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하의 탄생 55돐에 즈음하여 당신과 네팔정부와 인민에게 열렬한 축하를 보냅니다.
나는 이 기회에 우리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강화발전되리라고 확신하면서 나라의 안정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당신의 고귀한 사업에서 보다 큰 성과가 있을것을 충심으로 축원합니다.
재일조선인운동,재일동포들의 피눈물나는 이국살이의 쓰라린 력사는 우리 나라에 대한 악독한 일제식민지통치의 후과로 하여 발생된것이였다.
일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39년부터 1945년사이에만도 침략전쟁을 위하여 일본에 강제로 끌어 간 조선사람의 수는 150여만명이 넘었다.그리하여 1945년에 재일조선인수는 약 240만명이나 되였다.
일본에 끌려 간 우리 동포들의 처지는 이루 말할수 없이 비참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수난의 시기 망국노의 설음 안고 이역땅에 끌려 가 갖은 억압과 고역에 시달리며 피눈물을 뿌리던 재일동포들에게도 민족재생의 넓은 길을 열어 주시고 주체조선의 해외공민된 끝 없는 영예와 행복을 안겨 주시였다.
조국이 광복된 이듬해인 1946년이였다.이국의 산야에 뿔뿔이 흩어 져 운명의 갈림길에서 헤매던 재일동포들은 재생의 밝은 빛을 받아 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설음 많고 한숨 많은 이역살이 천대속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운명을 두고 누구보다 가슴 아파 하시며 그해 12월 13일 <재일 100만 동포들에게>라는 력사적인 서한을 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력사적인 서한을 받아 안은 한덕수동지의 감격과 기쁨은 참으로 컸다.
(아,진정 위대한분이시다.참으로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주실 민족의 태양이시다.)
20대의 젊은 시절에 애국애족투쟁에 나섰던 한덕수동지는 군중들앞에서 자신이 연설도 많이 했을뿐아니라 또 기염을 토하는 애국지사들의 연설과 웅변도 많이 들어 온 사람이였다.그러나 그는 지금껏 그 어디에서도 위대한 수령님의 서한에서처럼 민족의 심금을 세차게 두드리며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나아갈 길을 휘황히 밝혀 주는 심오한 사상에 접하여 본적이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한덕수동지가 그때 자기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 감격에 넘쳐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하게 된다.
<이번에 영명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서한을 받아 안고 내가 생각하게 되는것은 우리 조선민족의 유일한 령도자는 오로지 김일성장군님 한분밖에 없다는것이요.나는 이것을 확신하게 되였소.나는 이제부터 김일성장군님의 심복자가 되겠소.>
한덕수동지로 말하면 1907년에 경상북도 경산군의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20살 되는 해에 공부할 열망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그는 이듬해인 1928년에 일본의 어느 한 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여 신문배달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학비를 댈수 없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0년에 중퇴하고 말았다.한덕수동지는 이때부터 로동판에서 고역을 치르면서 피눈물나는 망국노의 생활을 강요 당하는 재일동포들의 민족적존엄과 생존을 위하여 로동운동을 조직하고 앞장에서 투쟁하였다.
이 나날에 한덕수동지는 죽음의 고역장이였던 단나차굴공사장에서 일하게 되였다.단나차굴은 부사산의 화산분출물들이 쌓여 있는 지대를 뚫고 나간 근 20리나 되는 긴 차굴이였다.공사는 15년이 넘는 오랜 기간 진행되였는데 공사가 진행되는 전 기간에 천정에서는 수시로 부석층이 무너져 내리고 밑에서는 석수가 그칠새없이 터져 올라 와 몸서리치는 대사고가 수천건이나 발생되여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바로 이런 위험한 공사장에서 악독한 일제놈들의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받으며 수십만명의 조선인로동자들이 피눈물나는 고역살이를 하였는데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이곳에서 고된 로동과 몸서리치는 죽음을 강요 당하며 일제놈들의 간악한 민족적차별과 학대를 뼈에 사무치게 체험하게 된 한덕수동지는 더는 참을수 없어 목숨을 내걸고 조선인로동자들의 권리와 리익을 위하여 로동운동을 조직지도하며 투쟁에 나서게 되였다.그는 이것으로 하여 일제경찰에 수십번 체포도 되고 여러해동안 감옥살이도 하였다.어느 해에 그는 형무소에서 일제교형리들의 야수적인 고문을 받고 다 죽어 가는 참혹한 몸이 되여 석방되게 되였다.사람들은 그의 정상이 몸서리치리만큼 끔찍하여 그가 이제 더는 살아 날수 없다고 하면서 나이가 참 아깝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공사장에서 한덕수동지를 도와 일제를 반대하는 로동운동에 참가하였던 여러 동료들이 형무소에서 나오는 그를 업어다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살려 내였다.그리하여 한덕수동지는 애국애족을 위한 반일투쟁에 다시금 떨쳐 나서게 되였다.
한덕수동지가 우리 민족이 생사존망의 갈림길에 놓여 있던 때에 일제의 류혈적인 탄압과 거듭되는 체포와 투옥이 뒤따랐지만 굴함없이 계속 싸울수 있은것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김일성장군님을 끝없이 우러르며 마음의 기둥으로 믿고 따르게 된 신념과 의지가 있었기때문이였다.
광복전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누구보다 열렬히 흠모하여 온 한덕수동지였기에 광복직후에 일가친척들이 있는 고향인 경상북도로 얼마든지 갈수도 있었지만 그는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가 저들의 식민지 암흑의 땅으로 전변시킨 고향으로 가지 않고 오직 우리 수령님만을 믿고 따르면서 간또지방조선인회 책임자로서 광복후 불과 2달만에는 재일본조선인련맹을 결성하게 되였다.
한덕수동지는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1946년 12월에 보내주신 력사적인 서한과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재일조선인경축단을 접견하시고 주신 강령적인 교시를 심장으로 받들고 재일동포들을 수령님과 공화국정부두리에 묶어 세우기 위하여 헌신분투하면서 충성과 애국의 한길로 억세게 걸어 갔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운동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1949년에 이르러 재일조선인운동은 엄혹한 시련을 겪게 되였다.
