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3차회의가 2002년 11월 6일부터 9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였다.
회의에서 쌍방은 력사적인 6.15공동선언의 기본정신에 맞게 경제협력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한 당면문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1.북과 남은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련결을 동시에 빨리 진척시켜 나가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쌍방은 1차적으로 동해선 철도와 도로를 금강산지역에,서해선 철도와 도로를 개성공업지구에 련결하여 금강산관광이 활성화되고 개성공업지구건설이 진척될수 있도록 실무적대책을 적극 취해 나간다.
이를 위해 철도 및 도로련결지점을 쌍방 군사당국이 합의하는데 따라 11월중에 공동측량을 하여 정하되 날자와 진행절차문제들은 문서교환방식으로 협의하며 공사일정표를 교환하고 필요한 공사진행정형을 정기적으로 서로 통보하기로 한다.
쌍방은 철도 및 도로련결을 위한 실무접촉을 11월 중순 금강산에서 가지고 당면한 실무적문제들을 협의해결한다.
2.북과 남은 2002년 12월 하순에 개성공업지구건설이 착공되여 원활히 추진되도록 적극 협력한다.
북측은 11월 중순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하며 남측은 빠른 시일안에 필요한 기반시설건설을 상업적방식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한다.
쌍방은 개성공업지구건설과 관련한 실무접촉을 12월 초에 가지고 당면한 실무적문제들을 협의해결한다.
3.북과 남은 쌍방 민간선박들의 상대측령해통과와 안전운항 등 해운협력에 관한 합의서채택을 위한 실무접촉을 11월 19일에,북측 동해어장의 일부를 남측 어민들이 리용하는 문제와 관련한 실무접촉을 협의확정되는 빠른 시일안에 각기 금강산에서 가지기로 한다.
4.북과 남은 빠른 시일안에 이미 합의된 경제협력의 제도적담보를 위한 4개 합의서를 각기 해당한 법적절차를 밟아 동시에 발효시키기로 한다.
쌍방은 경제협력제도분과회의를 12월 중순 서울에서 가지고 4개 합의서의 후속조치와 통행,원산지확인 등의 문제를 협의하기로 한다.
5.북과 남은 남측경제고찰단의 북측방문이 실현되도록 노력한다.
6.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4차회의는 2003년 2월 초 서울에서 진행한다.
8일 저녁 우리측에서는 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3차회의에 참가한 남측대표단을 위하여 연회를 차렸다.(끝)
1.일제의 조선침략의 전략적목적과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력사무대에 등장한 첫날부터 조선을 저들의 상품판매시장,원료략타지,자본수출지로 독점하고 조선인민을 가혹하게 착취수탈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부국강병>의 <국시>를 실현하며 조선반도를 대륙침략의 군사전략적교두보로 리용하여 전 아시아를 정복하고 일본이 맹주로 되는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려는 침략적야망으로부터 대조선군사적강점정책을 전반적대외침략정책의 중요한 고리고 확정하였다.
일제는 동북아시아반도인 조선반도의 지정학적조건 즉 조선반도가 륙지로는 아시아대륙과 바다로는 태평양지역의 섬나라들과 련결되여 있는 해외침략의 발판의 위치에 서 있는 사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을 저들의 <대동아공영권>구상을 실현하는데서 첫째가는 침략대상으로 규정하였다.
조선을 먹어야 아시아를 먹을수 있다는 일제의 조선을 축으로 하는 아시아대륙침략전략은 도꾸가와막부통치말기인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사이에 작성제창된 <조선정벌론>을 통하여 세상에 공개되였다.
<조선정벌론>의 기본내용은 1854년 요시다쇼잉의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꺾고 중국을 누르고 인디아에 림함으로써 도요도미(<임진왜란>의 침략두목인 풍신수길-필자)가 성취하지 못한바를 이룩하자>(일문 <청일.로일전쟁 사화>9페지,도꾜 1937년)라는 글을 통하여 알수 있다.
