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3월 23일발 조선중앙통신)조국통일연구원는 23일 《〈유신〉독재의 망령을 부르는자들은 파멸을 면치 못할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된 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남조선에서 죄악으로 가득찬 《유신》독재를 부활시키려는 보수패당의 책동이 로골화되고있는것으로 하여 내외의 우려와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유신》독재를 찬양하는 《박정희기념도서관》, 《박정희동상》이라는것이 세워지는가 하면 그 잔당이 살판치면서 박정희역도의 《공적》을 찬미하는 등 사람들을 경악케하는 광대극이 벌어지고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몸서리치는 《유신》독재시대를 어떻게 잊을수 있으며 민족앞에 천추만대를 두고 씻을수 없는 죄악을 남긴 그 치떨리는 악마를 어찌 용서할수 있겠는가.
조국통일연구원은 극악한 매국노, 살인마, 분렬광이였던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과연 어떤것이였는가를 똑똑히 알리기 위해 이 조사보고서를 발표한다.
특등매국노
박정희는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보통학교, 사범학교에 다닐때부터 일제의 조선침략의 괴수였던 도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일본군국주의사상인 《야마도 다마시》를 숭배하면서 철저한 《황국신민》으로 길들여진 특등친일매국노였다.
괴뢰만저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 《일본인으로서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혈서와 편지를 일제에게 써바치여 왜놈들마저 놀래운 박정희는 졸업때에는 《일본제국의 최우수군인》이라는 칭호와 다까끼 마사오라는 창씨개명한 이름, 괴뢰만저우국 《황제》가 하사하는 금시계를 표창으로 받았다.
일본륙군사관학교에 입학한후에는 진짜 일본인이 되겠다고 하면서 오까모도 미노루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240명의 일본학생들을 제치고 3등으로 졸업하여 일본교육총감의 상을 받았다.
당시 일본륙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찌가 박정희를 가리켜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게 바치는 충성심에서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데가 있다.》고 평가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박정희는 일본관동군부대와 괴뢰만저우국군에서 복무하면서 110여차례의 토벌작전에 참가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과 애국자들을 학살하였다.
박정희역도의 친일매국행위는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계속되였다.
1961년 남조선에서는 박정희역도에 의한 5.16군사정변이 발생하였다. 이 군사정변은 미제가 사촉하였지만 그 정신은 박정희가 일본으로부터 본받은것이였다.
박정희는 《일본의 젊은 우국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한다. 일본군인들의 그 기백을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젊은 장교들을 충동질하여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반동들은 남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일으킨 군사정변이 아닌가 하여 불안해하다가 신문에 난 박정희의 사진을 보고는 《다까끼 마사오가 아닌가?!》라고 환성을 질렀다고 한다.
박정희가 집권하여 맨 먼저 일본상전들을 찾아가 《명치유신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정열은 잘 알고있다. 그들처럼 해볼 생각이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달라.》고 한것과 역도의 《대통령》취임식에 참가하였던 당시 일본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꾸가 《박정희와는 부자지간》이라고 하면서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것 같아 무척 기쁘다.》고 떠벌인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있다.
박정희는 제2의 리완용이 되겠다는 각오로 일본으로부터 단 3억US$의 《무상원조》와 2억US$의 《대부》(재정차관)를 받고 41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에 대한 배상을 무효로 한 남조선일본《협정》을 체결하였다.
오늘 일본반동들의 독도강탈책동이 집요하게 감행되고있는것도 박정희가 남조선일본《협정》을 체결하면서 일제의 죄행에 면죄부를 주고 조선령해를 일본과 공동수역으로 하자느니, 제3국의 판결에 맡기자느니, 독도를 차라리 폭파해치우면 좋겠다느니 하는 망발로 언질을 주었기때문이다.
박정희는 또한 특등친미분자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박정희는 재빨리 상전을 바꾸어 미국의 더러운 사냥개로 변신하였다.