조선인민의 피 맺힌 철천지원쑤 미제는 공화국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재일동포들의 단합된 힘에 겁을 먹고 일본반동들을 내몰아 재일동포들의 첫 통일전선체인 재일본조선인련맹을 강제로 해산하고 그 간부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그리하여 그때 재일본조선인련맹 의장으로 활동하던 한덕수동지도 공직에서 추방되는 가슴 쓰라린 일을 당하게 되였다.하지만 미일반동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끝없이 우러르며 마음의 기둥으로 믿고 따르는 한덕수동지의 신념과 의지를 꺾을수 없었다.그는 비록 공직에서 추방되였으나 내외의 온갖 원쑤들의 반동공세를 물리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애국활동을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늘 총련이란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총련이 탄생하기까지의 준엄한 나날에 대해서 다 헤아리기는 어려울것이다.
1985년 5월 24일이였다.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총련결성 30돐을 맞으며 조국에 온 한덕수동지를 비롯한 재일조선인감사단을 위하여 오찬을 마련하시였다.바로 그 뜻 깊은 자리에서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덕수동지의 손을 따뜻이 잡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총련이 결성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오늘 이처럼 의장동지를 비롯한 총련일군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보니 총련을 결성하던 때 있은 일들이 떠올라 감회가 깊어 집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지난 날 수난에 찬 재일조선인운동을 더듬어 보시는듯 한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다.그러시다가 이윽하여 나직하면서도 감회가 깊으신 음성으로 총련이 결성되기까지의 경위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겨울에 재일조선인련락원을 만나주신데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그때 그를 통하여 재일동포들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감회 깊은 회고의 말씀을 가슴 뜨겁게 받아 안게 되는 한덕수동지의 눈앞에는 30여년전 그때의 일이 되살아 났다.
미일반동들에 의하여 1949년에 재일본조선인련맹이 강제로 해산된후 재일동포들은 굴함없이 투쟁을 벌려 1951년 1월에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을 결성하였다.하지만 민전의 지도층은 남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조선혁명을 외면하고 남의 나라 혁명에 복무하는 그릇된 길로 나갔다.지어는 남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면서 재일동포들을 무모한 폭력투쟁에로 내몰기까지 하여 낯 설은 이역땅에서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였다.
재일조선인운동은 일대 시련을 겪게 되였으며 재일동포들의 처지는 말할수 없이 어렵게 되였다.우리 동포들은 과반수가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 쫓겨 났으며 수많은 동포상공인들이 기업권을 빼앗기고 파산 당하게 되였다.
재일조선인운동과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엄혹한 시련의 한시기였다.바로 이 시기에 한덕수동지를 비롯한 재일본조선애국자들이 찾아 갈 유일한 품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품이였다.
형언할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재일동포들을 역경에서 하루빨리 벗어 나게 하려고 해도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가야 했고 생사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 재일조선인운동을 구원하자고 해도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야만 하였다.
하지만 그때 한덕수동지는 조국해방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시고 계실 위대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릴대신 이역땅의 재일조선인운동의 가슴 아픈 실태를 도저히 보고 드릴수 없었다.그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생사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 재일조선인운동을 생각하면서 번민속에 모대기며 가슴 찢기는 아픔을 금할수 없었고 하루 24시간을 오직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생각만으로 살았다.한덕수동지는 이 시기에 자기 일생에 있었던 가장 뜻 깊은 날을 자주 회상하며 우리 수령님을 몹시 그리워 했다.
그것은 공화국이 창건된 해인 1948년 12월 23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한덕수동지를 단장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재일조선인경축단을 만나주시였다.쪽배를 타고 사나운 풍랑을 헤치며 동해를 건너 온 경축단을 만나주시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방에 들어 서시였을 때였다.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게 되는 그 순간 한덕수동지의 가슴은 쇠물처럼 끓어 번지였다.
민족수난의 암담한 시기에 온 겨레가 그 존함과 더불어 광복의 신념과 삶의 희망을 심장깊이 간직해 온 민족의 구성이시며 혁명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
아,저분이 우리 민족이 낳은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구나 저분이 우리 겨레가 운명을 맡기고 따를 민족의 태양이시고 영명한 령도자이시구나!
이런 북받치는 격정으로 하여 한덕수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리에 앉으시여 <나는 오늘 일본에서 온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여 대단히 기쁩니다.여러분들이 조국으로 올 때 풍랑이 심했다고 하는데 사나운 겨울날씨에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시작하시였을 때까지도 뜨겁게 쏟아 져 내리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재일조선동포들은 자주독립국가의 해외공민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라는 력사적인 담화를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담화에서 먼저 <나는 일본에 있는 조선동포들이 각계층 대표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경축단을 무어 조국에 보내준데 대하여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신후 재일동포들은 과거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에 조국을 빼앗긴 망국민족으로 이국땅에 끌려 가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았다고,그들은 산 설고 물 설은 일본땅에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였으며 억울한 죽음을 당하여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러나 오늘은 재일조선동포들이 당당한 자주독립국가의 해외공민으로 되였습니다.재일조선동포들은 나라 없던 과거의 민족이 아닙니다.그들에게는 세계민주진영의 일원으로 등장한 자기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시여 우리 공화국의 성격과 임무에 대하여 지적하신후 재일동포들앞에 나서는 과업을 하나하나 밝혀 주시면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재일조선동포들은 높은 애국심을 가지고 공화국정부를 지지옹호하며 공화국정부의 시책을 받들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활동을 힘차게 벌려야 합니다.>
난생처음 위대한 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안게 되는 한덕수동지는 조선사람을 위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정치를 펴나가시는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와 비범한 예지에 거듭 감격하고 탄복하였다.그날 한덕수동지의 가슴에는 오직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리키시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참다운 길이라는 신념이 깊숙이 뿌리를 내리였다.그리고 한생을 오직 위대한 수령님의 영원한 전사로 수령님을 따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한몸 바칠 불 같은 맹세가 꽉 차넘쳤다.
