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3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8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국제민주녀성련맹 위원장 마르씨아 데 깜뽀스 뻬레이라의 글 《김정숙, 전세계녀성들의 귀감》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녀성들은 어느덧 101번째로 3.8국제부녀절을 맞게 된다. 3월 8일, 이날과 더불어 세계녀성운동의 진보가 이룩되고 1945년 12월에는 국제민주녀성련맹이 자기의 탄생을 알리였다.
돌이켜보면 반제자주, 평화와 민주주의, 녀성의 사회적권리를 위한 투쟁의 갈피갈피에 얼마나 많은 녀성들이 제나름의 모습과 흔적을 새겨왔던가.
력사가 기록하고 시대가 자랑하며 국민이 추억하는 이들은 분명 우리 녀성세계의 긍지가 아닐수 없다.
그 많은 녀성들중에 나에게 눈부시게 안겨드는 모습이 있다.
32살의 짧은 생애를 사시면서도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쌓으시고 그토록 아름답고 고귀하게 생을 빛내인 조선의 김정숙녀사!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김정숙녀사에게 매혹되였다.
녀성이 녀성에게 매혹된다는것은 쉽지 않다. 누구나 그러하듯 세계적인 녀성명인들을 숭배하며 나름대로 리상형을 모색하고 거기에 자신의 래일을 비쳐보던 나였다.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 드디여 나는 전세계녀성들이 따라배워야 할 위대한 귀감을 알게 되였다.
책갈피속에서도, 현실속에서도 찾을수 없었던 위대한 녀성을 알게 된것은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다.
3.8절을 맞는 뜻깊은 오늘 무딘 필을 세워 김정숙녀사에 대한 매혹의 감정을 터침은 국제민주녀성련맹 위원장의 의무리행으로 되며 동시에 현세기의 귀감녀성을 갈망하는 전세계녀성들을 위한 유익한 일로 될것이다.
1
대다수 조선인민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김정숙녀사의 생전의 모습을 뵈온적은 한번도 없다.
만나보지도 못하고 매혹된다는것은 무리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김정숙녀사의 생애는 너무나 전무후무한것이여서 백번 듣는것보다 한번 보는것이 낫다는 명구마저 설득력을 상실하게 한다.
내가 김정숙녀사에 대해 깊이 알게 된것은 2002년 국제민주녀성련맹 위원장직을 맡고 조선민주녀성동맹과의 사업에 관심을 두면서부터이다.
사실 우리 깜뽀스일가는 이미전부터 조선과 깊은 인연을 맺고있었다.
1960년대에 《10월8일혁명운동》이라는 조직을 뭇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오빠 끌라우디오 깜뽀스는 1993년 4월 조선을 방문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았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형제들을 모여놓고 흥분을 터놓았다.
…그 어떤 성인도 비길수 없는 자애와 풍만한 인정미, 무한히 소탈하고 겸허하신 풍모, 넓은 도량, 해박한 지식, 참으로 김일성주석이시야말로 누구나 반하지 않을수 없고 따르지 않을수 없는 위인이시다.…
격정에 넘친 오빠의 이야기에서 나는 주석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김정숙녀사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금할수 없었다.
위인의 곁에는 훌륭한 녀성이 있기마련이라고 했는데 김정숙녀사는 어떤분이실가.
다음해 4월에는 로싸니따형님이 주석을 만나뵙고 돌아왔다.형님은 빨찌산군복차림의 김정숙녀사의 사진과 여러권의 도서들을 보여주면서 녀사에 대한 경모의 감정을 열정적으로 터놓았다.
그 열렬한 경모심은 김정숙녀사의 탄생 90돐을 맞으며 《조선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께 경의를》이라는 시를 낳게 하였다.
동방조선에 찬란한 빛 뿌리는
빨찌산의 녀장군
김일성주석의 가장 가까운 전우이신
민족의 영웅 김정숙녀사
…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리
용감한 항일의 녀걸로
영원히 꺼질줄 모르는 아름다운 꽃으로
…
2005년 여름 조선민주녀성동맹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국제민주녀성련맹대표단의 평양방문은 김정숙녀사에 대해 많은것을 알게 해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10대의 소녀시절에 혁명의 길에 나서시여 18살에는 총을 잡고 10여년세월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신 김정숙녀사, 녀사의 일생은 총과 함께 시작되고 총과 함께 흘러왔다고 볼수 있다.