박정희는 해방후 미제가 조작한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괴뢰국방경비대에서 복무하면서 미국상전의 눈에 들어 소령으로까지 벼락승진하였다.
그리고 1948년 리승만괴뢰도당의 망국적인 《5.10단독선거》와 괴뢰정부조작을 반대하는 대중적투쟁이 벌어지고 려수군인폭동이 일어나자 괴뢰군장교였던 박정희는 괴뢰군안에서 애국적활동을 하던 수많은 군인들을 내탐하여 상전에게 밀고하였다.
이로 하여 650여명의 장교들과 1,000여명의 군인들이 체포, 처형당하였다.
당시 괴뢰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이에 대해 미국상전들에게 《박정희가 아니였더라면 려순반란사건은 그 귀추가 어떻게 되였을지 모른다. 신생대한민국을 살려놓은 숨은 공로자의 한 사람은 박정희이다.》라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1950년 6월 미제가 조선전쟁을 도발하자 박정희는 괴뢰륙군본부 정보국에 있으면서 전선과 후방에서 애국적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남조선에서 1960년 4.19인민봉기로 리승만괴뢰정권이 꺼꾸러지고 미국이 림시변통으로 내세웠던 허정《과도정권》과 장면《정권》도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지탱해 내지 못하자 미국은 박정희를 내세워 5.16군사정변을 일으켜 군사파쑈독재《정권》을 조작하였다.
박정희역도는 집권기간 미국에서 케네디, 죤슨, 닉슨, 포드, 카터 등으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상전을 찾아가 《아시아에서 성조기와 함께 행동할 전우는 한국》이라느니, 《미국이 한국을 령도하고있는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느니, 《미국은 한국의 아버지》라느니, 《미국에 오니 타향에서 제 집에 온것처럼 마음이 놓인다.》느니 하는 추태를 부리였다.
그리고 상전들앞에서 다진 맹약대로 남조선을 미국의 철저한 식민지로 내맡기였다.
박정희는 남조선과 세계사회계에서 남조선강점 미군철수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미국에서 기만적인 미군감축계획이 론의될 때마다 상전에게 매달려 《어떤 명분의 주한미군감축도 반대한다.》, 《미군감축계획을 재고려해달라.》고 앙탈을 부리였다.
1975년 유엔총회 제30차회의에서 남조선강점 유엔군철수결의안이 통과되자 미국과 함께 남조선미국《련합군사령부》를 내오고 미군의 영구강점을 획책한것도 박정희역도였다.
박정희는 단순히 미군을 남조선에 붙잡아둔것이 아니라 핵폭탄과 핵미싸일, 핵폭격기 등 미군의 각종 핵무기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여 남조선을 세계최대의 핵화약고로 만들었으며 미제침략군에게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준 남조선미국《행정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남조선을 미군범죄의 소굴로, 미군만행의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이것도 모자라 박정희역도는 30여만명의 남조선 청장년들을 미제침략군이 일으킨 웬남전쟁의 대포밥으로 내몰아 1만 3,000명이나 개죽음을 당하고 병신이 되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출판물들은 박정희역도의 이 웬남파병책동을 두고 《가장 어려울 때 막내아들이 미국을 제일 잘 도와준다.》고 야유하였다.
희세의 파쑈독재자
박정희는 가장 잔인한 독재통치로 악명을 떨친 희세의 파쑈폭군이였으며 박정희통치 18년간의 남조선은 그야말로 중세의 암흑기와 같았다.
박정희는 5.16군사정변으로 권력을 가로챈 후 《정치를 하자면 히틀러와 같은 무자비한 용단이 필요하다.그러나 한국에서 질서회복을 위해 히틀러식통치방법만으로는 될수 없다.》고 하면서 2년 7개월간의 무자비한 《군정》통치를 실시하였다.