한덕수동지는 남을 무조건 숭상하는 사대주의,민족허무주의에 물 젖은 민전지도층의 책동으로 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이 겪게 된 뼈를 깎는 가혹한 시련을 통하여 목숨보다 더 귀중한것이 위대한 수령님의 품임을 심장의 더운 피로 깨닫게 되였다.이러한 그였기에 막막한 생각에서 헤여 나지 못하고 있는 재일조선애국자들에게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그냥 앉아 있으면 우리는 영영 끝장나고 만다,파멸상태에 직면한 재일조선인운동을 구원하는 길은 오직 하나,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 사태를 보고 드리고 가르치심을 받는 길밖에 없다,영명하신 장군님께서는 우리 재일조선인운동을 존망의 위기에서 꼭 구원해 주실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고무해 주었다.
한덕수동지는 더 지체함이 없이 재일조선인련락원을 조국으로 파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선정황이 매우 긴장하여 참으로 한분한초를 아껴 가시는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1952년 12월 2일 험난한 길을 헤쳐 멀리 3국을 에돌아 조국을 찾아 온 재일조선인련락원을 만나주시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련락원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재일조선인운동은 민족적애국운동으로 되여야 한다>라는 력사적인 담화를 하시면서 지금 재일조선인운동이 조선혁명을 외면하고 남의 나라 혁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재일조선인운동이 나아갈 길이 아니라고,일본에서 살고 있는 조선동포들이 무엇때문에 남의 혁명을 위하여 피 흘리며 싸우겠는가,재일조선인운동이 지금과 같이 그릇된 길로 나가게 된데는 민전지도층에 책임이 있다고,민전의 지도층이 남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기때문에 우리 동포들이 형언할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고 하시며 못내 가슴 아파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말씀을 멈추시였다.그러시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국을 찾아 와 재일조선인운동형편을 자세히 알려 준 애국심 높은 련락원을 한동안 대견히 바라보시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시다가 이윽하여 다시 말씀을 이으시며 재일조선인운동이 옳바른 길로 나아가려면 남의 나라 혁명에 복무할것이 아니라 자기 조국과 자기 민족을 위하여 참답게 복무하는 민족적애국운동으로 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힘 주어 말씀하시였다.
<재일조선인운동을 조선로동당과 공화국정부의 지도밑에 조선혁명을 위하여 투쟁하며 재일조선인들의 민족적권리를 지키고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복무하는 민족적애국운동으로 전환시키는것,이것이 오늘의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재일조선인운동을 구원하는 길이며 재일동포들의 념원과 지향에 맞는 참된 애국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선생이 우리의 이러한 의견을 한덕수동지를 비롯한 재일조선인활동가들에게 전하여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령님의 위대성으로써만 설명될수 있는 이 유명한 로선전환방침의 뜻 깊은 교시에 접하는 순간 한덕수동지는 눈앞이 확 트이는 환희와 함께 말로는 다 표현할수 없는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진정 위대한분이시다.참으로 김일성장군님은 지인용을 겸비하신 걸출한 위인이시다!
이제는 재일조선인운동이 보검을 가지게 되였다.영명하신 장군님! 이 몸이 한줌의 진토가 된다고 해도 저는 장군님께서 안겨 주신 만능보검,위대한 로선전환의 방침을 끝까지 지켜 내겠습니다.)
자기 나라,자기 민족의 리익으로부터 출발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이 비록 남의 나라 땅에서 벌어지더라도 자기 조국,자기 민족을 위한 민족적애국운동으로 되여야 한다는 이 위대한 로선전환의 방침이 있음으로 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은 주체의 한길을 따라 오직 곧바른 승리의 길만을 걸어 올수 있었고 드디여 1955년 5월 25일에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탄생을 가져 올수 있게 되였다.
이렇듯 재일조선인운동이 존망의 위기에서 구원되고 총련이 힘 있는 해외공민단체로 강화발전될수 있게 된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력사적인 로선전환방침을 제시하시고 총련을 무어 주시고 현명하게 령도하여 주시였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대의 영광과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받으셔야 할 그 시각에도 그 공로를 해외의 일군에게 안겨 주시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한덕수의장동지는 일본반동들의 가혹한 탄압과 박해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투쟁하였다고,자신께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깊이 감동되군 하였다고 하시면서 한덕수의장동지가 총련을 결성하였기때문에 우리는 일본땅에 공화국의 존엄 높은 해외공민단체를 가질수 있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한덕수동지는 황송함에 몸둘바를 몰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의 손에 다시금 축배잔을 들려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이 기회에 총련의 창건자의 한사람인 의장동지와 총련을 결성하는 사업에 참가한 여러 동지들 그리고 전체 총련일군들에게 뜨거운 인사를 드립니다.>
순간 한덕수동지는 심장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것을 가까스로 삼키였다.
한덕수동지는 총련을 무어 주시고 주체형의 해외공민조직으로 자랑 떨치도록 따뜻이 손 잡아 이끌어 주시고도 영예와 공로의 앞자리에는 언제나 해외일군들을 내세워 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그 사랑,그 은정에 목이 메였다.
(아,수령님 어쩌면 수령님의 그 품은 이다지도 넓고 은혜로우십니까!)
인간생활에서나 혁명투쟁에서나 사람들의 량심과 의리가 매우 귀중한것이다.량심과 의리가 있는 인간은 설사 죄를 지어도 건져 줄수 있지만 량심도 없고 의리도 모르는 인간은 애국자로는 물론 사람구실도 할수 없는것이다.자기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고 자기 민족을 귀중히 여기는 민족적량심과 애국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혁명의 한길에서 손 잡고 나갈수 있고 나아가서는 참다운 혁명가로도 될수 있다는것은 오랜 혁명투쟁력사가 보여 준 귀중한 교훈이였으며 진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덕수동지의 경우에도 그의 남 다른 애국애족의 량심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시고 그를 조국과 민족이 알고 세상이 아는 참다운 혁명가,열렬한 애국자로,저명한 해외교포활동가로 명성을 떨칠수 있게 손 잡아 이끌어 주고 내세워 주시였다.
