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2월 14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이주민집단이 정착한 곳에서 생활범위를 넓혀나간 모습을 보다 잘 보여주는것이 이따쯔께유적을 중심으로 한 후꾸오까평야에 있는 유적들이다.
이따쯔께유적은 죠몽문화시기로부터 야요이문화시기에로의 점차적이행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초기의 집자리는 나까강과 미까사강사이에 끼여있는 비옥한 충적지를 형성한 나까대지우에서 나타났다.그 주민집단은 점차 주변의 땅을 일구어 야요이문화시기 전기의 전기간 이 평야의 전 지역을 개간하였으며 전기말에 이르러서는 초기의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후꾸오까평야에 대한 지배권력을 확립해나갔다. 다시말하여 이따쯔께유적을 중심으로 전체 후꾸오까평야가 조선이주민집단의 후손들에 의하여 조선식으로 개척, 개간되여나갔다.
야요이문화시기 중기에 와서는 히에유적에서와 같이 상당히 큰 규모의 마을을 보게 된다.
그리고 후꾸오까평야의 정치적 및 경제적거점은 점차 나까대지로부터 가스가구릉지대에로 옮겨졌으며 점차적으로 계급이 발생되였다.
계급이 발생함에 따라 마을과 마을사이에 방어를 목적으로 한 환호(도랑)가 생기게 되였다. 그것은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고려한 구조물이기도 하였으나 또한 이웃마을과의 관계를 고려한것이기도 하다.
효고현 아마가사끼 다노유적도 히에유적 못지않게 큰 마을을 이루고있었다.
이와같은 사실들은 조선과 가장 가까운바다에 면한 충적평야지대에서 조선의 이주민집단이 자기의 생활범위를 넓혀나갔다는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 인구가 늘어났으며 또한 물질적부가 많아지면서 잉여생산물도 생겨났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은 곧 그 소유와 분배에서 불평등을 가져왔으며 그것은 점차 계급의 분화, 지배와 예속관계를 가져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