《군정》통치의 단 며칠동안에 23개의 정당과 238개의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4 300여명의 정치인들이 정당활동을 금지당했으며 수천개의 언론, 출판기관들이 페쇄되였다.
군사정변후 첫 8개월동안에 사회대중당사건, 사회당사건, 민족일보사건, 혁신당사건, 통일사회당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이 조작되고 수십만명의 애국적인사들이 체포되였으며 30초에 한건씩 그들을 재판하는 놀음이 벌어졌다.
《군정》기간 악랄한 《보안법》과 《반공법》이 더욱더 개악되고 《정당법》,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정치활동정화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무려 수천건의 악법들이 생겨났다.
악명높은 중앙정보부가 조작되고 경기도 수원과 안양에 《동양에서 첫째가는 감옥》이 건설되였다.
《배고파 못살겠다.》는 말한마디에 《불온분자》라는 딱지가 붙어 중앙정보부의 지하고문실에 끌려가 매맞아야 했고 입산금지령, 통행금지령때문에 벌초하러 산에 갈수도, 대낮에 이웃에 갈수도 없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생겨난것도 이때부터이며 박정희역도를 새가 어떻게 우느냐 하는 물음에 《짹》한다 해도 죽이고 《찍》한다 해도 잡아죽인 중세의 폭군에 비긴것도 이때부터이다.
1963년 박정희역도는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한다고 하면서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아예 《대통령》벙거지를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괴뢰헌법을 《대통령중심제》로 뜯어고치고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였고 청와대와 행정부, 여당은 물론 중앙정보부, 경찰, 해외대표부, 관영기업, 지어 면장과 동장자리까지도 군사깡패들을 들여앉히여 군사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박정희의 독재체제는 1972년 10월에 조작된 《유신》체제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박정희는 1868년 일본의 부르죠아개혁파들이 일으킨 쿠데타 《명치유신》을 본따 괴뢰통치제도를 1인장기독재체제로 뜯어고치는 정치쿠데타에 《10월유신》이라는 이름을 붙이였다.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땅크와 장갑차를 내몰아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봉쇄한 속에 《유신헌법》을 날조하고 제놈을 총통,전제군주의 지위에 올려세웠다.
《대통령》, 《국무회의》 의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등 온갖 감투를 다 뒤집어쓰고 모든 권력수단을 통제할 권한, 헌법개정권, 통일문제독점권, 국민투표권, 긴급조치발동권, 계엄선포권, 국회해산권을 비롯한 무제한한 권한을 한손에 거머쥐였다.
또한 주민의 직접투표도 없이 제놈이 의장으로 되고 그 성원들도 제가 임명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데서 자기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만들고 《대통령》의 임기에 한계를 두지 않는 《종신대통령제》를 내왔다.
《유신》독재체제하의 남조선은 그야말로 《정치부재》, 《민주부재》, 《민권부재》, 《언론부재》의 황량한 불모지로 변하였다.
박정희역도의 정치적반대파들에 대한 탄압이 어느정도였는가 하는것은 야당 당수였던 김대중을 일본의 도꾜에서 백주에 랍치하여 바다에 돌을 매달아 수장하려 하였던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알수 있다.
오늘 남조선정치권에 뿌리깊게 남아있는 지역들사이의 대결감정도 바로 박정희《정권》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이런 무지막지한 깡패방식으로 박정희역도는 언론에 자갈을 물리고 집회, 시위에 족쇄를 채우며 사람들의 눈과 귀, 입을 막고 학원을 비롯한 사회전체를 군화발로 짓밟으며 초보적인 생존권마저 무참히 유린하였다.
《유신》독재의 인민탄압만행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70만에 달하는 괴뢰군, 1만 5,000여명의 《중앙정보부》요원, 37만여명의 정치특무, 5만여명의 괴뢰경찰과 32만여명의 경찰정보원, 300만명의 향토예비군 등이 온 남조선땅을 조밀한 감시망으로 뒤덮었다.