우리 수령님과 우리 장군님께서는 총련을 생각하실 때면 의례히 한덕수동지를 생각하시였고 한덕수동지를 생각하실 때면 총련을 생각하시였다.그것은 한평생을 바쳐 총련애국사업에 쌓아 올린 한덕수동지의 공적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시고 빛내여 주신 우리 수령님과 우리 장군님이시였기때문이였다.
한덕수동지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은 그의 생일 90돐때에 절정에 이르렀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원래 그의 생일은 2월 18일이였다.한덕수동지는 해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탄생일을 맞는 2월에는 자기의 생일을 쇠는것을 한사코 반대하여 왔다.생일 90돐을 맞는 1997년에도 그는 우리 장군님의 탄생일이 지난 3월에 가서 자기의 생일을 간단히 쇠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이해 1월 10일 한덕수동지자신은 물론 해당 부문의 그 어느 일군도 아직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그의 생일 90돐을 헤아려 주시면서 한덕수동지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그의 생일 90돐을 원래 날자보다 앞당겨 1월 29일에 쇠도록 하며 총련중앙회관에서 축하연도 성대히 진행하도록 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시고 그의 생일 90돐을 계기로 친히 최상의 평가를 담은 축전과 자신의 존함이 새겨 진 진귀한 청자기를 보내주시고 <김일성훈장>과 명예원사의 칭호도 안겨 주시였으며 자신의 명의로 생일상까지 차려 주시는 최상최고의 믿음과 은정을 베푸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생일 90돐을 맞는 한덕수동지를 기쁘게 해주시려고 조국에서 살고 있는 그의 아들네 가족들과 딸네 가족들까지 자기 아버지가 받은 경사에 참가하도록 일본에 보내주시였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월 29일에 보내신 축전에서 한덕수동지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최상의 높이에서 평가해 주시였다.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생일 90돐을 맞이하는 의장동지에게 충심으로 되는 열렬한 축하와 뜨거운 인사를 보냅니다.
의장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해외교포운동사상과 령도를 빛나게 구현하여 총련조직을 건설하였으며 사회주의조국의 륭성번영과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재일조선인운동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 온 우리 당과 혁명의 귀중한 원로이며 해외교포운동의 명망 높은 활동가,참다운 애국충신입니다.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애국애족의 새 력사를 자랑스럽게 개척해 온 총련과 재일조선인운동의 빛나는 로정에는 자기 수령과 자기 조국,자기 민족에 대한 끝 없는 충실성과 헌신적복무로 일관된 의장동지의 커다란 공로와 업적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덕수동지는 반세기가 넘는 기나긴 나날 재일조선인운동과 총련애국사업에 참으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위대한 수령님의 독창적인 로선전환방침을 관철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을 민족적애국운동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고 공화국의 참다운 해외공민조직인 총련을 결성한것은 한덕수동지가 세운 가장 큰 공적이다.또한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 진 이국땅에 재일동포들의 애국충정을 꽃 피워 세상사람들이 경탄하는 우리 시대 해외교포운동의 모범을 창조한것은 한덕수동지가 조국과 민족앞에 쌓아 올린 또 하나의 커다란 공적이였다.그리고 우리 동포가 사는 일본땅의 모든 곳에 초급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민주주의적민족교육체계가 정연하게 서고 동포자녀들을 조선의 넋을 지닌 참된 애국인재로 훌륭히 키우는 민족교육의 대화원이 펼쳐 지고 동포사회가 민족의 고유한 정서가 흘러 넘치는 우리의 노래,우리의 춤으로 흥성거리고 있는것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이국땅에서 뜨거운 애국심과 민족애를 지니고 민족을 지키고 살려 온 한덕수동지가 쌓아 올린 참으로 훌륭한 공적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큰 일을 해놓았다 한들 생일 90돐을 맞는 그날에 한덕수동지가 우리 장군님의 그처럼 분에 넘치는 높은 칭송과 최상의 평가,최대의 사랑을 받을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하기에 그때 총련중앙상임위원회가 한덕수의장의 생일 90돐을 축하하여 차린 성대한 연회장에서 한덕수동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고마운 은덕에 목 메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였다.그는 연회에서 답례하는 인사발언을 하였는데 첫 마디부터 하염없이 흘러 내리는 감사의 눈물속에서 하였다.한덕수동지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자기의 생일 90돐에 즈음하여 친히 보내주신 축전에서 분에 넘치게도 우리 당과 혁명의 귀중한 원로이며 해외교포운동의 명망 높은 활동가,참다운 애국충신이라고 높은 치하를 하여 주신데 대하여 말하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두볼을 적시였다.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솟구치는 격정을 가까스로 달래고는 감사의 말을 다시 이어 갔다.
<저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친히 축전을 보내주시리라고는 사실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는데 이처럼 뜨거운 말씀에 접하고 보니 자자구구 감격의 눈물없이는 도저히 읽을수가 없습니다.>
한덕수동지는 계속하여 지난 날 식민지노예살이의 쓰라린 인생행로도 눈물겹게 돌이켜 보고 두분의 세계적인 위인을 모시고 주체적인 재일조선인운동의 옳바른 길에 몸 담아 온 행운아의 한생도 추억하면서 북받치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나이 90이 된 오늘도 계속 건강한 몸으로 총련의장의 중책을 지니고 애국의 삶을 누리고 있는것은 오로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은덕에 의한것입니다.
인자하신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저에게 거듭거듭 로당익장하라고 간곡한 말씀을 하여 주시고 저의 건강을 걱정하시여 조국에서 거듭 치료를 받게 하여 주시였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저의 사업과 건강을 극진히 보살펴 주시였을뿐아니라 저의 생일 90돐을 함께 쇠도록 조국에 있는 아들식구 5명,맏사위식구 4명모두를 이자리에 보내주시였습니다.세상에 이런 례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더 뜨겁게 베풀어 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하늘 같은 덕망과 은혜로운 보살피심에 목이 메여 감격의 눈물을 금할수 없었던 한덕수동지는 그 뜻 깊은 날에 7년전의 일을 가슴 뜨겁게 더듬으며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것은 1990년 5월 한덕수동지의 부인 림수련녀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한덕수동지가 자기 글에서 쓴것처럼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베푸시는 의리와 사랑은 세상에 두번 다시 태여나 충성 다한다 해도 보상할수 없는 끝도 한계도 없는것임을 그는 자기 부인이 뜻하지 않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눈물겨웁게 체험하게 되였다.