<조선정벌론>의 침략전략은 <명치유신>후 사이고 다까모리일파의 <정한론>으로 실천되고 1876년의 침략적이며 불평등적인 <강화도조약>으로 정책화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5조약>의 날조로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한 첫날부터 조선침략전략에 기초하여 우리 민족을 모조리 말살하는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하였다.조선민족말살정책은 조선의 국가멸망,국토략탈,민족멸종에 의한 조선의 일본화,조선사람의 일본인화를 목적으로 한 일본식민족동화정책이였다.
조선민족말살정책은 명치<천황>을 주축으로 하여 이또 히로부미를 두목으로 한 해외침략에 이골이 난 <삿죠>(샤쯔마번,죠슈번)출신의 군국주의군벌들에 의하여 모의책정되였다.조선민족말살정책은 5대군사책략으로 강행되였다.5대군사책략은 군사적강제에 의한 <국부>(국왕),<국모>(왕비)에 대한 백색테로,군사적강제점령,군사적강제통치,군사적파괴략탈,군사적강제련행이다.조선민족말살정책의 현지집행기관인 <통감부>,<총독부>,<조선군사령부>는 조선민족멸종을 위하여 수백만명의 조선인민들을 학살,체포투옥하였으며 1938-1945년까지만 하여도 600만명이상의 조선의 청장년들을 로동노예,성노예,군노예로 징발해 감으로써 부부생활을 통한 민족후대증식을 파탄시켰다.일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화결혼>을 정책화함으로써 조선민족의 혈통말살을 획책하였다.
일제는 강제징발한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을 노예적고역,성폭행,전쟁대포밥으로 내몰아 학살하거나 불구자로 만듦으로써 조선민족의 기본력량을 소멸약화시켰다.
일제는 민족국가,민족령토,민족자원,민족인적력량은 물론 민족어와 민족문화,민족력사,민족인의 개성적표식인 성과 이름까지 깡그리 빼앗는 세계정복력사와 식민지동화정책에서 그 류례를 찾아 볼수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악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애버리려고 광분하였다.
세계적인 정복대국으로 알려 진 고대그리스,로마제국,중세기의 뛰르끼예,몽골,근대의 나치스도이췰란드도 피정복민족의 국가와 령토는 파괴략탈하였지만 그 민족의 말과 글,민족력사,성과 이름까지 빼앗지는 않았다.오직 일제만이 조선의 민족적인 모든것을 빼앗아 갔다.
2.조선인강제련행제도의 개념과 내용
일제의 범죄적인 조선인강제련행제도는 군사적강제에 의한 민족인적자원인 민족로동력의 징발,노예화,소멸을 목적으로 한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주요구성부분이다.
일제는 군사적강제수단으로 조선민족로동력을 강제징발하여 로동노예,성노예,군노예로 만들어 생명의 법적담보가 없는 노예고역장,성폭행장,전쟁송장터로 들이밀어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학살하거나 로동능력상실자,성기능불구자로 만드는 반인륜적대범죄를 저질렀다.