로동자들속에는 10명에 하나씩 정보원이 박히고 농촌에는 5개 농가가 서로 감시하고 련대책임을 지는 5호책임제가 도입되였으며 어민 5명당 1명은 밀정이고 학교에는 《청년학생사상연구회》라는 비밀정보망이 생겨났다.
심지어 《이웃집끼리 감시제》, 《부부, 부자간의 감시제》라는것까지 고안되였다.
무시로 발동되는 비상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긴급조치에 력사에 없는 정치방학, 정치휴교령, 방첩월간과 불온자색출운동, 《유신》반역자박멸운동으로 남조선주민들은 어느 하루도 가슴조이며 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친구를 만나면 접선으로, 술을 나누면 회담으로,악수를 하면 비밀약속으로 간주되여 재판도 없이 즉결심판으로 처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심지어 《집에 도적이 들었다.》고 신고하여도 류언비어류포죄에 걸리여 옥고를 치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남조선사회를 뒤흔들어놓은 통일혁명당사건, 적화공작단사건, 인민혁명당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민학련사건 등이 바로 이렇게 조작되였고 수많은 혁명가들과 애국자들이 무참히 처형되였다.
《유신》독재가 자행한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고문정치》는 또 어떠하였는가.
중앙정보부의 비밀고문실에서는 물고문, 불고문, 전기고문, 마약고문, 뱀고문, 백열등고문, 비행기고문, 칭기스한료리고문, 죽침고문 등 사람의 머리로 상상할수 없는 모든 악행이 다 동원되였다.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재일교포류학생들이였던 서승, 서준식형제가 박정희일당이 조작한 학원간첩단사건으로 체포되여 야수적인 고문을 당하고 형체도 알아볼수 없는 얼굴로 언론에 공개되였던 그 끔찍한 모습을 잊지 않고있다.
결국 《유신》파쑈독재는 남조선을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고 인민의 피를 즐기던 박정희역도가 심복의 총에 맞아죽는것으로 종말을 고하고야 말았다.
극악한 반통일대결광
박정희역도가 집권기간 저지른 죄악중에 죄악은 북남대결을 고취하면서 나라의 영구분렬을 획책한것이다.
박정희의 5.16군사정변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들고 통일을 지향했던 4.19인민봉기의 정신을 무한궤도로 참혹하게 짓뭉개버렸다.
그 피바다우에서 역도는 이른바 《반공》을 《제1국시》로 선포하고 《공산주의와 대결할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할것을 선포하였으며 미국상전을 찾아가 《미국의 리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통일하지 않겠다.》고 맹약하였다.
역도는 1965년 6월에 발표한 담화문에서도 《우리의 지상과제는 더 말할것없이 승공통일》이라고 줴쳤다.
그리고 우리의 폭넓은 북남협상제의와 내외의 압력에 못이겨 북남대화마당에 끌려나와서는 대화를 고의적으로 지연, 파탄시켰으며 7.4북남공동성명에 서명한지 3일밖에 안된 1972년 7월 7일 괴뢰국무회의에서 《국민은 지나친 락관과 속단 그리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랭철한 리성을 되찾아 모든 분야의 국력배양에 힘쓰라.》고 고아대면서 겨레의 통일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또한 《유엔은 외세가 아니》라느니, 《미군주둔은 길면 길수록 좋다.》느니 하면서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자주의 원칙을 부정해나섰으며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운동을 《반공법》과 《보안법》에 걸어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서해사건, 동해사건, 땅굴사건 등 각종 모략사건들을 날조하고 각계층 군중을 강제로 동원하여 《반공》궐기대회니, 성토대회니, 규탄대회니 하는 광대극들을 련이어 벌려놓으면서 반공화국대결광기를 부렸다.
박정희역도는 미제의 적극적인 부추김밑에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미쳐날뛰였다.