한덕수동지는 1995년에 쓴 <의리 깊은 사랑을 추억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력사에 덕망으로 알려 진 성인,위인들이 적지 않지만 그 사랑은 대체로 위훈 떨친 영웅이나 충신 당자에게 한한것이였다.그 가족들까지 다같이 포옹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애국을 하고 애민애족을 하면 본인과 함께 그가 거느린 일가식솔들까지도 다 한품에 안으시여 꼭같이 사랑해 주시며 보살펴 주시는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1990년 5월 20일 재일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림수련녀사가 병상에서 숨을 거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 일군에게 조선중앙통신사에서 한덕수의장의 부인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짤막한 보고가 들어 왔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며칠전에 한덕수의장부인이 총련결성 35돐 재일조선인감사단성원으로 조국에 온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되여 갑자기 사망하였는가,그것이 정말인가고 총련중앙에 전화로 알아 보라고 하시였다.
그때가 아직 날이 채 밝기전이였다.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서 조국에서는 한덕수동지의 부인이 사망한것과 관련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조전을 총련에 보내였다.
또 얼마 지나서는 조국에 있는 아들과 사위가 도꾜로 갔다.그리고 조국에서는 림수련녀사의 사망과 관련하여 평양에 있는 아들집을 고별식장으로 정하고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으로 된 화환을 보내도록 하였으며 조국의 간부동지들이 고별식장을 찾아 조의를 표하도록 하였다.이 모든 사업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한밤을 꼬박 지새워 가시며 친히 조직하시였다.
그때로부터 넉달이 지난 그해 10월 6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로동당창건 45돐경축 재일본조선인축하단을 위하여 차린 오찬회에서 한덕수동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조국을 방문한 한덕수의장동지를 만나보고 나니 림수련동무에 대한 생각이 저절로 납니다.지난 5월 나는 한덕수의장동지와 림수련동무가 총련결성 35돐을 맞으면서 조국을 방문하겠다고 하기때문에 몹시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림수련동무가 잘못되였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낯 설고 물 설은 일본땅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으며 한덕수의장동지의 혁명사업을 도와 총련의 강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림수련동지의 애국적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바라던 조국의 륭성번영과 통일을 위하여 이 잔을 들것을 제기합니다.>
순간 한덕수동지의 량볼로는 간신히 참고참던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 내려 들고 있는 잔우에 떨어 지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격정의 눈물을 삼키며 서 있는 한덕수동지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시면서 <오늘과 같이 기쁜 날에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여서 안되였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후에 있은 일이였다.한덕수동지는 해외일군들과 혼연일체가 되시여 슬픔도 괴로움도 함께 나누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다함 없는 감사의 정을 날이 갈수록 더 목 메이게 느끼였다.
한덕수동지는 부인의 장례를 치른후 묘를 당장 어디에 써야 할지 용단을 내릴수 없어 유골을 집에서 그대로 간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조국에서 기별이 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림수련녀사를 애국렬사릉에 안장하도록 하여 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 주시였으니 어서 부인의 유골을 옮길 차비를 해야 하겠다는것이였다.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한덕수동지의 눈길은 어느 사이 방안에 간수하고 있던 부인의 유골을 더듬고 있었다.
<여보,당신이 어디로 가게 됐는지 알기나 하노? 생전에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던 조국으로 가,조국으로 숨지기 바로 직전에도 조국방문한다고 그렇게도 좋아 하더니 이젠 당신이 죽어서도 유한은 풀게 됐네>
정말 꿈에도 생각한적 없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 믿음과 사랑이여서 한덕수동지는 송구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뜨거운 눈물만 쏟고 또 쏟았다.
참으로 한덕수동지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은 남 달리 크고 지극하시였다.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에 온 총련대표단을 만나실 때마다 한덕수동지의 안부를 물어 보시는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장시간의 담화끝에 총련일군들과 헤여지실 때마다 한덕수의장동지에게 인사를 전해 달라는 간절한 당부로 이야기를 끝 맺으시였다.
1997년 4월 25일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85돐과 조선인민군창건 65돐경축 열병식전야에 바쁘신 틈을 내시여 재일본조선인축하단 성원들을 만나시였을 때에도 한덕수의장의 건강부터 물으시고 의장을 끝없이 아끼시고 믿으시는 뜨거운 사랑의 말씀을 하시였다.
<한덕수동지도 건강합니까?>
총련의 책임일군은 그가 건강하다고 말씀 드리면서 얼마전에는 기차를 타고 효고현에까지 가서 우리 학교들을 돌아 보고 온 사실을 보고 드리였다.
한덕수동지가 효고현에까지 다녀 온 사실에 대하여 이미 알고 계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못내 기뻐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한덕수의장동지가 건강하여 효고현에까지 나가 지진피해를 가시고 새로 일떠선 우리 학교들을 돌아 보았다고 하는데 대단합니다.
동무들이 돌아 가면 한덕수의장에게 나의 인사를 전달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날 총련의 책임일군은 두달전 2월에 한덕수동지의 생일 90돐에 즈음하여 크나큰 은정을 돌려 준데 대하여 그가 경애하는 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 내용을 말씀 올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덕수동지가 부탁한 감사의 인사를 전달 받으시고 다음과 같은 뜨거운 말씀을 하시였다.
<한덕수의장동지가 자기 생일 90돐을 맞으며 조국에서 축전도 보내주고 선물도 보내주었으며 명예칭호도 수여해 주었을뿐아니라 조국에 와 있는 아들,딸,손자,손녀들까지 다 보내준데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는데 이것은 우리 당이 생전에 한덕수의장동지를 아끼고 사랑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시해 준것입니다.