강제련행피해자들의 증언과 피해진상조사자료에 의하면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은 징발,체포,랍치,회유기만,공갈협박,사기,인종차별,노예로동,성폭행,<육탄돌격>,고문,투옥,학살 등 인간증오와 야수성,포악성,잔인성의 악순환과정으로서 그것은 본질상 물리적강제인 육체적강제와 정신적강제를 결합한 초폭력적강제였다.1932년 일본 나가사끼현에서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기만하여 일본인녀성을 중국상해의 일본해군위안소에 끌어 간 사건에 대하여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1937년 일본인 알선업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실이 있었다.(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 <마이니찌신붕> 1997.8.6일부 공포)
이 사실은 당시 이미 국제법은 물론이고 일본국내법에도 <강제>라는 개념에는 육체적강제뿐만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꾀이거나 응하지 않으면 협박공갈을 가하는 등에 의한 정신적강제가 포함되고 있었다는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데로부터 일본정부는 1993년 5월의 국회답변에서 강제련행피해자인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단지 물리적강제를 가한다는것뿐만아니라 협박이라고 할지 공포감을 주는 방법을 적용하여 본인의 자유의사와 배치되는 행위를 감행케 한 경우를 포함한다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다>(참의원 예산위원회.1993.5.3 다니노 사꾸다로내각관방 내각 외정심의실장의 답변)
강제련행이란 말은 1960년대부터 사회적용어로 쓰이기 시작하였다.광복전 일제가 조선인민들을 군사적강제수단으로 련행해 가서 노예로동을 강요하고 있을 당시에는 강제련행이란 말이 없었다.조선국내에서 강제로동을 시키기 위하여 징발하는 로동력은 리조봉건사회에서 존속되여 오는 노예로동제인 <부역>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조선국외에로의 로동력징발은 <이입>,<이주>,<로무동원>,<모집>이라는 일본식용어를 사용하였다.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제도는 1926년의 <국제노예조약>이 규정한 노예로동이였다.이 조약에서는 노예제도를 <그 사람에 대하여 소유권을 동반하는 일부 또는 전부의 권능이 행사되는 개인의 지위 또는 상태를 말한다>고 정의하였다.국제조약이 규정한 노예제도는 조선인강제련행제도에 전적으로 부합된다.그것은 당시 일본국가가 조선인강제련행자들을 일본<제국>의 국가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진 노예소유자로 군림하고 있었기때문이다.그러므로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제도는 원칙상 노예로동제도였다고 말할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전후처리에 관한 까히라선언(1943.11)의 조선문제에 관한 결의에서도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라는 말로써 조선에대한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노예통치의 사실을 인정하였다.
광복전 일본의 사법기관이 편찬한 <판례집>이나 형사소송문서에 일본군대,헌병,경찰관,관공리,기업체와 민간인이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들을 잔인하게 학살한것을 살인죄로 기소공판한 실례가 단 한건도 없었다.이 사실은 일제와 조선인강제련행피해자들과의 관계를 노예주와 노예의 주종관계로 규정하는 제도적장치가 되여 있은데 기인된다.
조선반도내에서나 일본본토를 막론하고 일본인은 <조선인이 사람인가,정어리가 물고기인가?>라고 인종차별을 하면서 짐승 다루듯 하였다.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령> 공포이후 징발한 <징용>로무자들을 <반도로동전사>,<산업전사>,<응징사>라는 허울 좋은 딱지를 붙여 노예적혹사를 한 다음 임의의 시각,임의의 장소에서 생각나는대로 <죄명>을 들씌워 구타고문하고 죽일수도 있었으며 죽여도 살인범으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증오사상이 체질화된 전통적인 일본인의 조선민족멸시관의 깊은 뿌리에서 나온것이였다.
그것은 나가사끼 미쯔비시 하리마탄광의 전 로무계원이였던 일본인 고하꾸 마사유끼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규슈에서 로무관리의 력사는 미쯔이미이께탄광에서 감행된 혹독한 죄수로동에 대한 차별적로무관리의 전통을 무시하고는 생각할수 없다.그러나 그러한 로무관리는 혹가이도의 다꼬베야(로동자들을 엄격한 감시속에 가두어 넣는 감옥과 같은 합숙)에 비교할수 있는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권력을 얻어 비로소 살인적인 로동강도를 달성할수 있었던것이였다.로무담당자는 사실상 사람을 죽이거나 살려 둘수 있는 권리를 쥐고 로동자우에 군림하였다.탄광들에서 로무계에는 우익폭력단출신,직업군인,형사출신의 무리들이 많이 붙어 있는것이 보통현상이였다.강제련행로동자에 대한 로무관리대책은 이러한 전통적폭력장치와 국책수행,황국신민화라는 명분에 독립사상을 품은 자들에 대한 적발이라는 요소가 가해 져서 그 특별한 성격을 더욱 강화하는데서 수립된것이며 이 대의명분이 있으면 육체적고문은 물론 학살까지도 합법화된것이다>(일문으로 된 <특고월보> 1943.4월호 96페지)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은 비공개적강제련행과 공개적강제련행의 두 단계로 실시되였다.비공개적강제련행은 청일전쟁,로일전쟁시기 일본군이 일시적으로 조선반도를 군사적으로 강점하였을 때 <점령군>의 군권으로 지역적이며 제한된 대상에게 강요한 강제련행이였다.공개적강제련행은 조선을 무력으로 완전히 강점하고 40여년간의 식민지통치를 실시한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법제권과 군사,경찰의 공권력에 의거하여 전국,전민을 대상으로 감행한 강제련행이였다.(끝)
부산의 새 개항
부산은 오랜 세월 수난과 비극의 항구였다.