생각해보면 총과 녀성은 거리가 멀다. 예로부터 《전쟁은 녀성을 배제하였다.》는 말과 함께 총은 녀성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녀성들이 두려워한 물건이라고 할수 있다.
더우기 당시는 조선녀성들이 망국과 봉건의 사슬로 하여 2중3중의 억압을 받으며 바깥출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있던 때였다. 그런 시대에 단연 총을 잡고 나라찾는 성업에 한몸바칠 용단을 내린것은 참으로 놀랄만 한것이였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15년간에 걸친 조선의 항일무장투쟁은 국가적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외부의 도움도 없이 유격전으로 진행되였다. 상대는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하여 동방천지를 종횡무진하던 신흥군사강국이였다.
일본당사자들까지도 조선의 빨찌산을 두고 《창해일속》, 즉 바다속의 좁쌀알만 한 존재라고 비유했다니 빨찌산시절의 간고함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것이다.
녀사의 빨찌산생활은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총알에 눈이 달렸다고 할 정도로 신비스러운 사격술이며 수많은 적들을 단신으로 유인하여 부대의 안전을 지켜낸 이야기, 적의 대부대와의 접전에서 힘찬 노래선창으로 적들을 전률케 한 이야기…
또 국제련합군시절에는 전술훈련, 항공륙전대훈련, 도하훈련, 스키훈련, 무선통신훈련을 비롯하여 현대전에 대비한 각종 훈련에서 막힘이 없어 중국과 이전 쏘련의 한다하는 군사가들을 놀래웠다고 한다.
함께 싸운 녀투사의 말에 의하면 김정숙녀사는 남달리 장대한 체구를 지니신것도 아니고 전문군사교육을 받으신적은 더더욱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만인을 감탄케 하는 신비의 사격술과 그 어떤 정황도 능숙하게 감당할수 있는 출중한 군사실력을 소유하시여 녀장군이라고 불리우신것이였다.
세계녀성운동사에는 국제로동운동의 저명한 녀성활동가 로자 룩셈부르그며 3.8국제부녀절의 창시자 클라라 제트낀, 에스빠냐의 돌로레스 이바루리를 비롯한 녀성혁명가들이 있다. 이들의 투쟁방식을 보면 주로 시위나 집회, 계몽사업이나 저술활동 등 정치투쟁에 많이 치우쳤다고 생각한다.
또 력사에는 프랑스의 자유와 독립의 상징인 쟝느 다르크나 인디아의 항전영웅 라크슈미 바이, 로씨야의 《처녀기병》 두로바처럼 남성들 못지 않게 싸움터에서 용맹떨친 녀걸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이 무훈담들은 한두해 혹은 어느 한 전투와 관련된것들이다.
그러나 김정숙녀사는 10여년세월 총을 잡고 전장을 누비며 대적과 맞서 싸우신 녀장군이시였다.
나도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는 투사라고 자부하는터이지만 머리가 숙어진다.
예로부터 장군이라는 말은 남성과 통했다.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성시의 수호신》, 《불패의 녀전사》와 같은 그리스신화속의 장수는 있어도 력사속에 실재한 녀장군은 없었다.
녀성들은 육체적한계로 하여 군사분야에서는 남자들을 초월하기 어려운것이다. 그래서 뛰여난 녀성은 많아도 장군으로 이름을 남긴 녀성은 없는것이다.
현대조선력사가 함축되여있는 조선혁명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나는 한상의 그림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항일의 나날 대사하치기라는 곳에서 있은 실재한 사실을 형상한것이라고 하였다.
바위우에 높이 올라 전투를 지휘하시는 조선빨찌산대장 김일성주석, 그이의 가까이로 총을 겨냥하고 은밀히 기여드는 대여섯놈의 적병들, 위기일발의 순간에 몸을 날려 방패처럼 주석을 막아나서며 으스러지게 틀어잡은 싸창으로 적들을 쏴눕히시는 김정숙녀사…
그 순간은 불과 몇초밖에 안될것이다.그러나 그 한초한초는 조선혁명의 승리와 민족의 운명이 지켜진 순간이였다.
