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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조선 《을미사변은 일본의 대조선침략정책의 직접적산물》
(평양 10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8일부 《민주조선》에 실린 개인필명의 글 《을미사변은 일본의 대조선침략정책의 직접적산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정한론》을 부르짖으며 오래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실시하여온 일본침략자들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것을 기회로 우리 나라에 대한 로골적인 침략정책을 실현하는 길에 들어섰다.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확립을 노린 일본은 먼저 청일전쟁을 도발함으로써 저들의 대조선침략정책수행에 유리한 토대를 마련하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과 동북아시아지역의 정세는 일본에 불리하게 번져갔다. 청일전쟁후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은 더욱 격화되였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자본주의렬강들의 세력권쟁탈전도 매우 치렬하게 벌어졌다.

리조정부의 상층부가 반일친로적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조선에 대한 짜리로씨야의 세력권확대가 강화되는 현실은 일본으로 하여금 초조감을 금할수 없게 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은 대조선침략정책이 전면적으로 파탄될수 있는 긴박한 사태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정부가 직접 나서서 리조정부의 실권자인 민비를 제거할 흉계를 꾸미였다.

일본정부는 1895년 6월 저들의 대조선침략정책수행에서 암적존재로 되고있는 민비를 살해할 임무를 주어 포악하고 흉악한 군벌출신인 륙군중장 미우라 고로를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조선정부를 타고앉을데 대한 일본정부의 비밀훈령을 받고 서울에 기여든 미우라는 한동안 정체를 숨기고 공사관에 틀고앉아 민비암살계획을 작성하였으며 그해 10월초 그것을 최종확정한 후 구체적인 실행분담안을 짰다.

그에 의하면 민비살해의 총지휘는 공사 미우라가 담당하고 군대지휘는 무관 구스노세가, 대원군을 궁중에 끌어내는것은 궁내부고문 오까모또가 책임지며 폭도들에 대한 지휘는 《한성신보》 사장 아다찌가 맡기로 되여있었다. 그리고 범죄실행날자는 10월 8일로 정하였다.

저들의 범죄거사를 무력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미우라는 구스노세에게 명령하여 일본군수비대 18대대소속의 병력 450명을 출동시켜 한성일대를 삼엄한 경계태세에 두었으며 오까모또로 하여금 경찰과 함께 50여명의 폭도들을 인솔하여 대원군을 협박과 기만으로 왕궁에 끌어오게 하였다.

범죄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전준비를 끝마친 미우라는 드디여 1895년 10월 8일 새벽 피비린 민비살해극의 막을 올렸다.

광화문부근에 집결한 수백명의 일본살인악당들은 왕궁을 지키고있던 시위대와 총격전을 벌려 시위대련대장을 사살하였으며 민비의 거처인 건청궁을 포위하였다.그곳에서 국왕과 왕세자를 연금해놓은 놈들은 민비를 찾기 위해 피에 주린 이리떼마냥 돌아쳤다.

일본살인귀들은 궁녀들이 사방으로 피난하는 혼잡속에서 민비를 쉽게 찾을수 없게 되자 맞다드는 궁녀들을 닥치는대로 칼로 찔러죽이기 시작하였다. 왕궁은 삽시에 피비린 살륙장으로, 략탈의 란무장으로 변하였다.

살인깡패들에 의해 민비도 수많은 궁녀들과 함께 칼에 맞아 쓰러졌다.

일본살인귀들은 비록 칼에 맞아 쓰러지기는 했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녀인이 민비라는것을 확인하고는 살인범죄행위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그를 장작더미우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불살라버렸으며 유골마저 못에 집어던졌다.

리조정부의 실권자였으며 당시 국가존엄의 상징이기도 하였던 민비는 일본폭도들에 의하여 이렇게 비참히 살해되였다.

민비살해사건의 직접적담당자인 일본공사 미우라는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자 《이것으로써 조선은 드디여 일본의것으로 되였다.》라고 뻔뻔스럽게 뇌까렸다.

민비살해사건에 참가하였던 한 범죄자는 자기의 수기에서 《선혈로 물든 민비의 시체에는 석유가 뿌려지고 불이 달렸다. 순식간에 시체는 화염에 휩싸여 이상한 냄새를 풍기였으며 참으로 귀곡추추(귀신도 서글프게 운다는 뜻)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조선의 자주권과 존엄을 여지없이 짓밟고도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드디여 이루게 되였다고 환성을 지른 일본의 야수적기질은 당시 세계를 아연케 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야수적방법으로 민비를 학살하였을뿐만아니라 이 사건의 진상을 은페하는데서도 날강도적인 파렴치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보였다.

자루속의 송곳은 감출수 없듯이 일본의 피비린내나는 살륙만행은 사건당일로 온 서울장안과 서울주재 각 외교대표부들에 퍼져나갔다.

짜리로씨야공사는 10월 9일 자기 나라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나는 이번 사건이 세계력사에서 류례가 없는 범죄적인 사건이라는것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평화시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 군대와 지어는 공관의 비호와 지도밑에 무리를 지어 남의 궁성에 몰려들어가 왕후를 죽여 불사르고 이외에도 온갖 비렬한 살인행위와 폭행을 감행하고도 만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한짓을 부정하는 철면피한 행동은 아직까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을것이다.》라고 썼다.

민비학살만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내외의 여론은 일본살인강도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일치하게 들고 일어났다.

조선인민과 외교단의 항의와 규탄에 부딪친 일본정부는 할수 없이 일본공사를 비롯한 수십명의 살인강도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감옥에 《감금》하는 기만적인 놀음을 벌리고 온갖 구실을 다하여 피고자들에 대한 처벌을 미루어왔으며 그후 1896년 1월 《증거불충분》의 리유로 전원 무죄석방하였다.

참으로 주권국가의 상징으로 가장 신성시되고있는 왕궁안에서 민비를 무참히 학살한 일본침략자들의 피비린 살륙만행은 력사에 보기 드문 불법무도한 반인륜적행위였으며 우리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에 대한 참을수 없는 유린이였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을미사변을 비롯한 저들의 죄악에 찬 력사에 대해 우리 인민앞에 응당 사죄하고 배상하여야겠으나 그 책임을 회피해나서면서 우리 인민의 민족적존엄을 짓밟고있다.

일본에 의해 너무나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 우리 인민은 과거 일본의 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고있으며 대를 이어가면서라도 기어이 결산하고야말 의지에 넘쳐있다.

일본반동들은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저들의 엄청난 피해에 대해 똑바로 반성하고 하루빨리 과거청산의 길에 나서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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