동무들이 한덕수의장동지의 건강을 잘 돌봐 주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정세하에서 한덕수의장동지가 건강하여 앉아 있기만 해도 좋습니다.>
얼마나 사랑 깊은 뜨거운 믿음의 말씀인가.전사에 대한 이보다 더 크고 깊은 사랑,이보다 뜨겁고 고결한 사랑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때로부터 한달이 지났을 때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해 6월에 90이 된 한덕수동지가 조국을 방문하여 영생의 모습으로 계시는 어버이수령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하는 심정을 깊이 헤아리시고 수령님의 서거 3돐 추모행사때 그가 배로 오기 힘들면 비행기를 보내서라도 데려 오도록 하라는 은정 깊은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한덕수동지는 90고령의 몸이였지만 불편없이 조국을 또다시 방문할수 있었다.
이해 7월 8일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3돐 중앙추모대회가 열리게 되는 금수산기념궁전에 나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덕수동지와 동행하고 있던 당중앙위원회 한 책임일군을 부르시였다.그러시고는 그에게 한덕수의장이 불편한 몸으로 추모대회에 참가해도 괜찮겠는가고 그의 신상을 먼저 념려하시였다.
본인부터 만나면 자기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다 말할것 같지 않아 동행한 일군을 따로 불러 알아 보시는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그 일군이 2년전보다 체력은 많이 떨어 졌지만 정신상태와 기억력은 그전과 다름이 없으며 다만 다리가 좀 아파서 오래 서 있기 힘들어 한다고 말씀 드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러면 알겠다고 저으기 마음을 놓으시였다.
그러시고 한덕수동지가 있는 곳에 이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 주시며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다정히 인사의 말씀을 하신후 요즘 건강이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팽이에 의지해 불편하게 서 있는 그에게 <몸이 불편하신데 여기에 편히 앉으십시오.>라고 자리를 권하시였다.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쏘파에 앉은 한덕수동지를 인자하신 눈길로 한동안 바라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갈리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의장동지가 이렇게 오신것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 하시겠습니까.>
그이께서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금치 못하며 울먹울먹해 하는 한덕수동지를 바라보시며 자애 깊은 어조로 의장동지가 건강하여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고,그래야 젊은 사람들이 마음이 든든하여 총련의 대를 꿋꿋이 이어 나갈수 있으며 적들도 함부로 접어 들지 못할것이라고 믿음을 주시였다.
추모대회의 시간은 한초한초 박두해 오고 있었지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령의 총련의장에게 주실수 있는 최상의 믿음과 영광을 다 안겨 주시며 은정 깊은 말씀을 계속 이어 가시였다.그러시다가 시간이 되여 주석단으로 나가실 때에는 그의 신상이 못내 걱정되시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덕수동지에게 <밀차를 타고 주석단으로 나갑시다.먼저 앞서 나가면서 조국간부들과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하시면서 밀차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였다.
한덕수동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 극진한 보살피심이 감사하여 뜨거운 눈물을 량볼에 줄줄이 흘리며 밀차에 앉아 주석단으로 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덕수동지를 가장 가까운 해외혁명동지로 굳게 믿으시고 참다운 혁명가,열렬한 애국자,능력 있는 정치활동가로 걸음걸음 손 잡아 이끌어 주시고도 그에게 혁명전사로서 지닐수 있는 최상최대의 특전과 영광을 모두 안겨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속에 한덕수동지의 앞가슴에는 3개의 <김일성훈장>과 <김일성상>금메달,2개의 로력영웅금메달을 비롯하여 수많은 훈장과 메달이 빛나게 되였다.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 진 백금시계와 금시계선물,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표창장과 대를 두고 가보로 전해 갈 그가 받은 수많은 은정 깊은 선물들과 명예원사,교수,박사의 학위학직에 깃든 감동적인 사연을 어찌 다 적을수 있을것인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각별한 믿음과 크나큰 사랑속에서 한덕수동지는 조국과 민족이 알고 세상이 다 아는 참다운 혁명가,열렬한 애국자로,저명한 해외교포활동가로 명성을 떨칠수 있었다.
우리는 이 글을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자신보다 한덕수동지의 신상을 더 걱정하시며 그에게 로당익장의 활력과 소생의 기적을 안겨 주신 운명구원의 전설로 전해 지고 있는 그 가슴 뜨거운 이야기로 마감 지으려고 한다.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로환무책>이라는 말이 있다.고령에 이르러 만난 병은 어쩔수 없다는것은 의학계나 인간세상에서 굳어 진 하나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장군님께서는 이 상식과 법칙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부정하시고 사랑이야말로 불치의 <로환>도 치료하여 젊음과 활기를 주는 신비로운 명약이고 보약임을 우리 인민들에게 보여 주시였다.
한덕수동지는 92살에 쓴 회상실기에서 이렇게 쓴바 있었다.
<가을이 오면 락엽이 지듯 사람도 생리적인 로화는 어쩔수 없는것인지 나는 구순이 가까와 오면서부터는 위중한 병을 만나 자주 병석에 눕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일본병원에 입원하여 별의별 치료를 다 받아 보고 약도 쓸수 있는껏 써보았으나 로환무책이라고 별로 효험이 없었습니다.게다가 1년나마 내내 침상에 누워 있다나니 다리근육마저 까드라들어 한발자국도 걸을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때 한덕수동지자신도 이제는 이국땅에서 숨지고 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병세는 위독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병세를 두고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시였다.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의 일군들과 총련일군들을 만나실 때마다 한의장의 병세는 어떤가,의장 같은 혁명가가 지금 어디 있는가,의장은 총련에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좋겠다고,이따금 총련중앙에 나가 얼굴만 보여도 마음을 놓겠다고 절절히 이르시며 병치료를 잘하도록 하라고 거듭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유능한 의사들도 한덕수동지의 치료를 위해 일본 도꾜에 파견하여 주시고 그에게 새 힘과 생기를 주시려는 마음에서 평양에서 살고 있는 아들딸도 아버지의 병문안과 병구완을 하라고 도꾜로 보내주시였다.