나는 작품의 미술적가치에 앞서 세계 그 어느 위인전, 영웅전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전설적인 녀장군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이 그림은 오늘 우리 브라질은 물론 세계 각국의 출판보도물들에도 광범히 실리고있다.
대사하치기뿐이 아니였다.항일의 수많은 전구마다에서 녀사께서는 김일성주석의 신변에 닥쳤던 위험들을 한몸 그대로 육탄이 되여 막아주셨던것이다.
녀사께 있어서 김일성주석은 단지 군사령관만이 아니였다. 주석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수해야 할 조선의 심장, 전체 조선민족의 운명이시였다.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고 천대받는 인민들을 구원하는 길이 다름아닌 민족의 영웅을 잘 받들어모시는데 있다는것을 생활과 투쟁의 진리로 체득하셨기에 녀사께서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 불멸할 업적을 쌓으실수 있었다. 조선식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수령결사옹위》라는 거대한 업적이다.
수령결사옹위의 이 신화적형상을 재현한 동상은 지금 조선의 일류군사학교 교정에도 세워져있다고 한다. 수령결사옹위정신의 상징으로 되여 수천수만의 수령옹위투사들을 키워내고있는것이다. 그러고보면 세계의 권위있는 군사가들속에서 군정신의 절정으로 격찬되고있는 조선의 수령결사옹위정신은 바로 김정숙녀사에 의해 창조된것이였다.
참으로 조선의 문학예술계가 수십수백편의 시와 소설, 영화와 미술작품에 담아 노래하고 또 노래하는 녀사의 업적중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김일성주석의 신변을 한목숨 내대고 보위한 그것이였다.
녀사가 아니였다면 김일성주석의 존함으로 빛나는 조선의 어제와 오늘, 래일에 대해 생각할수 없을것이다.
또한 진보적인류는 20세기 자주시대의 위대한 거성의 출현을 보지 못했을것이다.
조선의 김정숙녀사가 항일의 전장에서 영웅적위훈을 떨치실 때 이전 쏘련의 근 80만명의 애국적녀성들은 파시즘을 반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다.그들중 86명의 녀성군인들이 파쑈와의 싸움에서 세운 불멸의 공적으로 쏘련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86개의 영웅메달을 다 합친다 해도 녀사의 업적을 대신할수는 없을것이라고 생각된다.
녀사의 유해가 안치된 평양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메달이 빛을 뿌리고있다.
녀사의 생존시에 력사가 드리고 조국이 드리고 인민이 드리고싶었던 영웅메달이다.
2
맑스의 딸은 수기에서 이렇게 쓴바 있다.
《엔니 폰 웨스트팔렌(맑스의 부인)이 없이는 맑스가 그와 같은 인물로 될수 없었을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력사에는 로동계급의 수령들과 일생을 함께 한 훌륭한 녀성들에 대한 감동깊은 일화들이 적지 않다.
맑스의 부인도, 레닌의 부인도, 손문의 부인도 혁명에 바친 생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후세에 그 미거가 전해지고있다. 그들은 부인이기 전에 견결한 혁명가였고 사상적동지였다.
그러나 력사는 김정숙녀사와 같이 수령의 사상과 위업뿐아니라 수령의 안녕, 건강을 위해 자기를 깡그리 불태운 녀성을 알지 못하고있다.
나는 지금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을 다시금 펼쳐보며 이 글을 쓴다.
2007년 4월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된 국제민주녀성련맹 제14차대회에서 조선녀맹일군들을 통해 얻은 에스빠냐어문판이다. 까라까스의 짧은 밤마저 잠들수 없게 했던 회고록에는 주석께서 수십년세월이 흘렀어도 정녕 잊지 못해하신 이야기가 있었다.
빨찌산시절 어느 겨울밤이였다고 한다.
뼈속까지 얼어드는 얼음물에 주석의 옷을 빨아 우등불가에 말리시던 녀사께서는 불의에 적들이 달려들자 서슴없이 젖은 옷을 몸에 품으시고 행군길에 오르시였다.