박정희역도는 1973년 6월 23일 《내정불간섭》과 《불가침》, 《유엔동시가입》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6.23평화통일외교정책 특별성명》이라는것을 발표하여 나라의 분렬을 《정책》으로 공공연히 선포하였다.
미제와 일본은 박정희역도의 이 《두개 조선》정책에 대해 《지난 25년동안 있어보지 못한 건설적인것이며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 일본외무성이 설득한것이다.》라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박정희역도는 《두개 조선》정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책동에도 발광적으로 매달렸다.
역도는 괴뢰외무부장관을 유엔본부에 보내여 《두개 조선유엔가입》을 간청하게 하였으며 1973년에 있은 제28차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에 매달려 《남북조선의 유엔동시가입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하고 지지표를 얻기 위해 온갖 사기협잡과 매수공작을 벌렸다.
미제와 박정희패당은 1975년에 있은 제30차 유엔총회때에 남조선의 《유엔단독가입안》을 들고나와 성사시켜보려고 비렬한 책동을 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박정희역도는 《두개 조선》조작을 위한 교차승인을 달성하기 위해 체육과 학술, 경제, 문화분야에서 사회주의나라들과의 교류를 먼저 선행하고 이에 토대하여 점차 정치적관계를 맺는다는 《대공산권외교방침》을 내들고 사회주의나라들과의 관계개선에도 발광하였다.
심지어 발전도상나라들속에서도 지지자를 얻기 위해 쁠럭불가담운동에 가입하려고 하였다가 망신만 당하였다.
박정희역도는 《두개 조선》조작책동과 함께 미제를 등에 업고 북침전쟁준비와 도발에도 광분하였다.
박정희역도는 군사비지출을 2배이상으로 확대하고 반공화국전쟁책동에 미쳐날뛰였다.
역도는 더 많은 청장년들을 괴뢰군에 끌어내기 위하여 《병역법》을 뻔질나게 뜯어고치면서 40살까지의 청장년들을 소경이나 큰 병신이 아니면 전부 괴뢰군에 끌어낼수 있게 만들어놓았으며 1970년에는 괴뢰군징집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중앙병무청》을 새로 내오고 시, 군에는 상설적인 징병서라는것도 조작해냈다.
특히 미제의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사건과 《EC-121》대형간첩비행기사건후 괴뢰군사병들의 복무년한을 늘이고 후방예비사단들을 전투사단으로 개편하였다.
박정희역도는 북남대화가 시작되던 1971년부터 이른바 《자주국방》의 미명하에 제1차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 1976년부터는 제2차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이라는것을 짜놓고 1978년까지 미국으로부터 수십억US$의 《군사원조》를 끌어들이면서 장비현대화에 미쳐날뛰였다.
7.4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1년동안에만도 신형구축함과 전투폭격기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와 장비 그리고 20여개 사단을 무장시킬수 있는 탄약을 끌어들였다.
이것도 모자라 1975년에는 방위세라는 최대최악의 수탈악법까지 조작해내여 군사비를 충당하였다.
박정희역도는 《모든 국민이 병사》라고 떠들면서 향토예비군, 학도호국단, 민방위대, 지어는 부녀방위단, 부녀자위대와 같은것까지 조작하여 온 남조선땅을 군사병영으로 만들었다.
박정희역도는 미국의 부추김밑에 침략전쟁의 불집을 터뜨리기 위하여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적대적인 정탐행위와 무장도발을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군사분계선일대에서 공화국북반부지역에 대한 무장도발은 1968년에만 하여도 2,000여차례에 달하였고 정전협정위반행위는 1972년 7.4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1975년 상반년까지의 기간에만도 무려 6만 5,000여건에 달하였다.
박정희역도의 이러한 《반공》미치광이짓때문에 북남관계는 악화되고 나라의 분렬은 고착되였으며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열망은 된서리를 맞았다.