그러나 한덕수동지의 병세는 호전되였다가는 다시 악화되면서 좀처럼 숙어 들지 않았다.그는 자주 혼수상태에 빠지기까지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즉시 한덕수동지를 조국에 데려다 치료하도록 은정을 베풀어 주시였다.그리하여 한덕수동지는 1994년 4월 하순에 비행기로 조국에 오게 되였다.한덕수동지는 전혀 운신도 못하고 의식도 몽롱한 상태였다.그는 평양의 숙소에 들어 서서도 혼수상태에서 깨여 나지 못하였다.
이처럼 병세가 위독한 그에게 신비로운 소생과 기적적인 생명력을 안겨 주신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각별한 보살피심과 사랑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덕수동지를 위문방문하신것은 4월 28일이였다.
그날 아침 한 수원이 한덕수동지에게 수령님께서 곧 병문안을 오신다는것을 알려 주었다.
한덕수동지는 후날 이때를 회상하여 이렇게 썼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어버이수령님께서 아무리 해외전사를 사랑하시기로서니 내가 입원한 이 일본병원(당시 그는 자기가 조국에 와 있는지,여기가 어딘지 알지 못하였다)에까지 찾아 오신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수원들이 나를 밀차에 태워 현관으로 밀고 나갈 때에도 나는 이 젊은이들이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노하고 의혹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후 현관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아,그처럼 오매불망 그리워 마지 않던 어버이수령님께서 들어 서시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나는 펄쩍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꿈인가,생시인가 너무도 천만뜻밖이여서 어쩔줄을 몰라 하는데 밀차에 다가오시여 내려다 보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얼굴에는 추연한 그늘이 순식간에 휙 번져 갔습니다.
이역에서 병을 만나 돌아 온 이 몸을 가슴 저린 눈길로 맞아 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을 뵈오니 불시에 애연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밀차에 앉은 한덕수동지를 보면서 너무도 억이 막히시여 침통하신 표정을 지으시고 <걷지 못하나?>라고 갈리신 음성으로 물으시였다.그러시고는 한덕수동지의 정상이 하도 가슴 아프신듯 묵묵히 그를 바라보시던 수령님께서는 깊은 한숨을 쉬고 나시여 <앞서라구.>라고 하시며 그가 앉은 밀차를 앞세우고 휴계실에 들어 서시였다.
휴계실에서 밀차에 앉아 있는 한덕수동지와 마주 앉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병세와 치료정형을 세세히 알아 보시고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내가 보기에는 의장동지가 다리를 잘 쓰지 못하여 그렇지 다른 병은 없는것 같습니다.의장동지의 얼굴모습도 2년전에 비하여 별로 달라 진것이 없습니다.
지금 의장동지가 다리를 잘 쓰지 못하여 제대로 걷지 못하는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앞으로 치료를 잘 받으면 고칠수 있을것입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환자를 위로해 주시려고 말씀은 이렇게 하시였지만 아직도 병고의 자욱이 어려 있는 한덕수동지의 안색을 바라보시며 무척 가슴 쓰려 하시였다.그러시면서도 수령님께서는 환자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애 쓰시면서 그에게 고무가 될 말씀을 해주시였다.
<의장동지가 이제는 나이가 많기때문에 다리를 고치기 힘들것 같다고 하는데 절대로 락심해서는 안됩니다.약 절반 마음 절반이라고 병치료에서 신심을 잃지 않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한덕수동지의 나이는 87살이였다.
방안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병석에서 신고하는 해외의 한 로전사에게 힘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려고 마음 쓰시는 크나큰 은정과 그 고마운 은정에 감격해 하는 로전사의 뜨거운 마음이 가득히 어려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시간을 아끼지 않으시고 한덕수동지에게 이제 고려의학치료를 집중적으로 하면 얼마든지 병을 고칠수 있다고 하시면서 지난 시기 우리의 고려의학치료를 받고 효과를 본 외국인들과 우리 사람들의 실례도 들면서 그에게 위로가 될 여러가지 말씀을 오랜 시간 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시고는 <한덕수의장동지가 두해동안 앓으면서 빨리 병을 고쳐야 하겠다는 조급성을 가지게 되였는데 절대로 조급해 하지 말고 인내성 있게 치료를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의장동지는 지금까지 한 일도 많은데 치료를 잘 받아 다리를 꼭 고치고 앞으로 한 20년은 더 살아야 합니다.>라고 고무해 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러시고도 그에게 신심과 용기를 안겨 주시기 위하여 마디마디에 뜨거운 정을 담아 우리 혁명을 위해 100살까지 살자고,한의장이 치료를 잘 받아 건강을 회복하면 얼마든지 100살까지 살수 있다고 힘 주어 말씀하시였다.
우렁우렁하신 음성으로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는 한덕수동지에게 소생의 힘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려는 각별한 은정이 넘쳐 있었다.
어버이수령님의 이날의 위문방문은 한덕수동지에게 두번 다시 생을 준 명약이 되고 보약이 되였다.수령님의 위문방문이 있은후 그의 병세는 신비로울 정도로 호전되여 갔다.위대한 사랑의 힘은 그의 병치료에서 하나의 기적을 낳았다.한덕수동지가 조국에 도착하였을 때는 사람들을 가려 보지 못하였지만 집중적인 고려의학치료를 받은 다음부터 정신상태도 퍽 좋아 졌고 까드라들었던 다리근육도 풀리기 시작하여 얼마후에는 밀차에서 내려 걷기 위한 노력도 하고 글쓰기련습까지도 하게 되였다.
이 기적적인 치료성과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무척 기뻐 하시며 해당 일군들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소년단 제5차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게 되는데 그때 한덕수동지의 걷는 모습을 수령님께 보여 드리게 하자고 말씀하시였다.
그날은 6월 7일 아침이였다.한덕수동지는 밀차를 버리고 나와 승용차에 올라 기념촬영장으로 갔다.
이윽고 촬영장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덕수동지를 보시자 기쁨에 겨운 음성으로 <한의장동지가 나왔구만>라고 하시며 그리도 기뻐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300보까지 걷게 되였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300보 거 대단하구만.기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못내 만족해 하시였다.