긴 밤 무서운 혹한속에서 온몸의 열기를 깡그리 바쳐 말린 옷가지를 들고 김일성주석앞에 나타나신 녀사의 얼굴은 너무 얼어들어 파랗게 질려있었다. 이 경이의 사실은 끝내 청년장군 김일성주석을 울리였다.…
조선빨찌산들의 회상에 의하면 그때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것은 전투나 행군이 아니라 배고픈 고생, 추운 고생이였다. 《무서운 혹한》으로 표현되는 추위는 령하 40℃를 오르내리였다고 한다.
적도기후대에 가까이 놓인 우리 브라질에서 년평균기온은 25℃정도이다. 가혹한 추위를 체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런 속에서 젖은 옷을 몸에 품어 말리울 생각을 하였다는것은 사실 감동이상의 의문이였다. 가정을 이룬 나의 두 딸 마리야나와 모니까도 같은 생각이였다.
주석께서도 젖은 옷가지를 몸에 띠고 말리웠다는 말을 난생처음 듣게 되였다고 하시며 이렇게 회고하시였다.
《생전에 우리 어머니도 해보지 못한 일을 그가 했다는 생각을 하니 나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습니다. 친어머니도 해주지 못한 일을 스스로 걸머지고나서서 자신을 희생시킨 김정숙의 동지애,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기 사령관에 대한 혁명적인 동지애인 동시에 인간 김일성에 대한 뜨거운 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친어머니도 해주지 못한 일!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이 천사에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것 세가지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천사가 드디여 찾아낸 세가지란 어린이의 맑은 웃음과 향기로운 장미꽃, 어머니의 사랑이였다.
그러나 하느님앞에 그것들을 내놓았을 때 어린이의 웃음은 이미 로인의 주름진 얼굴로 바뀌여있었고 장미꽃은 볼품없이 시들어있었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있는것은 어머니의 사랑뿐이였다.
바로 그 어머니의 사랑을 초월한 젖은 옷이야기가 김정숙녀사에 의해 생겨난것이였다. 혁명의 수령을 위해 바치는 혁명가의 헌신이였다.
이 지극한 헌신은 녀사의 전생애를 관통한 빛이였고 넋이였다.
녀사께서는 조선이 해방된 후에도 변함없이 주석의 호위전사, 충직한 동지가 되시여 주석의 건국위업을 받들어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시였다.
조선민주녀성동맹이 발행하는 잡지《조선녀성》에 실린 자료에 의하면 녀사께서는 해방후 4년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무려 수백개 단위를 700여차나 찾으시며 주석의 사업을 보좌하시였다고 한다.
실지로 우리가 조선방문시 들려보았던 공장과 농촌마을, 학교와 병원, 탁아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참관지들에는 녀사의 헌신의 자욱이 새겨져있었다.그 업적을 길이 전하고저 조선인민은 여러곳에 그이의 존함을 모시였다.
김정숙군, 김정숙해군대학, 김정숙사범대학, 김정숙평양제사공장, 김정숙료양소, 김정숙탁아소…
가정일은 녀성의 본분이다.그러나 이것은 보통녀인들에 한한것이다. 우리 브라질만 놓고보아도 약간한 권력이나 재부만 있어도 다른 사람을 데려다 집안일을 시키는것이 상례이다. 하물며 한 나라 수상의 부인이면 호화로운 저택에서 온갖 시중을 다 받으며 호의호식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녀사는 주석의 부인이시기 전에 정성이 지극한 주부이시였다.주석의 식사대접은 말할것도 없고 양말이나 장갑도 자신께서 떠드리시였다 한다. 주석께서 좋아하시는 조선의 민족식품인 메주장과 김치 담그는 일까지도 품이 많이 들었지만 직접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드시였다.
댁에 찾아와 녀사를 처음 뵙는 많은 사람들은 녀사를 식모녀인이나 친척녀성으로 잘못 알군 하였다.
주석을 위한 일은 비록 자그마한것일지라도 제손으로 지극히 마음을 쏟고싶은것, 주석을 위한 일은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고 지어 생명까지도 바치시려는 녀사의 헌신이 이런 일화도 남겼을것이다.