왜구가 침략의 촉수,침로의 발자국을 찍은 곳,임진란의 화살이 박히고 백의동포의 피가 뿌려 진 통한의 땅,일본의 강요로 개항이 이루어 진 이래 외래침략의 징검다리였던 땅,40여년 일제식민통치의 교두항이였던 부산이였다.
부산은 민족의 피눈물이 하염없이 뿌려 진 통곡의 항구이기도 했다.
이곳을 통해 망국의 한을 안고 <관부련락선>에 올랐던 동포들은 그 얼마였고 징용,징병으로,성노리개로 끌려 갔던 청장년들과 녀인들은 또 얼마였던가.
이 나라의 금은보화가 이곳을 거쳐 오랑캐의 섬나라로 쉴새 없이 빠져 나갔다.
수난의 력사는 8.15후에도 멈추어 지지 않았다.
양키강점자들의 침략선이 쉴새 없이 부산항으로 드나들었다.6.25전쟁때에는 미국의 침략병기와 군수물자가 산더미처럼 쓸어 들어 <한>반도를 재더미로 만들었고 수백만의 량민학살에 사용됐었다.
이 땅에서 살수 없어 고국을 하직하는 이민들의 눈물은 또 얼마였던가.가지 말라는 애원과 살아 돌아 오라는 기원의 울부짖음을 뒤로 남긴채 떠나가는 려객선의 처량한 고동소리 그칠 날 없던 부두,오늘도 서양식,왜식건물이 어수선하고 양풍,왜풍이 활개치는 <남이 사는 내 나라>,<식민지개척민들이 그려 놓은 설계도우에서 일어 서는 류랑민의 도시>,그 오명을 털어 버리지 못한 부산이다.
그러한 부산으로 김정일장군께서 보내주신 평양의 귀빈들이 찾아 왔다.
평양은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로 위상 떨치는 민족존엄의 성새요,자주자활의 상징이다.7천만 겨레의 참조국으로 각광 받는 어머니조국의 성도,민족의 원시조 단군의 릉이 웅건히 자리 잡은 민족의 본향,주체조국의 시조 김일성주석께서 영생하시는 태양의 성지 평양,우러르는 겨레의 마음이 끝없이 달려 가는 이 민족의 성도에서 대규모의 체육선수단과 응원단이 기세충천 입성했다.
김정일장군께서 하나의 겨레임을 보여 주라고,분단의 한을 풀고 동족의 정을 나누라고 보내주신 자주,평화,통일의 사절 평양꽃응원단.
그들을 맞이한 부산의 감격은 컸다.평양의 손님들을 태우고 단일기를 휘날리며 <만경봉-92>호가 다대포항에 입항하자 폭풍 같은 환호가 터져 올랐다.인산인해의 환영군중,각양각색의 환영구호판.
<환영 북측응원단>,<반갑습니다.평양응원단>,<북측응원단 열렬환영>
온 부산시민만이 아닌 이남민모두의 환호가 저 남해의 한끝까지 메아리쳤다.그에 답례하는 평양응원단 취주악대의 경쾌한 연주,이렇게 남북은 순간에 하나로 되였다.
약 1시간에 걸친 평양꽃응원단환영행사는 부산이 처음 엮은 감동의 화폭이였다.한 시인이 터친 격정대로 <력사에 의해 더럽혀 진 부산의 수난이 일시에 사라지는 장쾌한 광경>이였다.
평양꽃응원단의 입항은 분명 부산의 새로운 개항이였다.부산의 면모를 새로이 일신시키는 뜻 깊은 사변이였다.
