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첫 뜨락또르 생산
(평양 6월 24일발 조선중앙통신)우리 나라에서 첫 뜨락또르는 전후인 주체47(1958)년에 생산되였다.
당시 전쟁(1950.6.25-1953.7.27.)의 후과로 나라에는 뜨락또르를 생산할수 있는 기계공업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협동화가 완성된 농촌에서는 선진농기계의 대수를 늘일것을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히 요구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58년 10월 기양기계공장(당시)을 찾으시고 나라의 형편과 앞날의 전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주시면서 뜨락또르를 만들데 대한 임무를 주시였다.
제것이 있어야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수 있다고, 우리가 뜨락또르를 제힘으로 만들어야 기술도 발전하지 남의것을 사다쓰기만 하면 우리의 기술을 발전시킬수 없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뜨락또르를 만든다는것은 우리 나라 기술혁명에서 큰 발전이라고 하신 그이의 교시는 공장로동자, 기술자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안겨주었다.
공장의 로동자, 기술자들은 기술과 경험, 전문기계설비, 단 한장의 설계도면도 없었지만 첫 뜨락또르생산에 힘과 정열을 쏟아부었다.
그들은 뜨락또르를 분해해놓고 부속품의 도면을 그렸고 그것을 보면서 부속품을 깎았다. 어떤 때는 한개의 부속을 깎는데 몇번씩 실패를 거듭하고 규격소재가 부족한 어려운 속에서 생산을 하면서도 주저앉지 않았다.
공장의 로동자, 기술자들은 30여일간에 걸치는 노력끝에 첫 뜨락또르를 완성하였다.
이 뜨락또르가 평양을 향하여 달릴 때 그 모습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조선로동당 만세!》를 웨치였다.
그해 11월 14일 첫 뜨락또르를 친히 보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족해하시면서 공장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에게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내각의 이름으로 감사를 주시였다. 천리마의 기세로 달리는 우리 인민의 기상을 담아 그 이름을 《천리마》호라고 친히 지어주시였다.
공장의 로동계급은 기세충천하여 기술적준비기간도 시험생산기간도 그리고 점차적인 장성의 계단도 뛰여넘어 비약을 이룩하였다.
그들은 첫 시제품을 내놓은지 1년후에 3,000대의 뜨락또르를 만들어 다시금 세상을 놀래웠다.
첫 《천리마》호뜨락또르는 위대한 당의 령도를 받들어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분발하는 인민이 있는 한 이 땅우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적만이 탄생할것이라는 진리를 후대들에게 새겨주고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