김일성주석의 부인이시기에 앞서 가장 충직한 동지로 사시고 빨찌산의 장군이시기에 앞서 가장 충직한 호위전사로 한생을 사신 녀사의 고귀한 생애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있는가.
다시 회고록에 실린 김일성주석의 추억을 적어본다.
주석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신 1948년 9월 9일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댁에 들어오신 주석께서는 녀사께서 성의껏 차려드린 식탁앞에 앉으시였다.
그동안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많은 수고를 했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여태 고생만 시켰는데 오늘은 내가 한잔 부을테니 마시오라고 하시며 주석께서는 손수 잔에 술을 부으시였다.
그때 녀사께서는 당을 창건하고 군대를 창건하고 공화국을 창건하시여 한생에 쌓인 꿈을 다 풀어주시였다고, 그것이면 더 바랄게 없다고 목메여 말씀드리시였다.
녀사의 꿈, 녀사의 행복은 바로 그것이였다.김일성조선의 번영과 인민의 행복이였다.
녀사에게 있어서 주석은 자신만이 아닌 전체 조선인민을 위한분이시였고 주석을 위한 헌신은 곧 전체 조선인민의 행복을 위한 헌신이였다.
주석께 바치는 지극한 충정과 헌신에는 바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있었다.
뭇녀성들과 대비조차 할수 없는 비범특출한 녀사의 인생관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있었다.
내가 만나본 한 녀맹일군의 말에 의하면 조선민주녀성동맹이 창립되였을 때 전체 조선녀성들은 녀사께서 위원장직을 맡아주실것을 열렬히 청원했다 한다. 그러나 녀사께서는 마다하시였다. 자신은 주석의 전사일뿐이라고, 자신에게는 주석의 사업을 보좌하는 일이 가장 영광스럽고 보람있는 일이라고 하시며 한생을 보통녀인으로 사시였다.
녀사는 그 어떤 공직도 지니지 않으셨고 자신의 필명으로 글 한건 남기지 않으셨다. 수상의 부인이라는 응당한 부름은 말할것도 없고 《녀사님》, 《사모님》이라는 가장 단순한 호칭마저 거절하시였다.
그 어떤 공직이나 명예보다 주석의 안녕을 지키고 보좌해드리는 전사의 위치가 녀사에게는 최상의 영광이고 긍지였다. 녀사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자신의 인생가치와 의미를 찾았던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녀사의 한생이 짧으신 32살에 끝난것이 아니라면 오늘의 녀사는 어떤 모습일가.
나는 단언하고싶다.
세계가 우러르는 주체의 태양 김일성주석을 받든 김정숙녀사의 모습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전사의 모습일것이라고…
그 모습은 수령과 녀성이라는 신비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뿌릴것이다.
3
새 세기의 초 세계언론계는 김정일열풍으로 들끓었다. 신비의 장막에 싸여있던 조선의 김정일령도자께서 력사적인 로씨야방문을 진행하신것이였다.이무렵 하나의 짤막한 보도가 우리 브라질신문 《오라 도 뽀보》에도 실렸다.
《김정일국방위원장 로씨야녀기자의 질문에 대답, 가장 절친한 사람으로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꼽다.
어머니는 녀성혁명투사이시였습니다.어머니는 아들의 일이 모두 잘되기를 소원하시였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세계의 이름있는 정치가들, 국가수반들의 취미나 성격, 사생활이 호기심많은 기자들의 특등뉴스거리로 되는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한편의 기사는 나의 심경을 크게 흔들었다.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에 대한 김정일령도자의 추억은 과연 무엇이였을가.
어머니는 인생의 첫 스승이다.
어머니는 걸음마를 떼여주고 모국어를 배워주고 생활의 원리를 가르쳐주는 교육자이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과 교양은 한생의 뿌리가 되며 인격과 인생관을 형성하는 정신적자양으로 된다.
그래서 위인의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 생겨났을것이다.
조선인민이 조종의 산으로 부르는 백두산에는 김정일령도자께서 탄생하신 고향집이 있다. 어머니에 대한 김정일령도자의 추억은 바로 이 작은 집에서부터 시작된것이였다.