평양꽃바람
평양응원단은 아름다운 선녀군단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절색이다.남에서는 보기 힘든 풋풋하고 소박한 외모,해맑은 미소와 깨끗한 얼굴,너무나 곱고 예쁘고 미끈한 그녀들은 그야말로 세계일류의 미인들이였다.통털어 선녀대군이였다.
외제화장품으로 멋을 낸것도,정형수술로 다듬은것도 아니였다.그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화장품-<봄향기>로 미를 한껏 돋군 <천연미인>들이였고 외래풍에도 황금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미녀>,<건강미녀>들이였다.
평양미녀의 매력은 외모에만 있지 않았다.마음씨 또한 더없이 아름다왔다.
겉 보고 속보기라고 말씨는 상냥하면서도 가식이 없고 인사는 소박하면서도 례의가 넘쳤다.교태도 애교도 없었지만 마음은 저절로 끌려 들고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어 졌다.
자고로 례절 바르고 상냥하며 절개 있고 순결한 우리 나라 녀성의 참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평양의 꽃>,<평양의 미녀>들이였다.
북의 처녀들은 어찌하여 저다지도 아름다울가.
태양이 없는 화원을 생각할수 없다.
평양의 녀인들은 김정일장군께서 가꾸시는 인간사랑의 화원에서 꽃 피고 다듬어 지는 진짜 미녀들이다.이북은 장군의 사랑의 정치아래 꽃 피는 인간화원이다.남녀의 차별도 없고 빈부격차도 모른다.모든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도와 주며 화목한 대가정을 이루며 산다.
그중에서도 녀성들은 <꽃>으로 사랑 받으며 행복을 구가하고 있다.<나라의 꽃>,<생활의 꽃>으로 활짝 피여 나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녀자는 꽃이 아니야>라는 노래가 울려도 북에서는 <녀성은 꽃이라네>라는 노래가 경쾌하게 울린다.
장군의 녀성우대정치가 있어 이북녀인들은 그토록 희한한 녀성천국에서 진선미를 한껏 뽐내고 있다.한 평양미녀가 <저만 예쁘지 않아요.우리모두가 다 예쁘고 아름다와요.>라고 자랑했듯이 김정일장군의 사랑의 정치가 꽃 피는 이북에서는 모두가 선녀이고 미인이다.평양꽃응원단은 그 많고 많은 미인들중의 일부일따름이다.
아름다운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처녀들,평양꽃응원단은 이 땅에 때 아닌 봄꽃바람을 몰아 왔다.
녀성에 대한 차별바람,녀자가 싫어 지는 미운바람,밥 먹듯이 벌어 지는 리혼바람에 몸살을 앓던 경향이 훈훈한 평양꽃바람,평양미녀풍에 빠져 들었다.<새벽녘의 감처럼 싱싱한 북녀풍>은 이남의 남성계를 <거 참 환장하겠네.손만 잡아 보아도 한이 없겠네.>로 들썩거리게 했다.
<평양꽃 사랑하는 아저씨부대>가 생겨 나고 인터네트에 북녀들의 사진과 이름이 소개되며 이북처녀와 결혼하겠다는 남자들이 무려 70프로에 이르렀다.<마음은 념불보다 제밥>이라고 경기에는 관심없이 미녀보기에만 열중하고 그 녀들을 며느리 삼겠다는 아빠,엄마수는 셀수조차 없이 많다.북녀와 악수한 손을 씻지 않고 고이 간수하겠다는 대학생,청년들은 또 얼마인가.
그 경이할 꽃바람을 보며 세계가 선망하는 선군정치로 이북을 인간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움의 나라로 만드시고 이북민을 미인의 세상에서 살게 해주신 김정일장군에 대한 숭앙의 마음 금할수 없다.
북녀풍에 빠져 든 이 땅 민중의 마음도 하나같이 그분께로 모아 지고 있으니 평양꽃바람은 그야말로 김정일장군숭앙열풍이라 하겠다.
절승의 명소
평양꽃응원단은 예술의 천사들이였다.
그들의 춤과 노래,응원은 하나같이 완성된 예술걸작품이였다.
