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2월 1일발 조선중앙통신)1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개인필명의 론설 《덮어버릴수 없는 일제의 <통감>통치죄악》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1906년 2월 1일은 과거 일제가 우리 나라에 잔악한 식민지통치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한 날이다. 이때부터 일제는 우리 나라에서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더욱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으며 그로 하여 우리 인민은 수십년동안 피눈물나는 노예살이를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가 날강도적인 수법으로 불법무법의 《을사5조약》을 날조한데 이어 우리 나라에 악독한 식민지통치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한 때로부터 105년이 되였다. 하지만 세계는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란폭하게 유린하고 우리 민족에게 전대미문의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일제의 죄악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일본반동세력은 과거 범죄력사를 외곡, 미화하고 정당화해보려고 획책하고있다. 이것은 어떻게 하나 과거죄악을 덮어버리고 그 청산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 교활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책동은 누구에게도 통할수 없다. 력사는 외곡할수도 지워버릴수도 없다. 우리 나라에 대한 과거 일제의 《통감》통치는 력사에 가장 악독한 범죄행위로 남아있다. 일제의 《통감부》설치배경과 《통감》통치의 내막이 그것을 낱낱이 까밝혀주고있다.
지난 세기 초엽 이미전부터 우리 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안을 구상하고있던 일제는 1904년 로일전쟁을 도발한 후 그 실현을 위한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섰다. 교활한 일제는 저들의 침략적정체를 가리우기 위하여 처음에는 조선에 대한 그 무슨 《보호》의 필요성을 떠들어댔다.이것은 한갖 기만이였다. 일제가 떠벌인 《보호》란 실지에 있어서 우리 나라의 국권강탈을 의미하는것이였으며 그것은 침략무력에 의한 군사적강점을 노린것이였다. 그러나 교활한 일제는 저들의 검은 속심을 감추고 허울좋은 《보호》라는 간판밑에 우리 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건을 하나하나 갖추어나갔다. 그 하나가 바로 《을사5조약》날조행위였다.
1905년 11월 일제는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서울을 완전히 장악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에서 고종황제와 여러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들은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정부대신들은 억류해놓고 찬동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무력의 뒤받침밑에 위협공갈과 강박, 사기협잡의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하였다. 이렇게 날조된 《조약》이 국제법상 완전무효임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뒤이어 그것을 턱대고 1905년 12월 이른바 《칙령》 제267호로 《통감부 및 리사청관제》를 공포하였다. 그 다음해인 1906년 2월 1일에는 서울에 정식 《통감부》를 설치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악랄한 식민지통치방식인 《통감》통치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통감부》설치후 일제는 우리 나라를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형식상의 《법적절차》와 조건을 갖추어놓기 위하여 책동하였다.
1907년 일제는 《통감》이 리조봉건정부의 《시정개선》에 관한 사업을 지휘하며 법령의 제정을 비롯한 중요한 행정상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것, 리조정부는 《통감》의 승인없이 고등관리의 임명 및 파면 등을 할수 없다는것, 조선의 사법사무를 보통행정사무와 구별시키며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조선관리로 임명하여야 한다는것 등의 내용을 담은 《정미7조약》을 날조해냈다. 일제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 나라의 내정권을 완전히 강탈해냈다. 그후 일제는 식민지통치기구인 《통감부》를 발동하여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해내는 불법무도한 죄행도 감행하였다. 《정미7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의 날조는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통감》통치의 침략성과 범죄성을 여실히 드러내보이였다.
일제의 《통감부》설치와 《통감》통치는 본질에 있어서 우리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란폭하게 유린한 로골적인 식민지파쑈통치였다.
일제는 《통감》통치를 강행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당시 일제의 《통감》은 이미전에 날조된 문서들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 외교관계와 관련한 법령이나 조약들을 정지, 취소시킬수 있는 권한, 《통감부》령을 발포하여 조선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일수 있는 권한, 무력사용을 명령할 권한 등을 가지고있었다. 그야말로 《통감》은 조선에 대한 립법, 사법, 행정, 군사통수권 등 모든 권한을 틀어쥔 최고통치자였다.
일제는 《통감》통치강화를 위해 수많은 무력을 끌어들여 우리 나라를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전변시켰으며 리조봉건정부의 왕권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켰다. 그들은 왕궁에 대한 《자유출입》을 중지시킨다는 이른바 《궁금령》을 《칙령》으로 발포하도록 강요하고 일본경찰들이 왕궁과 국왕에 대한 《호위》를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저들의 승인없이 조선사람들은 국왕을 만날수 없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왕의 손발을 얽어매고 저들의 통제권안에 넣었다. 이와 함께 일제는 우리 나라의 립법, 사법, 행정 등 모든 부문들에 《통감부》가 파견한 일본인들을 배치하고 그들이 직접 통치하게 하였다.
일제는 《통감》통치를 실시하면서 날강도적인 략탈과 민족문화말살, 우리 인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륙만행을 일삼았다.
일제는 이른바 《통감》의 《시정개선안》에서 국가재정과 궁중재산의 정리, 교육제도의 개정과 위생의 개선 및 농업, 공업, 광업 및 교통운수 등 각 분야에서의 《개발》을 표방하면서 토지와 농산물에 대한 대량적인 수탈체계를 확립하였으며 재정금융에 대한 지배, 략탈적인 《화페정리》, 광업, 림업, 수산업, 운수 및 체신, 무역에 대한 독점적지배를 강화하는 등 식민지적예속화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통감》통치시기 식민지적노예교육과 민족말살정책 등도 거리낌없이 강행하였다. 그들은 우리 인민의 애국심과 민족성을 빼앗기 위하여 1906년 《보통학교령》을 발포하고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요하였으며 1908년에는 《사립학교령》을 공포하고 반일적인 사립학교들을 강제적으로 페쇄하였다.
일제는 《통감》통치를 강행하면서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살륙하였다. 《통감부》는 말그대로 우리 인민에 대한 대량학살을 현지에서 지휘한 살인기구였다.
당시 일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에 방해로 되는 우리 나라의 반일애국자들을 《폭도》로 몰아붙이면서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일제《토벌대》는 《폭도토벌》의 구실밑에 조선의 주요도시들은 물론 산간벽지에까지 기여들어 모조리 불사르고 죽이는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살륙만행의 지휘자는 《통감》이였다. 당시 첫 《통감》이였던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는 《부대장으로서 <폭도토벌>(의병토벌)에 종사하고있는》 일제륙군장교들에게 조선의병을 교전단체로 인정하지 말고 지방소요의 주범으로 취급하되 무자비하게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통감》통치시기 일제의 범죄행위를 꼽자면 끝이 없다. 참으로 우리 인민은 일제의 《통감》통치로 막대한 인적, 물적피해를 입었다.
일제는 《통감》통치시기뿐아니라 우리 나라에 대한 40여년간에 걸치는 포악무도한 식민지파쑈통치기간 력사에 류례없는 특대형반민족적, 반인륜적죄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100여만명의 조선사람들을 살륙하고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성노예화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자연부원과 문화재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하였다.
이처럼 일본은 우리 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가해자이다. 남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가 그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하는것은 도덕적의무이며 국제관례이다.
우리 인민은 일본이 지난날에 저지른 죄악을 하루빨리 깨끗이 청산하고 우리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종식시킬것을 바라고있다. 조일관계가 개선되는가 못되는가 하는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과거청산여부에 달려있다.
일본은 오늘의 현실을 똑바로 보고 하루빨리 불미스러운 과거를 청산하여야 한다. 그것은 일본에도 리로울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