백두산밀영고향집에 가볼수 있는 행운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통나무를 쌓아 네귀를 맞추어 지은 집은 너무도 소박하였다. 그러나 벽에 걸린 유격대배낭이며 쪽무이포단, 작은 책상우에 놓여있는 나무권총 등에서는 숭엄하고 비범한 그 무엇이 느껴졌다.
쪽무이포단에 대한 강사의 이야기가 가슴을 쳤다.
김정일령도자의 탄생은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물론 전체 조선인민의 기쁨이고 환희였다. 그러나 그때 밀영에는 새 생명을 감쌀만 한 변변한 천도 없었다. 하여 녀전우들이 자기들의 군복에서 한줌한줌 솜을 뜯어내고 자투리천을 모아 쪽무이포단을 만들었다 한다.
세 자식을 낳아 키운 어머니인 나로서 쪽무이포단은 무척 마음에 걸렸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무엇보다 남 못지 않게 잘 먹이고 잘 입히고싶은 마음에서 표현된다. 자식들에게 좋은 옷, 맛있는 음식, 유족한 생활을 갖추어주고싶은 마음은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된 심리인것이다.
사실 총잡고 싸우는 군인의 몸이였어도 녀사께서는 출산과 양육에 유리한 지역이나 민가를 택하실수도 있었을것이다. 더우기 녀사는 빨찌산사령관의 부인이 아니신가.
그러나 녀사의 심중에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감정과는 대비조차 할수 없는 숭고한 뜻이 있었다.
김정숙녀사에게 있어서 김정일령도자는 아버님이신 주석의 숭고한 위업을 이어 빨찌산의 아들, 민족의 아들이 되여야 할 귀중한 몸이였다.
그래서 안온한 저택의 포근한 요람이 아니라 굳이 민족해방성전의 총포성 울리고 눈보라 사나운 험한 산중의 작은 귀틀집에서 쪽무이포단에 아드님을 안아 키우시였던것이다.
그 고결한 뜻은 녀사께서 불러주시던 자장가에도 담겨있었다.
아가아가 자장자장 어서 자거라
어서 자라 속히 자라 총칼을 메고
조국해방 만세소리 활발한 곳에
너 앞서고 나 뒤에 나가 싸우자
자장가는 아이들의 단꿈을 불러오는 노래이다. 세계 3대자장가라고 하는 모짜르트나 슈베르트 그리고 브람스의 자장가에는 아침이 올 때까지 락원의 단꿈을 꾸며 편히 잠자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반영되여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들의 행복한 미래를 바라며 꽃과 별과 꿈의 나라를 자장가로 불러올 때 나라의 해방이라는 위대한 꿈, 애국의 꿈을 어리신 아드님께 심어주신 김정숙녀사!
뜻깊은 자장가를 마음속으로 외워보느라니 김정일령도자의 제일애용품이였다는 나무권총도 류다르게 안겨왔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어린 자식의 손에 자신의 권총부터 쥐여주셨다 한다. 그리고 총다루는 법을 익혀주시면서 이 총이 나라를 찾고 나라를 지킨다고 깊은 의미를 담아 말씀하군 하시였다는것이다.
그러고보면 나무권총은 결코 장난감이 아니였다.
오늘 조선을 지키고 번영하게 하는 주석의 총대중시사상은 벌써 그 시절에 녀사에 의해 김정일령도자께 심어진것이라고 생각된다.
천고밀림속의 소박한 귀틀집, 밀림을 흔드는 바람소리도 골안을 메우는 새소리, 물소리도 숭엄한 그 무엇을 안고 울리는 이곳은 쉬이 떠날수 없는 너무나 신성한 곳이였다.
고향집뜨락에서 가진 《조선의 소리》녀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백두산은 김일성주석의 불멸의 혁명업적이 깃든 혁명의 성산이며 선군령장의 웅지가 태여나고 자라난 자주시대의 위대한 성지라고 격찬한것은 그러한 리유에서였다.
이 성지에서 찍은 기념사진은 지금 싸웅 빠울로의 나의 집에도, 련맹청사의 내 방에도 걸려있다.