하늘하늘한 자태를 뽐 내는 분홍,연두,노랑,하얀 등 형형색색의 한복과 단아한 운동복차림의 담차고 발랄한 신세대 미녀들의 잘 째이고 맵시 있는 응원모습은 경기성적보다 더 큰 탄성을 불러 일으켰다.뛰여 난 취주악연주실력과 지휘자의 현란한 지휘봉묘기,무용수들의 날씬한 몸동작은 관객의 눈뿌리를 뽑았다.박력과 저력 있는 음악과 그 세찬 울림은 일시에 땅을 박차고 질풍 같이 내달리는 천군만마인양 선수들에게 힘을 주고 군중을 격동시켰다.
그들의 조직력,단결력,일사불란함은 가히 충격적이였다.월드컵경기때 서울과 부산 등에서 붉은색샤쯔응원단과 주부응원단이 등장,세찬 응원선풍을 일으켰지만 평양꽃응원단과는 비교할바가 못됐다.평양꽃응원단은 수백명이였지만 수백만을 압도하는 응원기세를 올렸다.모두가 한덩어리,한몸처럼 움직였다.
안내요원 한씨가 <북의 큰 힘을 본다.저것이 바로 단결력이다.저 단결력앞에 미국도 움츠러 들고 있지 않는가.>라고 놀라와 했듯이 평양응원단은 김정일장군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북의 위상을 <신기의 응원>으로 생생히 재현했다.북의 응원수준을 압도할 응원이 없듯이 위인을 모셔 강성 떨치는 이북을 당할 자 세상에 없다는것을 만방에 과시했다.
그들이 곳곳에서 펼친 공연 또한 이채로왔다.
프레스쎈터앞에서의 일반공연,조선로동당창건 57주년을 경축하여 진행한 선수촌 야외무대에서의 공연은 <만점짜리>로 환성을 자아냈다.취주악 <아리랑>으로부터 갖가지 민요에 흥겨운 민속무용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우아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한 없는 민족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미국,일본 등 외국노래만 류행되고 춤도 노래도 그 본을 따던나머지 미일의 <문화괴뢰>로까지 전락되는 이 땅,통일적인 문화예술국책이 없어 오합지졸에 상업화되여 버린 예술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북의 응원단은 황홀함의 극치이면서도 민족성,주체성이 력력했다.민족자주의 얼이 살아 숨 쉬고 겨레의 문화전통이 올곧게 이어 지는 민족의 참예술이였다.
<평양의 5월1일경기장에서 성대히 거행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보는것만 같다.>
<예술의 최고걸작품,21세기 문예부흥의 신호탄으로 명성 떨친 아리랑을 보지 못한 부산시민들을 위해 김정일령도자께서 저토록 훌륭한 응원단을 보내셨다.>
이는 한두사람의 감탄,감사가 아니였다.부산시민들과 부산에 온 이남사람들모두의 진정 넘친 탄사였다.
김정일장군은 과시 예술의 천재이시다.
장군께서 선군의 음악정치를 펴시고 이북을 예술의 나라,노래의 나라로 올려 세우셨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번에 평양꽃응원단을 보니 장군은 과시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분이심을 확신케 했다.
부산문인협회의 정모씨는 <김정일령수께서는 예술로 신비의 정치를 하신다.몇천마디의 말보다 저들의 공연 하나면 북의 실상을 단번에 알수 있다.>며 장군께서 춤응원단,노래응원단을 보내주신 의미가 정말 크다고 마음속생각을 터놓기도 했다.
평양꽃응원단의 출현은 부산을 급기야 세계일류의 명소로 부상시켰다.
부산은 원래 산과 강,바다가 있어 경개로서는 빠지지 않았다.하지만 유흥업이 창궐하고 외래물류와 문류가 활개쳐 문화적얼굴이 없는 상업도시로 전락했다.여름한철 피서객이 몰려 들기도 하지만 어지럽고 메마른 해안이였다.
그런 부산에 새로운 모습,절승의 경개가 펼쳐 졌다.