예속경제의 고질병을 만든 주범
남조선의 보수패당은 박정희역도가 남조선경제토대를 마련하고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였다는식으로 《유신》독재를 찬미하고있다.
그러나 오늘 남조선경제가 안고있는 고질적이고도 치명적인 종양들인 심각한 대외예속성과 재벌경제구조, 빈부격차는 어느것 할것없이 다 박정희역도가 그 독초의 씨앗을 뿌리고 자래워놓은것들이다.
박정희역도는 남조선경제를 외국자본에 철저히 얽매인 식민지예속경제로 전락시켜놓았다.
박정희역도는 5.16군사정변으로 괴뢰정권을 가로타고앉기 바쁘게 산업근대화니, 경제개발이니 하는 기만적인 간판을 들고 외국자본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였다.
박정희역도는 《외자도입법》, 《수출자유지역법》, 《공업소유권법》 등을 조작하여 외국자본의 세금을 깎아주고 손해를 《정부》가 보상해주며 특허권을 보장해주고 외국기업에 고용된 로동자들이 로동조합을 뭇거나 로동쟁의를 벌리면 당국이 탄압해주는것을 법과 시책으로 담보해주었다.
결과 특권을 부여받은 외국자본들은 남조선에 물밀듯이 쓸어들어와 무제한한 략탈을 일삼았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남조선에 들어온 외국차관은 150억 US$, 외국인직접투자는 10억 US$이상에 달하였으며 이렇게 들어온 외국자본들은 인민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리윤을 얻었다.
특히 미국기업인 경우에는 150~240%, 일본기업인 경우에는 80%의 리윤을 얻었는데 당시 외국자본이 보통 다른 나라에서 얻는 리윤률이 20%였다는것과 대비하면 그야말로 황금소나기를 맞은것이다.
반면에 남조선경제에 남은것이란 산더미처럼 쌓인 빚과 심각한 대외예속성뿐이였다.
박정희역도의 무차별적인 외자도입책동으로 남조선경제가 걸머진 대외채무는 1979년말에 이르러 1960년에 비해 227배나 늘어난 250억US$였으며 이것은 당시 발전도상나라들이 지고있던 빚의 14.3%에 달하였다.
빚이 늘어남에 따라 원금과 리자상환액이 증가하면서 박정희《정권》말기에 와서는 외국에서 꾸어오는 대외채무의 60%이상을 제 땅에 들여오지도 못하고 외국자본에 고스란히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경제의 대외예속은 더욱 심화되였다.
박정희역도가 외국자본과 값싼 남조선로동력으로 해외원자재를 가공하여 재수출하는 《수출주도형》경제정책을 추구하다보니 1962-1975년기간에 괴뢰들의 투자자금의 해외의존도가 40%, 원자재수입률은 62.8%에 이르렀다.
특히 산업의 동력인 연료체계를 흔한 석탄이 아니라 당시 국내에서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원유체계로 전환시키는 주유종탄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에네르기의 해외의존도가 1971년 50.8%에서 1981년에는 75.2%, 현재는 95%이상에 달하고있다.
곡창지대로 이름났던 남조선이 필요한 량곡의 70%를 해외에서 사오지 않으면 안되게 된것도 바로 박정희의 대외의존정책의 산물이다.
남조선경제의 무역의존도는 박정희《정권》때 이미 72.7%에 달하였다.
괴뢰들이 해마다 일본과의 무역에서 300억US$라는 막대한 적자를 보고있는것도 박정희가 일본설비와 원자재를 마구 끌어들여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켜놓았기때문이다.
남조선경제를 극소수재벌들이 판을 치는 재벌경제로 만들어놓은 진범인도 다름아닌 박정희역도이다.
박정희역도는 재벌들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아먹는 대가로 집권 전기간 친재벌정책을 실시하였다.
