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7월 7일발 조선중앙통신)지난세기 50년대에 있은 조선전쟁은 세계군사가들의 수수께끼인 전투들이 수없이 많았다.
조선인민군 군인들이 전쟁 3일만에 점령한 서울해방전투, 단 4척의 어뢰정으로 적중순양함을 격침시킨 주문진해상전투 등을 들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전해방전투는 현대포위전의 빛나는 모범으로서 유럽의 군사대학들에서도 연구되고있다.
대전해방전투는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전법이 안아온 특기할 전투였다.
인민군부대들의 반공격으로 서울과 금강방어선을 잃은 적들은 막대한 유생력량과 무기,전투기술기재들을 대전방어에 집중시켰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대전 동남부를 적의 증원부대가 오기전에 차단하여 대전포위를 빨리 형성하도록 작전방향과 방도를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인민군용사들은 험한 산발을 넘고 넘으며 하루밤사이에 100여리의 강행군으로 대전 동남쪽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50년 7월 20일 새벽 5시 총공격명령이 내렸다.
포화력의 엄호밑에 일제히 공격으로 넘어간 인민군용사들은 순식간에 적의 방어진지들을 돌파하고 맹렬한 시가전을 벌리였다.
드센 공격에 넋을 잃고 대전 남쪽과 동남쪽으로 패주하던 적들은 퇴로를 차단하고있던 인민군부대들에 의하여 소멸되였다.
미제의 《상승사단》이라고 우쭐렁거리던 제24사단은 전멸되였으며 대전에서 《시범을 보여 신뢰를 얻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단장 띤도 나어린 인민군전사에게 포로되였다.
이 전투에 참가하였던 한 미군장교는 자기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민군군인들은 미24사를 정면으로 공격하여 그 자유를 묶고 후퇴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한편 우회 또는 침투방법으로 방어군의 후방으로 진출하여 그 퇴로를 차단하는 전술에 의거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띤이건 또는 다른 지휘관이건 후방의 상황을 파악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것은 잘 정리된 전선을 유지하는 유럽식경험을 쌓은 미군사지휘관들이 이미 때가 늦었을 때까지 파악하지 못한 전술이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