령도자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 흘리고 어머니 조국찬가를 부르며 감격에 젖는 평양처녀들,참삶의 열정과 미래에 대한 희열과 랑만으로 충만된 그들의 모습은 만사람을 감복케 했다.북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물 젖은 사람들을 새롭게 정화시켰다.다대포주민들이 <그늘지고 답답한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 주고 쪼들린 동네에 기쁨을 가져 온 고마운 천사들>이라고 입을 모았듯이 그들은 모두가 시대의 선두에 선 <모델>이였고 참삶을 선도하는 <선생>들이였다.
그래서 더더욱 돋보이고 인기를 끄는 그들에게서 힘을 얻고 희망을 키우려는 사람들로 하여 부산은 전에 없이 흥성거렸다.
평양꽃응원단이 머무르는 다대포항으로부터 구덕야구경기장,부경대체육관,금정체육관 등 북녘선수들이 출전하고 응원단이 진출하는 장소에는 례외없이 관중구름이 밀려 들었다.
경기장은 사람바다,경기장밖은 사람물결,텔레비도 라지오도 온통 북측응원단소식,사람마다 화제는 평양꽃응원단,북측응원단활동을 돕기 위한 자원봉사대에만도 200여개 시민단체,수천명의 각계층 시민이 참여했다.실로 부산이 경험한적 없는 일대 복새통,사람충격이였다.
평양응원단의 노래와 춤은 14차 아시아경기대회를 가장 멋지게 장식한 원동력이였다.그들의 활동은 금메달보다 더 빛났다.승부만이 란무하는 경기장을 춤바다,노래마당으로 만들고 텅 비였던 경기장을 초만원의 인산인해로 만든 응원,무관심의 아시아경기대회가 가장 인기 있는 체육축제로 된것은 바로 평양꽃응원단의 덕이였다.
외국어대학교의 리모교수도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북측응원단을 파견해 주셨기때문에 이루어 진 대성공의 경기대회>로 평했었다.
손수 키우신 예술의 천사들을 보내셔 부산을 일류명소로 되게 해주신 김정일장군,아시아-태평양시대로 불리우는 21세기에 아시아를 세계의 가장 앞선 대륙으로 올려 세우시는 장군이시다.
그러니 온 겨레,전 인류가 부산시민과 더불어 그분을 그토록 존경하며 그분께 그렇듯 열렬한 감사를 올리고 있는것이다.
통일의 도시
평양응원단은 통일의 사절들이였다.
14차 아시아경기대회는 시작부터 통일한마당으로 펼쳐 졌다.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 채화된 성화가 아시아경기대회의 불길로 타번질 때 겨레의 가슴에 심어 진것은 무엇이였던가.백두에서 한나까지 조국은 하나라는 확신이였다.백두산을 떠나서는 조국도 통일도 없다는 의지가 7천만 민족의 심장을 달구었다.
남북의 선수들이 <아리랑>의 노래속에 단일기를 추켜 들고 경기장에 입장할 때의 감격은 너무도 컸다.그것은 우리는 민족도 피줄도 언어도 하나,력사도 문화도 땅도 하나,둘로 갈라 져서는 살수 없는 유기체와 같고 둘을 합치면 더 큰 하나가 됨을 세계에 선포하는 장엄한 행진이였다.
통일로 시작된 대회여서인가,경기장은 온통 통일열기로 끓어 번졌다.평양응원단은 그 통일마당의 주인공이였다.화해와 단합,교류의 전도사였다.노래도 통일노래,춤도 통일춤,응원도 남과 북이 따로 없는 <우리 선수 이겨라!>였다.평양응원단은 말 그대로 <6.15응원단>,<통일응원단>이였다.
그래서 그들을 보며 통일꿈에 젖어 보려고 경향 전역에서 수많은 관객이 모여 들었다.이남의 중심이 서울이 아니라 부산인듯 싶었다.경기장의 매표는 시작하자 끝나고 응원단의 옆좌석은 초만원이였다.멀리에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구입소동으로 망원경은 동이 날 지경이였다.그들을 보며 친북,애북의 감정이 고조됐고 통일에의 희망이 부풀었다.그들과 만남의 기쁨을 나누려 밤낮으로 찾아 간 시민들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경기장에는 분단의 장벽이 없었다.북측응원단이 <조국!> 하고 웨치면 약속이나 한듯 남측관람석에서는 <통일!>하고 화답했다.북측좌석에서 <우리는!> 하면 남측좌석에서 <하나다!>라고 응수했다.남측,북측이 따로 없는 하나의 응원단,<하나>였다.<한겨레남북공동응원단>을 발족하고 <북응원단동우회>까지 결성한 이남이였다.