한덕수동지는 어버이수령님께 어제 낮에는 쉬지 않고 단번에 100메터정도 걸었다고 말씀 드리였다.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가슴 뜨거운 말씀을 하시였다.
<혁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슴 아픈 때는 혁명의 길에서 생사운명을 같이 해오던 혁명동지가 병으로 고통 받는것을 볼 때이고 기쁜 때는 혁명동지의 건강이 좋아 진것을 볼 때입니다.나에게는 기쁜 일이 많았지만 오늘 의장동지의 건강이 퍽 좋아 진것을 보니 더없이 기쁩니다.나는 의장동지의 건강이 좋아 진것을 축하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한덕수동지를 자신의 곁에 앉혀 주시고 기념사진을 찍으신후 자리를 뜨시다가 지팽이를 짚고 서 있는 한덕수동지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시더니 헤여지기 아쉬워 하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신듯 그에게로 다가가시여 그를 한품에 꽉 껴안아 주시였다.그러시고는 자신의 볼에 그의 량볼을 따뜻이 대여 주시였다.수령님의 은혜로운 품에 안긴 한덕수동지는 마치 막혔던 샘이 터진듯 쏟아 지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곳 휴계실에서 다시 한덕수동지와 마주 앉으시여 그의 건강이 좋아 진데 대하여 기뻐 하시며 은정 깊은 말씀을 해주신후 작별하실 때에는 이런 뜨거운 말씀을 하시였다.
<나는 1974년에 의장동지의 둘째 딸이 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를 우리 집에 데려다가 식사를 같이 하면서 로당익장하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로당익장이라는 말은 늙은 사람일수록 장수힘을 키워 가지고 혈기왕성하여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의장동지가 건강하여야 총련사업이 계속 잘될수 있습니다.
나는 의장동지가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로당익장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절절히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당익장 단단히 기억해 두시오.내 말을 알아 들을수 있습니까?>라고 재삼 힘 주어 물으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덕수동지의 손을 뜨겁게 잡으시며 <자,그러면 다시 만납시다.신심을 가지고 병치료를 잘하십시오.그리고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라고 은정 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이것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덕수동지를 마지막으로 만나주신 영원한 작별의 순간이였다.
그때로부터 한달이 되던 7월 8일 천만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한덕수동지는 치료를 받고 있던 숙소에서 듣게 되였다.한덕수동지는 이 소식을 믿지 않았다.바로 한달전 6월 7일 그날에 자기를 만나주시고 우리 100살까지 살자고,우리 서로 혁명을 위해 오래오래 함께 살자고,꼭 로당익장하라고 하시면서 다시 만나자고 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렇게 불시에 떠나셨다니 한덕수동지는 이 가슴 아픈 소식을 도무지 믿을래야 믿을수 없었다.
그는 통분으로 하여 침식을 잊은채 며칠낮,며칠밤을 울고 또 울다나니 병은 또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별의별 특효약을 써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한덕수동지를 또다시 소생시키고 구원하여 주신분은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온 나라에 슬픔과 통탄의 눈물이 넘쳐 흐르던 그 가슴 아픈 시각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덕수동지의 건강에 대하여 몹시 걱정하시며 여러차례나 해당 부문 일군들에게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대책을 다 취해 주시는 은정을 베풀어 주시였다.
그러하던 7월 14일이였다.이날 해외 각지에서 온 조객들과 함께 금수산의사당을 찾은 한덕수동지는 어버이수령님의 령구앞에서 경애하는 장군님을 또다시 만나뵈옵고 터지는 울음을 걷잡지 못하였다.그러자 심려의 빛이 어린 안색으로 한동안 그를 묵묵히 바라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 주시면서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한의장동지의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의장동지에게 혁명을 위하여 오래오래 사셔야 한다고 하시였는데 그 유훈대로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한덕수동지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정은 일찌기 그 어디서 들어 본적도 없고 또 어느 누구도 받아 본적이 없는 이 세상 가장 큰 사랑이였으며 가장 뜨거운 은정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그처럼 신신당부하시던 로당익장을 한덕수동지는 실생활로 체험하게 되였다.예로부터 <인간칠십 고래희>라고 하였는데 그보다 20년도 더 많은 94살의 인생고개에까지 오른 한덕수동지가 혈기왕성하여 로당익장하며 총련의장의 중책을 감당할수 있은것은 이역땅 로전사의 로환을 두고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불 같은 사랑과 지극한 보살피심에 의해서였다.정녕 한덕수동지를 아끼시고 보살펴 주신 우리 장군님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한덕수동지가 운명의 마지막시각에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존경합니다.하늘보다 더 존경합니다.>라고 남긴 유언은 바로 해외의 이름 없던 전사를 품에 안으시여 하늘 같은 믿음과 인덕으로 세기와 세기를 이어 높이 내세워 주시고 보살펴 주신 우리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다함 없는 감사의 분출이며 수령숭배의 영원한 태양찬가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덕수동지가 서거하였다는 비보에 접하시였을 때에는 비통함을 금치 못하시며 그의 한생에 대한 최상의 값 높은 평가의 말씀을 거듭 주시고 이역땅에서 숨진 그를 조국의 품에 안아 영생의 모습으로 빛내여 주시려고 애국렬사릉의 높은 언덕에 부인의 유해와 나란히 안장하도록 하여 주시는 한량 없는 믿음과 사랑을 베풀어 주시였다.여기에는 일찌기 해외에서 애국활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심장의 고동을 멈추는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수령님과 사회주의조국에 일편단심 충성 다해 온 한덕수동지에 대한 우리 장군님의 최상의 평가와 고결한 혁명적의리가 뜨겁게 깃들어 있다.
혁명의 귀중한 원로로,명망 높은 활동가로,애국충신으로 한덕수동지를 해외교포운동의 최절정에 높이 내세워 주시고 주실수 있는 모든 믿음과 사랑을 다 안겨 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가장 숭고한 혁명적의리에 대한 또 하나의 혁명전설로 아로새겨 진 이 가슴 뜨거운 이야기,그것은 혁명의 수령이 전사에게 베풀수 있는 사랑의 상상봉이였다.그리고 진정 그 품은 태양의 품이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