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9월 16일발 조선중앙통신)16일부 《민주조선》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조선은 일본의 문화발전을 추동한 나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에 《일자지사》라는 말이 있다. 글한자 깨우쳐주었는데 일생을 스승으로 모시였다는 말이다.
하다면 일본의 문화발전에 거대한 기여를 한 우리 나라에 대해 일본은 어떻게 대해야 할것인가. 제대로 되자면 일본은 대를 이어가며 우리 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해야 할것이다.
그만큼 일본의 력사적발전은 우리 나라의 문화적영향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일찌기 대동강문화를 꽃피우며 세계에 자랑할만 한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우리 인민은 일본의 문화발전에도 특출한 기여를 한것으로 하여 세계문화발전사의 한페지를 당당히 장식하고있다.
일본문화재들에 비낀 조선사람들의 슬기와 재능
일본에 가면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법륭사가 있다. 법륭사의 금당에 그린 벽화는 우리 나라의 경주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굴과 함께 동양 3대미술품의 하나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있다.이 걸출한 미술작품은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 고구려화가 담징에 의해 창작된것이다.모두 12개의 벽면으로 된 금당의 벽화는 담징이 그린 창작품인데 그중 특출한것은 제6호벽면의 《아미타정토도》이다. 이 그림들은 그린 때로부터 천여년이 지날 때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여있어 세계적인 보물로, 만고의 미술품의 하나로 되여왔었다. 그러다가 1949년 1월 법륭사가 불탈 때 이 벽화도 소실되였다. 1968년에 일본의 수많은 일류급화가들이 원상대로 복구한 법륭사금당벽에 벽화를 다시 그리기는 했지만 원화보다 못하다는것을 그들자신이 인정하고있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이 건축예술의 최고경지에 도달한 사원이라고 자랑하는 법륭사자체도 조선사람들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다.
법륭사가 일본에 일떠선것은 A.D.607년이였다.당시는 일본의 녀왕인 추고왕의 사위 성덕태자가 섭정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시기였는데 그는 우리 나라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많은 기술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기술과 문화를 보급하였다.
바로 법륭사도 이 시기 백제에서 건너간 사원건축미술가들의 집단에 의하여 8년동안 건설된 일본최대의 사원이였다.
따라서 법륭사는 건축양식이 백제의 7당가람의 건축형식을 그대로 닮은것이 특징이다.법륭사는 금당(황금으로 장식한 불당)인 중심불전을 비롯한 5층탑, 중문, 회랑 등으로 구성되여있고 강당, 서실, 동실, 북실, 고루, 종루를 비롯한 여러가지 형식의 건물들로 이루어져있다. 그중에서도 금당은 가장 화려하고 예술성의 최고경지에 이르는 중심건물의 하나였다. 일본승려들과 백제건축가들은 한결같이 불교문화의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고 또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불교를 전파시킨 고구려의 유능한 예술가만이 금당안팎의 벽면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감당해낼수 있다고 믿고 담징을 특별히 초청해왔던것이다.
법륭사뿐이 아니다.
일본의 교또시 광륭사에 가면 일본사람들이 국보 제1호로 치며 일본에서 가장 값진 문화재로 세상에 자랑하고있는 나무조각《미륵반가사유상》이 있다.
한때 프랑스의 문화상을 지낸바 있는 앙드레 말로는 지구최후의 날을 맞아 비상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3대보물로 《미로의 비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몬나리자》상과 함께 이 《미륵반가사유상》을 꼽았다.도이췰란드의 철학자 안스페르스는 이 반가상을 보고 《지구상에 있어서 모든 시간적인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빚은 인간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가장 원만하며 가장 영원한 모습의 구현》이라고 격찬하였다.
그런데 바로 지구상의 으뜸가는 이 보물이 바로 조선에서 건너간것으로 인정되고있어 세상사람들을 놀래우고있다.
이 반가상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것이라고 보는 근거는 나무조각의 재료가 우리 나라의 고유한 홍송나무이라는것과 그 조각법이 겉에서 안으로 파들어가는 일본식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파나오는 조선식이라는것이다.
이로부터 일본사람들자신도 이 보물이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창조된것이라는데 대해 인정하고있다.
일본사람들의 스승으로 된 조선사람들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문화재를 건설해주었을뿐아니라 그들의 스승이 되여 직접 교육활동을 벌리고 기술을 가르쳤다.