북측선수단을 위해 인공기 120여장을 제작한 대구의 김호경씨,매일같이 평양꽃응원단이 거처하는 <만경봉-92>호 려객선을 바라보며 손풍금을 타주고 즐거움을 나눠 가진 리희안씨를 비롯한 다대1동,2동의 주민들,통일의 삶을 안겨 주는 북녘의 형제들과 어울려 <통일합창무대>를 열고 단일기를 흔들며 북측선수들을 격려한 시민응원단.그 감격적인 모습은 마치도 통일을 경축하는 전야제같았다.
<이번 경기대회에서 이북응원단이 지핀 화려한 통일의 불길이 이남 전 지역에로 거세게 번져 가도록 앞으로도 열과 성을 다할것>이라는 부산시민응원단의 선언문,<만경봉-92>호가 정박했던 다대포항을 <통일아시아드공원>으로 조성하려는 부산은 정녕 통일도시였다.
부산의 새로운 통일모습은 김정일장군의 자주통일사상이 안아 온 찬연한 현실이였다.
오랜 세월 분단이 굳어 진 땅에 평양의 선녀들이 통일의 노래 안고 내렸다.김정일장군께서 통일무지개,통일오작교를 주시고 부산을 통일축제장으로 만드셨다.거기엔 6.15공동선언의 기치밑에 기어이 통일을 이루실 장군의 의지가 뜨겁게 굽이쳤다.
2000년 6월 상봉으로 새 세기 통일의 리정표를 세워 주시고 투철한 통일신념과 숭고한 겨레사랑,광폭의 도량과 대용단으로 또다시 랭각되던 남북관계를 급전환시키신 장군,평양,서울,금강산의 통일마당에서 세차게 일어 나는 통일열풍을 부산에로 이어 놓으셔 2002년 통일잔치의 한마당을 마련해 주신 장군이시다.
미국이 몰아 온 반북광란으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때 부산에서 <평화의 성화>가 타오를수 있은것은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의 덕분이였다.
날과 달을 이으시는 거룩한 선군장정으로 북의 위력을 백방으로 다지셔 미국의 북침전쟁기도를 제압하신 장군,7천만 겨레를 전란의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고 민족의 안녕을 담보해 주시며 부산에 화해와 단합,평화와 통일의 비둘기가 날게 해주신 장군의 선군정치.
여기에서도 이남이 이북의 선군정치덕을 보고 있는것이다.기실 북의 선군정치가 없었더라면 <한>반도엔 열백번도 더 전란의 참화가 휩쓸었을것이 아닌가.그럴진대 북의 선군정치가 없는 이번 아시아경기대회에 대해 어찌 생각이나 할수 있겠는가.
통일련대의 한 인사는 <북이 외세의 지꿎은 위협속에서도 이번에 선수단,응원단을 파하는 배심을 가질수 있은것은 선군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는 확실한 통일결실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격정을 터치기도 했다.
부산의 이 새 모습에서 통일의 래일을 본다.
남과 북이 맞잡은 손이 얼마나 굳세고 하나되여 웨치는 함성이 얼마나 장엄한가를 절감한다.
평양꽃응원단은 갔다.
그러나 부산은 잊지 않는다.
자주와 평화,화합과 통일,사랑과 희망을 두고 간 그들은 부산의 력사속에 소중히 간직돼 있다.
<다시 만납시다!>,눈물속에 다진 그들과의 약속이 실현될 날은 멀지 않다.
통일의 태양 김정일장군께서 계시고 6.15공동선언이 앞길을 밝혀 평양꽃응원단을 다시 만날 그날,조국통일의 날은 기어이 오리라.(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