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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고발-간또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
(평양 8월 31일발 조선중앙통신)지금으로부터 90년전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리히터척도로 7.9의 대지진이 일본의 간또일대를 휩쓸었다.

일본력사에 보기 드문 간또대진재는 자연의 재난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감행된 조선인대학살이라는 인공적재난도 기록하여 력사에 악명높다.

미증유의 대지진은 당시 간또지방을 삽시에 무서운 혼란상태에 빠뜨렸다. 강한 지진과 폭풍, 련이은 화재로 수십만채의 집과 건물이 파괴되면서 무려 16만 6,000여명이 깔려죽고 불타죽는 참사가 빚어졌다.

순식간에 한지에 나앉은 69만여세대의 리재민들은 여진의 공포와 불안속에 헤덤비며 대피소동을 벌리였다.

리재민들을 비롯한 일본인들의 공포심리는 점차 자연의 엄청난 재해앞에 그때까지도 속수무책인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확대되는 사회적혼란과 민중의 불만을 눅잦히기 위해 일본정부가 고안해낸것이 바로 이른바 《치안유지》를 위한 《긴급조치》였다. 그의 핵심내용은 재일조선인들의 《방화》설, 《폭동》설로서 그 진압을 위해 《전시계엄령》을 공포해야 한다는것이였다.

9월 2일과 3일 일본왕의 《칙령》으로 도꾜부와 가나가와현 등 넓은 지역에 계엄상태가 선포되고 간또계엄사령부가 발족되였다.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적학살을 승인한 《전시계엄령》은 일본의 법적수속절차도 완전히 무시한채 발동되였다.

간또계엄사령부는 《계엄령》에 따라 재일조선인들을 《적》, 《폭도》로 규정하고 군대와 경찰, 《자경단》 등에 《조선인박멸》을 위한 《전투》개시를 명령하였다.

당시 미국신문 《아츠리셔데트 프레스》 9월 4일부가 《진재전역에 있어서 조선인의 폭동, 일본인에 대한 학살준비에 관한 풍설은 매우 많지만 전혀 근거는 없다.》고 전한것처럼 《조선인폭동》설은 완전한 허위였다.

교형리들의 조선인학살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일본도서 《조선인강제련행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사이다마현의 한 경찰서에서 있은 학살만행에 대해 한 경찰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참살정형은 도저히 입으로 표현할수 없었다. …어린이들을 줄세워놓고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잘랐으며 그 다음 그 부모들도 찔러죽이였다. 살아남은 조선인의 팔을 톱으로 켜는자도 있었다. 그것도 도중에서 팽개치고 또 다른 사람을 톱질하는 광경은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죽은 사람들의 눈을 식칼로 도려내는것도 보였다. …경찰서구내는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수 없는 형편이였다.》

일제의 대학살만행으로 희생된 재일조선동포들의 수는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밝혀진것만 하여도 2만 3,000여명에 달하였다.

일제야수들은 저들의 대학살범죄를 감추기 위해 시체들을 집단매몰하거나 석유를 뿌려 불태워버리는 등 2중적범죄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살인마들의 폭행과 추격에서 벗어나 겨우 목숨을 건진 조선사람들을 《위험분자》, 《폭도》로 지목하고 강제련행하여 집단적으로 《수용소》에 감금시키였다.

《수용소》에서 죄없는 《죄인》, 포로아닌 《포로》로 다루어진 수만명의 조선사람들은 후날 진재복구 등 강제로동판으로 끌려가 모진 학대와 고생, 죽음까지 강요당하였다.

일제의 천인공노할 조선인대학살만행은 철두철미 일본정부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감행된 민족배타적살륙전, 국가적테로행위였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학살을 일부 《자경단》 등에 의해 조직된것으로, 재일조선인들의 《폭행》이 배후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것으로 외곡선전하였다.

일제가 조직한 《림시진재구호사무국》산하 치안담당총사령부(경비부)의 9월 5일부 극비문서 《조선인문제에 관한 협정》에는 그 기만선전의 방향과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여있다.

《첫째로, 내외에 조선인문제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진상으로서 선전하는데 힘을 넣으며 장래 이것을 사실의 진상으로 할것. …조선인의 폭행은 많았고 …박해를 받은자는 적지만 일본인이 박해를 받은자는 많다. …조선인에 대하여 함부로 큰 박해를 가한 사실은 없다.

둘째로, 조선인의 폭행 혹은 폭행미수사실을 극력 조사하고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인정시켜야 한다.

…

일곱째로, 해외선전은 특히 적화일본인 혹은 적화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는것을 선전하는데 노력할것.…》

보는바와 같이 일제가 자행한 조선인대학살만행은 그 규모와 수법에서의 교활성, 잔인성에 있어서 력사에 보기 드문 반인륜적범죄였다.

그것은 유태인말살을 노린 히틀러도당의 대학살만행보다 퍽 앞서 감행된것으로서 일제의 민족배타적기질과 야수성이 파쑈도이췰란드도 무색케한것이였음을 말해준다.

수난에 찬 력사의 체험자인 조선민족은 일본이 저지른 과거죄악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다.

일본이 침략자, 략탈자로서 지난날 조선민족에게 끼친 불행은 너무도 크며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도덕의 모든 분야에 걸쳐 걸머진 빚은 헤아릴수 없이 방대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죄많은 과거를 반성, 사죄할 대신 피로 얼룩진 조선에 대한 식민지군사파쑈통치를 유미렬강으로부터의 《해방》과 《보호》로 외곡하면서 지난날의 범죄를 전면부정하고있다.

간또대지진때의 조선인학살범죄에 한해서도 오늘까지 개별적일본인들에게 전가하면서 진상규명과 배상을 한사코 회피하고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재일동포들의 민주주의적민족권리와 리익을 엄중히 침해하는 등 조선민족에 대한 적대행위를 오늘도 계속하고있다.

지난 7월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이시하라가 줴친 《북조선의 미련한 사람들이 야스구니진쟈에 불을 질렀다.》는 황당무계한 《방화》설은 결코 일개 극우익분자의 히스테리적망발로만 볼수 없다.

청산하지 않은 력사는 이렇듯 재현되는 법이다.

그것은 한세기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본의 그릇된 력사관과 극단한 민족배타주의사상, 그에 뿌리를 둔 일본사회의 우경화흐름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후안무치한 일본정치인들속에서 《력사란 100년정도 지나가야 진실을 알수 있다.》는 사무라이식력사관과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이 《합법》이였다는 궤변까지 터져나오고있지만 우리 민족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과 피의 자욱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생생히 새겨지고있다.

오늘 조선민족은 나라도 주권도 없이 외세의 침략과 략탈을 숙명으로 감수하던 어제날의 약소민족이 아니다.

청산되지 않은 20세기 일본의 범죄를 우리 민족은 21세기의 계속되는 범죄와 함께 반드시 결산하고야 말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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