오늘도 일본사람들이 대를 두고 잊지 못해하며 그 공적을 길이 칭송하는 왕인박사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일본오사까현 히라가마시에는 왕인이라고 부르는 백제사람의 묘와 일본인들이 왕인의 공적을 칭송하여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세운 묘비가 있다. 지금도 히라가마시에서는 해마다 일본사람들이 그의 묘앞에서 제사와 《왕인묘역봉축행사》를 년례행사로 성대히 진행하군 한다고한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전 일본에 초빙되여간 왕인은 일본왕태자의 스승이 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백제의 발달된 기술과 공예를 전수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력사책들인 《니혼쇼기》, 《고지기》까지 자세히 기록하고있다.
왕인의 묘비에는 《천고의 왕인박사위업이야말로 끝이 없다. 여기 비석을 세우는것은 오직 그의 끼친바 덕에 보답하려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동방의 문화에 천만년 보익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이다.》라고 새겨져있다고 한다.
왕인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경모심이 얼마나 높았던지 일본에서 조선정복을 노린 《정한론》이 대두되여 조선침략론이 한창이던 때에 이와무라 에이슌이라는 일본사람이 왕인의 묘를 찾아 그의 공덕을 칭송한 다음 《누가 <정한론>을 주장한단 말인가. 옛 스승 왕인박사의 은혜를 잊지 말지어다.》라고 《정한론》제창자들을 단죄규탄하였었다고 한다.
일본의 국호도 우리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졌음을 력사는 말해주고있다.
예로부터 태양을 숭상해온 우리 선조들은 나라의 이름을 아사달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해가 솟는 땅 즉 해솟는 아침의 땅을 의미한것이다.
자기 조국을 해솟는 아침의 땅으로 여겨온 우리 조상들은 동쪽에 있는 일본땅을 해가 돋는 곳의 밑이라는 의미에서 태양을 의미하는 일자에 밑을 의미하는 본자를 결합하여 일본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일본이라는 말은 고조선때부터 우리 선조들이 일본의 국호로서가 아니라 일본땅자체를 가리켜 지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우리 조선사람들이 만들어낸것이라는것은 일본사람들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07년에 만들어진 《일본지명사서》에서는 일본이라는 말은 조선사람들이 처음 만든것이라고 하면서 일본사람들이 그 이름이 아름답고 어울린다고 하여 《만고불변의 국호로 삼았다.》고 씌여져있다. 당시 일본학자들의 론문에서도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은 백제때 조선사람들이 쓰기 시작한것을 일본사람들이 그 이름이 아름다와 국호로 삼았다고 지적되여있다.
이러한 력사적사실들은 높은 문화수준을 지녔던 우리 선조들이 일본땅에 진출하여 발전된 문화를 전파하였을뿐아니라 일본의 나라 이름마저도 지어주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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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서 렬거한 력사적사실자료들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문화발전에 영향을 준 극히 일부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사람들이 민족옷이라고 즐겨입는 《기모노》도 고구려옷에서 기원되였고 도자기만드는 방법, 옷을 만들어 입는 방법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재간과 기술들이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일본사람들에게 전파되였음을 력사는 전하고있다.
하기에 일본의 한 학자는 《일본국보라고 세계만방에 자랑하고 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다 그 미를 칭찬하고있는 작품의 거의 모두가 대체 누구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인가.그중에서도 국보중의 국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될 거의 모두가 조선민족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이는 력사가들도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사실이다》라고 고백한바 있다.
력사는 우리 조선민족이 일본의 력사발전을 추동하고 문화를 가르친 스승의 나라라는것을 너무도 명백히 실증해주고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조선에 대하여 덕을 덕으로 갚지는 못할 망정 악으로 대하는 배은망덕한짓을 감행하였다.
세상에 덕을 베푼 나라에 대해 악으로 대한 나라는 유독 일본뿐이다.
오늘도 일본반동들은 조선에 대한 저들의 과거범죄의 력사와 적대시정책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 대신 력사를 외곡하고 나아가 독도령유권주장과 같은 파렴치한 령토팽창야망을 추구하면서 도덕적범죄를 일삼고있다.
이것은 전체 조선민족의 치솟는 격분을 자아내고있다.
도덕적으로 저렬하고 배은망덕한 일본의 대조선적대시정책에 대해 력사는 반드시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야말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