동행했던 조선녀류작가의 말에 의하면 녀사께서는 조선이 해방된 후에도 군부대나 군사학교를 찾아가실 땐 어린 김정일령도자를 꼭꼭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옷을 해입혀도 장군복을 지어입히셨다고 한다. 장차 조선의 장군이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였다.
하기에 김정일령도자께서는 어린시절 군사놀이를 제일 즐겨하시였고 커서 무엇이 되겠는가고 묻는 사람들의 물음에 《아버님처럼 장군이 되겠다.》고 대답하시여 미래의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시였다는것이다.
녀사의 빛나는 생애를 그린 장편소설의 저자인 그는 녀사께서 아드님께 남기신 유산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생전에 늘 아드님께 앞으로 크면 자신의 권총을 물려주시겠다고, 아버님처럼 훌륭한 장군이 되여야 한다고 당부하군 하시던 김정숙녀사께서는 돌아가시기 몇시간전에 한벌의 군복을 내놓으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 조국해방의 최후공격을 준비하시던 때에 입으셨던 군복이였다.
돈도 아니고 재부도 아니였다.
녀사께서 물려주신 자신의 권총과 주석의 군복은 백두산장군의 대를 영원히 총대로 이어가라는, 그것으로 조선을 지키고 세상에 떨쳐야 한다는 위대한 념원이 담겨진 귀중한 유산이였다.
령토도 크지 않고 인구도 많지 않은 나라 조선을 그 어느 대국도 감히 범접 못하는 강대한 나라로 만들게 할 억만금에도 비길수 없는 유산이였다.
김정일령도자께서 어머니와 함께 계신 나날은 불과 일곱해 일곱달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의 한생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다. 그러나 김정일령도자께 있어서 그 일곱해 일곱달은 위대한 어머니의 손길아래 제국주의련합세력과의 전무후무한 대결전에서 련전련승의 업적을 이룩한 불세출의 위인, 선군령장의 풍모와 자질이 갖추어진 귀중한 나날이였다. 평범한 어머니들의 백년, 천년의것과도 바꿀수 없는 위대한 사랑을 받아안은 력사의 나날이였다.
…나는 어머니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반세기이상이라는 세월도 정녕 지울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속에는 그 위대한 사랑에 대한 고마움이 뜨겁게 담겨져있었던것이다.
오늘 위대한 선군태양으로 만민의 칭송을 받으시는 김정일령도자께서는 탁월한 선군정치로 치렬한 반미대결전에서 사회주의조선을 수호하시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체의 사회주의강성대국을 건설하고계신다.
아드님의 위대한 업적은 어머님의 념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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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는 세상에 너무나 알려지지 않았던 녀사,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쌓으시고도, 그토록 아름답고 고결한 생을 사시면서도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계신 녀사…
그러나 력사는 그 위대한 생애를 자기의 갈피에 금문자로 새겼다.
진보적인류는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했다.
세상을 둘러보면 메히꼬 김정숙교육문화연구소조, 뻬루 김정숙동지혁명활동연구협회, 로씨야 김정숙명칭녀성동맹, 뜌니지 김정숙학급, 몽골 김정숙유치원 등 곳곳에 녀사의 존함을 단 단체들이 있다.
조선의 명산 묘향산에 자리잡은 국제친선전람관에 가면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백두산의 위대한 장군 김정숙녀사각하를 칭송하여!》라는 글발을 새긴 축기며 유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 등 녀사께 세계 여러 나라의 단체들과 인사들이 올린 수많은 선물들을 볼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아메리카에서만도 에꽈도르 까냐르주 뜨론깔시와 메히꼬 뿌에블라주, 뻬루 우아쵸시 등에서 녀사를 명예시민으로 모시고있으며 녀사의 탄생일과 서거일에는 우리 브라질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에서 훈장과 메달을 드리고 출판보도계는 시간과 지면을 아끼지 않고있다.
이것은 김정숙녀사에 대한 인류의 가장 경건한 추억이며 영원무궁한 칭송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김정숙녀사는 혁명가로서,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풍모를 최고의 높이에서 체현하신 전세계녀성들의 귀감이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