 사고가 난 배는 오직 《우끼시마마루》 한척뿐이였다. 많은 배들이 지나다녀도 폭발하지 않던 기뢰가 어떻게 되여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간 《우끼시마마루》에 부딪쳐 폭발하였겠는가.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시 반드시 있어야 할 물기둥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하였다. 더우기 기뢰는 한번밖에 폭발하지 않는데 이 배의 폭발시에는 여러번의 련속적인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은 《기뢰에 의한 폭침설》이 과학성과 객관성이 무시된 일제의 뻔뻔스러운 사기극에 불과하다는것을 보여준다.

사실들은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이 사전에 일제가 면밀히 계획하고 실행한 자작극이며 조직적인 조선인대집단살인사건이라는것을 증명해주고있다.

이 폭침사건은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이 얼마나 집요하고 야만적이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돌이켜보면 일제는 지난 세기초 조선을 날강도적으로 강점한 첫날부터 조선민족을 멸살시키라고 공공연히 떠벌이면서 우리 인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일제의 잔악무도한 조선인학살만행은 우리 나라에서뿐아니라 일본땅에서도 감행되였다. 일제는 탄광, 광산, 공장들과 수많은 군사기지공사장들에서 조선사람들을 짐승처럼 부려먹고는 집단적으로 학살하였다. 극악한 살인귀무리인 일제는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강점기간에 조선민족을 완전히 멸살시키지 못한것을 후회하면서 재일조선인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다. 그중의 하나가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이였다.

일제가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을 조작한것은 또한 저들의 반인륜적범죄행위의 목격자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그 범죄적책임에서 벗어나는것과 함께 군사대상물건설의 비밀을 영원히 흑막속에 묻어두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의 많은 피해자들은 혹가이도와 아오모리현 등 일본의 군사기지건설장들에서 노예로동을 강요당한 조선사람들이였다. 일제시기 군사대상들에서의 로동강도는 일반대상에 비하여 몇십배로 가혹하였을뿐아니라 공사가 끝난 후에는 《비밀보장》이라는 명목밑에 공사에 동원된 조선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살인행위가 그칠새 없었다. 오죽하면 혹가이도의 개척사를 연구한 한 일본인이 《혹가이도비행장의 활주로밑에는 조선사람들의 시체가 깔려있고 철도의 침목 하나하나는 조선〈징용자〉이다. 》라고 폭로하였겠는가.

이런 일제야수들이 저들의 패망을 계기로 군사기지건설장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선사람들을 고향으로 그냥 돌려보낼리 만무하였다. 일제는 해방된 조국땅에 돌아가게 되였다고 그처럼 기쁨과 희열에 넘쳐있던 순진한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집단수장하는 야만행위를 서슴지 않고 감행하였던것이다. 일제의 조선인집단살인행위를 꼽자면 끝이 없다. 1919년 3.1인민봉기와 1920년의 《경신년대토벌》, 1923년 간또대지진, 1926년 6.10만세운동때의 대학살 등 실로 일제가 감행한 조선인대학살만행은 그 야수성과 악랄성, 규모와 포괄범위에 있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전대미문의 살륙범죄였다.

이것은 침략과 살인기질이 몸에 배일대로 배인 일제야수들만이 저지를수 있는 추악한 특대형반인륜적죄악이다.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6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은 그 책임을 한사코 회피하며 그에 대한 사죄와 배상, 진상규명을 외면하고있다.

력사적사실은 그 무엇으로써도 감출수 없고 외곡할수도 없다.

마이즈루의 검푸른 바다에서 한을 품고 숨진 수많은 조선인령혼들은 오늘도 이렇게 부르짖고있다.

-살인악마 일제의 죄행을 절대로 잊지 말라.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백년숙적 일본을 천백배로 복수해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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