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1월 21일발 조선중앙통신)일제의 조선침략사에는 조선봉건왕조의 황제였던 고종의 독살만행이 한페지로 기록되여있다.
1895년 10월에 감행된 명성황후살해사건이후 나라의 존망에 대해 극도의 불안을 느낀 고종은 일제가 《을사5조약》의 체결을 강박하자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서명과 옥새날인을 거부하였으며 그것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비밀외교활동을 벌리였다.
또한 이또(통감)와 하세가와(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 두놈을 죽여야 한다는 내용의 밀칙을 유생들에게 보내여 반일의병투쟁을 벌릴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에 우려를 느낀 일제는 정계에서 황제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친일매국역적 리완용을 《정부수반》으로 앉히고 새로운 친일내각을 수립하게 하였으며 1907년 6월에는 《내각관제》를 전격적으로 개악하여 친일내각이 황제에게 대항할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놓았다.
헤그밀사사건이 터지자 이를 구실로 리완용, 송병준 등 친일주구들을 내몰아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퇴위시켰다.
일제의 음모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종의 목숨마저 빼앗기 위한 범죄가 집요하게 추진되여 1919년 1월 22일 그는 무참히 독살되고말았다.
1921년 중국 상해에 있던 《림시정부》가 작성발표한 《제2차 독립선언서》와 고종황제의 서자인 의친왕의 친서에는 고종황제가 죽은 직후에 그의 온몸에는 붉은 반점이 많이 나타나있었으며 이것을 발견하고 독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제가 잡아가둔데 대하여 씌여져있다.
일본궁내청의 장관이였던 구라또미 유자부로가 남긴 일기 등에도 그에 대한 자료가 명백히 밝혀져있다. 미국의 한 대학교수도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독살설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일제야말로 조선을 강점하고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극악한 살인귀들이였다.
조선의 군대와 인민은 한세기전 일본으로부터 당한 온갖 민족적모욕과 멸시, 엄청난 피해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내고야말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