해방후 적산불하정책으로 남조선매판재벌들의 밑돈을 마련해준것이 미국과 리승만《정권》이라면 박정희역도는 인민들과 중소기업들의 피땀을 긁어모아 재벌퍼주기를 하여 재벌을 본격적으로 육성하였다.
박정희역도는 재벌들에 자금을 우선 대출해주는것을 제도화하고 환률조작으로 재벌들에게 막대한 리윤을 가져다주었으며 재벌들이 해외에서 막대한 빚을 내서 기업을 확장하게 하고 빚때문에 파산위기에 몰리면 은행들이 나서서 빚을 갚아주도록 강박하였다.
1966-1975년기간 박정희가 기업들에 지원하게 한 투자액중에서 98.2%가 재벌들에게 들어가고 겨우 1.8%만이 중소기업들에 돌아갔다.
재벌들이 비대해지면서 권력과 재벌들사이의 정경유착관계가 심화되고 온갖 부정부패가 성행하였다.
1963년 박정희역도가 재벌들로 하여금 밀가루와 사탕가루, 세멘트가격을 마음대로 올려 폭리를 보게 하고 수천만US$를 정치자금으로 받아먹은 3분폭리사건, 재벌의 사카린밀수를 눈감아주고 18만US$이상을 삼킨 사카린밀수사건, 해마다 막대한 미국산 잉여농산물을 끌어들이는 대가로 7,900만US$를 챙긴 사건 등은 그 일단이다.
괴뢰권력과 재벌들은 서로 엉키여 진탕치듯 돌아갔지만 중소기업들은 항시적으로 심각한 자금난을 겪으면서 무리로 파산몰락하였다.
오늘 남조선사회의 극심한 빈부차이역시 박정희역도의 반인민적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박정희역도의 친재벌, 저임금정책으로 1970년대 중반 남조선인구의 0.3%에 불과한 재벌들과 반동관료배들이 국민소득의 약 60%를 차지하였다면 전체 인구의 70%에 해당되는 근로자들의 몫은 15%에 불과하였으며 특히 재벌들은 소득의 43%를 독점하였다.
반면에 근로자들은 하루평균 10시간이상씩 로동하면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임금을 받으며 기아에 허덕이였다.
당시 남조선로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은 일본로동자의 8분의 1, 미국로동자의 11분의 1, 싱가포르, 먄마, 인디아로동자의 2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 보잘것없는 임금마저도 박정희역도가 재벌들에게 돈을 대주느라고 매해 통화량을 대폭 늘이다나니 물가가 30~40%씩 뛰여오르면서 최저생계비이하로 떨어졌다.
오늘 리명박역적패당이 박정희식경제개발을 흉내내면서 《경제살리기》를 떠들다가 남조선경제를 오히려 파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사실은 박정희개발독재의 부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참으로 《유신》독재자인 박정희가 18년간의 통치기간에 저지른 죄악은 몸서리치는것이였고 기억하기조차 치떨리는것이였다.
나라와 민족마다 침략자에게 복무하면서 동족의 피로 손을 적신 변절자, 배신자, 주구들, 파쑈독재를 일삼은 독재자들, 민족의 분렬을 초래한 분렬주의자들을 가장 수치로 간주하고 두고두고 저주한다.
아무리 남조선에 내세울 인물이 없다한들 특등매국노이고 극악한 살인마이며 반통일대결분자로 악명을 떨친 박정희와 같은 만고의 역적을 내세우는 놀음이 벌어지는것은 참을수 없는 민족의 수치이다.
더우기 민주화의 투사도 아니고 악명높은 《유신》독재에 태줄을 달고있는 잔당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유신》바람을 일쿠고있는것은 실로 경악할 일이 아닐수 없다.
《유신》독재의 총칼에 피멍이 든 남조선인민들의 원한은 지금도 구천에 사무치고있다.
《유신》독재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유신》잔당들은 력사와 민족의 단호한 심판을 받고 파멸되고야말것이다.
주체101(2012)년 3월 23일
평양(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